[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獻仁陵) 탐방기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獻仁陵) 탐방기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0.12.2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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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인릉(獻仁陵·사적 194호)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조 왕릉이다. 이곳에는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인 인릉이 있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94호로 지정됐다.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황후의 능(陵)으로 합장릉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파주 장릉(인조와 인열황후) 근처에 있었다가, 1856년(철종 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황후의 능(陵)으로 합장릉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파주 장릉(인조와 인열황후) 근처에 있었다가, 1856년(철종 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순조(纯祖, 1790~1834) 이야기

순조는 정조의 아들로 1800년 11세로 왕위에 올라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후 순조는 직접 정사를 돌보았으나 아버지 정조의 개혁 정책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안동 김씨 세력이 득세하며, 조선 말기 ‘힘없는 왕'의 시대 첫 번째 왕, 비운의 왕이었다.

이후 60여 년 이어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기간에는 ‘삼정의 문란’, ‘매관매직’ 등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가 일상이 됐다. 이에 따라 홍경래의 난 등 전국에서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면서 혼란의 시기가 지속됐다.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암담했던 그야말로 말 그대로 ‘흑역사’ 그 자체였다.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효명세자를 낳는다. 효명세자는 세자 시절 아비인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정의 영향력을 회복하려 진력했다.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안동 김씨만큼 유력한 가문이었던 풍양 조씨와 혼인을 맺는다. 세자빈 조씨는 훗날 신정왕후 조씨로 불리었는데,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 고종을 발탁한 조대비가 바로 그녀이다. 신정왕후 조대비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 고종의 발탁으로 어느 정도 약화해 나감으로써 일찍 죽은 남편(효명세자)의 뜻을 이룬 셈이다.

순원왕후나 효명세자는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 사극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이 맡았던 역할이 효명세자였다.

그런데 효명세자가 21세 나이로 보위에도 오르지 못한 채 어린 아들(훗날 헌종)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손자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지만 헌종 역시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 결국 조선 왕실은 강화도령 철종을 왕위에 앉히게 되고, 그 바람에 순원왕후는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한 유일한 왕후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여기서 잠깐 등장하는 강화도령 철종 이야기와 흥선대원군 이야기는 후일에 담기로 한다.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를 모신 능(陵)이다. 홍살문에서 바라 본 헌릉 전경,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 넘어 언덕에 쌍릉이 모셔져 있다.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를 모신 능(陵)이다. 홍살문에서 바라 본 헌릉 전경,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 넘어 언덕에 쌍릉이 모셔져 있다.

태종(太宗, 1367~1422) 이야기

태종은 태조와 신의고황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1367년(고려 공민왕 16)에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3년(고려 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해 밀직사대언이 됐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왕자로서 정안군에 책봉됐다. 태종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신덕고황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해 왕세자 책봉에서 탈락했다.

이 과정에서 신덕고황후의 소생인 방석이 왕세자 자리에 오르게 됐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태종은 1398년(태조 7)에 정변을 일으키게 됐다(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태종은 신의고황후 소생의 왕자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고, 왕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살해한다. 이 사건을 통해 태조는 둘째 아들인 영안군 방과를 왕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자 왕세자 방과는 왕위(정종)에 올랐다.

그로부터 2년 후 신의고황후의 소생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태종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태종의 넷째 형 회안군 방간으로 해금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로 인해 회안군과 태종은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 됐다(제2차 왕자의 난, 박포의 난). 이 사건으로 태종이 승리하고, 박포는 사형에 처했으며, 회안군은 유배됨으로써 진정국면을 맞게 됐다. 이후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태종은 그해 2월 왕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지었으며, 1405년(태종 5)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를 했다.

재위 기간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폐지해 군사권을 장악, 전국의 인구를 파악해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했다. 정치적으로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강력한 왕권 강화를 이룩해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1418년(태종 18)에는 장자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한 후,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삼았으며, 2개월 뒤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군사권을 잡고 여생을 보냈다. 그 후 1422년(세종 4)에 연화방 신궁(창경궁)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후기 정형화된 왕릉과는 달리 고려 왕릉의 형태가 남아 있는 조선 초기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정형화된 왕릉과는 달리 고려 왕릉의 형태가 남아 있는 조선 초기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원경왕후(元敬王后) 이야기

원경왕후 민씨(1365~1420)는 본관이 여흥인 여흥부원군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딸로 1365년(고려 공민왕 14)에 송경 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2년(고려 우왕 8)에 태종과 혼인하고, 조선 개국 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책봉됐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태종 사이에 4남(양영, 효령, 세종, 성녕대군) 4녀(정순, 경정, 경안, 정선공주)를 두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정도전 등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득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의 도움이 컸다.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했다. 이때 사병을 거느린 왕자들은 병사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와 군장비를 모두 내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년 음력 8월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 왕자들은 근정전 문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다.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태종을 불러내었다. 그 후 태종은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난을 준비했고, 원경왕후는 친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태종에게 내주었다. 이로 인해 제1차 왕자의 난은 성공했고, 태종은 왕위 계승을 위한 수순을 한 차례 밟게 됐다.

이후 원경왕후는 1400년(정종 2)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태종이 즉위하자 왕비(정비)로 책봉됐다. 그러나 태종 즉위 후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은 권력의 분산과 왕권 강화를 위해 친족 배척의 정책을 쓰는 한편 후궁을 늘려나갔는데, 원경왕후는 이에 크게 불만을 품게 됐다. 특히 태종은 외척 세력 견제를 위해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제거하면서 원경왕후와의 불화가 극심해졌다. 1418년(태종 18)에 태종이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덕왕대비가 됐으며, 1420년(세종 2)에 수강궁 별전에서 56세로 별세한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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