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서울 강남구 선정릉(宣靖陵) 탐방기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서울 강남구 선정릉(宣靖陵) 탐방기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1.1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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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 안내도. 입구에서 좌측으로 성종 내외와 우측에 중종의 무덤이 모서져 있다. 순례 길은 오른쪽 중종 능(陵)부터 시작한다.
선정릉 안내도. 입구에서 좌측으로 성종 내외와 우측에 중종의 무덤이 모서져 있다. 순례 길은 오른쪽 중종 능(陵)부터 시작한다.

정릉(靖陵)은 조선 11대 왕 중종(中宗·1506~1544 재위)의 능(陵)이다. 중종은 세 사람의 왕비와 9명의 후궁을 거느렸다.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와의 사이에 12대 인종을 낳고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와의 사이에는 13대 명종을 낳았다. 그리고 후궁인 창빈 안씨 사이에서는 선조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대원군을 낳았다. 1488년 태어나 재위 39년 보령 57세로 총 9남 11녀를 두었는데 대체로 다복을 누린 군주라 할 수 있다.

원래 중종의 무덤은 고양 서삼릉 안에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과 함께 지금의 예릉 철종의 능 자리에 조성하고 정릉이라 했다. 명종 17년(1562)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가 중종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의 아들로 처음에는 진성대군에 봉해졌다가 1506년 반정(反政)으로 왕위에 올랐던 임금이다. 재위 기간에 연산군 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았고, 향악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중종반정은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 이역(李怿)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릉(靖陵) 전경, 돌바닥 끝에 정자각이 보이고 정자각 지붕  넘어로 봉분이 보인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릉(靖陵) 전경, 돌바닥 끝에 정자각이 보이고 정자각 지붕 넘어로 봉분이 보인다.

우리가 선릉(宣陵)이라 부르는 것은 성종과 정현왕후 능을 일컬음이다.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에 성종의 능이, 오른쪽 언덕에 정현왕후 능이다. 성종의 능에는 ‘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다.

성종은 1457년 의경세자(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 인수대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 지 두 달도 못 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는 바람에 성종은 할아버지인 세조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 세조는 일찍이 손자의 뛰어난 천품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총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세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성종은 세조 7년(1461)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1467년에는 한명회의 딸(뒷날의 공혜왕후)과 가례를 올린다. 세조 14년(1468)에는 자을산군으로 다시 봉해지고 이듬해 11월 숙부인 예종이 승하하면서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그 후 성인이 되는 7년 동안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았다. 비록 수렴청정으로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성종은 치세에 능한 왕이었다. 그 예로 성종은 권신과 사림세력을 조화롭게 운용하여 국가 권력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의 기초를 완성함으로써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成宗’이라는 묘호 역시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정책적으로 편찬사업을 육성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한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됐고,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이 간행되기도 했다. 이런 성종이었지만 장수까지 누리지는 못해 1494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승하했다. 생전에 그는 정비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를 비롯해 12명의 부인과 16남 15녀의 자녀를 두었다. 세 명의 왕비 중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있다. 폐비 윤씨의 아들인 10대 왕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제2 계비인 정현왕후 아들 진성대군이 11대 왕 중종으로 왕통을 이어받는다.

선릉으로 넘어가는 산책로.
선릉으로 넘어가는 산책로.

♧폐비 윤씨 비극적 이야기♧

폐비 윤씨 이야기는 1936년 매일신보에 연재됐던 박종화의 장편 역사소설 ‘금삼의 피’와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 영화에서 연산군 역의 신영균, 폐비 윤씨 역의 도금봉 영화배우를 통해 우리 기억에 남아 있다.

이씨조선 역사에 왕에서 반정으로 쫓겨나는 바람에 죽은 후에 군(君)이라 불리고 그의 시대의 기록은 실록이 아닌 일기로, 무덤 역시 능이 아닌 묘로 불리는 왕이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다. 여기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자식 없이 승하하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는 성종보다 12살 많은 나이로 성종의 후궁으로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왕대비 인수대비(소혜왕후)를 잘 봉양하여 두 사람의 총애를 받는다. 1474년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폐비 윤씨는 1476년에 중궁에 봉해졌다.

폐비 윤씨는 조선 9대 성종(成宗)의 정실왕비로서 윤기무(尹起畝)의 딸이다. 성종은 후궁이 많으므로 궁 안에서 일어나는 질투와 저주는 그칠 날이 없었다. 이 때문에 아들 연산군(燕山君)을 낳은 윤씨(尹氏) 왕비는 질투심이 불같아 성종의 눈 밖에 남으로써 궁중에서 쫓겨나는 폐서인이 되어 1482년 8월16일 사약(死藥)까지 받아 무참하게 죽었다. 일설에는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쫓겨났다고도 했다. 특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노하여 대신들에게까지 폐서인하라고 말했으며, 여기에 발맞추어 윤필상(尹弼商)이 찬동하여 일은 쉽사리 되어갔고, 그 대신 윤필상(尹弼商)의 가까운 친척 윤호(尹壕)의 딸이 왕비로 들어갔다.

왕비를 폐한 사건은 조선 왕조 역사상의 처음 있는 일이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출산한 정궁이면서도 투기심 등 부덕한 행위로 폐비됐다가 참극을 당했다. 이것이 갑자사화의 계기가 됐고, 연산군이 폐위되는 비극이 촉발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 여성의 불행한 죽음 때문에 그 뒤에 일어나는 연산군(燕山君) 때 사화(士禍)는 더욱 비참하게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조선 9대 왕 성종(1469~1494 재위)의 능(陵)이다.
조선 9대 왕 성종(1469~1494 재위)의 능(陵)이다.

♧중종반정 이야기♧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 이른바 훈구세력이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의 궁금세력(宮禁勢力)과 결탁해 학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킨 사건이다.

연산군은 당시 특권 관료층인 훈구세력과 성종 때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세력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 그는 1498년 훈구세력과 결탁해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를 무오사화로 한 차례 거세했다. 이로써 정치적 우세를 더욱 확고히 한 훈구세력은 그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권귀화(權貴化)의 경향을 현저하게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연산군은 궁금 계열 중심의 측근 세력을 새로이 등장시켜 이번에는 훈구세력의 경제 기반을 탈취하고자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켰으며, 이때 사림계열의 희생도 함께 있었다.

​이처럼 두 차례의 사화가 거듭되는 동안 연산군의 학정은 더욱 심해졌다. 즉, 자신의 실정에 대한 직간을 멀리하고, 경연(經筵)과 대제학제도를 폐지했으며,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연락(宴樂)의 장소로 만들었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聯芳院)을 원각사(圓覺寺)에 두어 여기(女妓)들의 모임 장소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전국에 채청·채홍사(採靑採紅使)를 보내 미녀를 선발했는데 이를 ‘운평(運平)’이라 하고, 그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興淸)’이라 하여 300명을 궁중에 기거하게 했다. 여기서 요즈음 유행가로 유명한 ‘장녹수’ 노래가 연산군 시대 유명한 기녀인 장녹수와 연산군을 묘사한 노래이다. 장녹수를 숙종 시대 장희빈과 혼돈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사냥을 위해 도성 밖 30리의 민가를 철거해 민원을 샀으며, 이러한 학정을 비방하는 한글투서 등이 있자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불태우는 등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 더욱이 사치와 연락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내연(內宴)에 나온 사대부의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황음(荒淫)이 자행되는 가운데 정치는 거의 방기되어 내시 김자원(金子猿)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성종 능(陵)에서 바라본 정자각과 비각 모습
성종 능(陵)에서 바라본 정자각과 비각 모습

​이러한 연산군의 학정은 궁금세력과 결탁해 이루어졌으므로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사림계열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거사 계획은 훈구세력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1506년 왕의 기휘(忌諱)로 파직되어 한거 중이던 전 이조참판 성희안과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이 연산군의 폐출을 밀약하는 한편,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의 호응을 얻었다. 또 연산군의 사랑을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申允武),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전수원부사 장정(張珽) 등의 호응을 얻어 그해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石壁)으로 유람하는 기회를 노려 거사하려 했다. 그러나 행차가 중지되는 바람에 거사가 중지될 형세였다. 이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柳濱)·이과(李顆) 등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전해지게 됐고 그 세를 막을 수 없어 예정대로 무사들을 훈련원에 모으게 됐다.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를 알리는 한편, 신수근·수영(守英) 형제와 임사홍 등을 불러내어 격살하는 데 성공했다. 정변이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繼妃)이며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윤대비(尹大妃)를 경복궁에서 만나 허락을 얻어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 교동에 안치하는 동시에, 이튿날인 9월 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가 곧 중종이며,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 한다. 조선실록에는 연산군이 폐위되어 강화도로 쫓겨난 지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로써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계열로 돌아갔다. 따라서, 중종 이전부터 문제가 돼 온 정치 체제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시정은 이후에도 기대하기 어려워, 이후 훈구·사림 두 계열간의 대립이 재현됐다. 이후 50년 동안 사화라는 유혈극이 잇달아 일어나 선조 이후 정치 세력들이 붕당으로 갈라져 당파 대립에 의한 국력 소모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국운이 쇠퇴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조선의 당파싸움의 붕당정치는 상대를 전멸시키는 죽음의 결사 조직으로 발전한다.

선정릉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능을 관리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제실이 있다. 제실 안 본채 전경, 전통적 이조 건축물 모습이다.
선정릉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능을 관리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제실이 있다. 제실 안 본채 전경, 전통적 이조 건축물 모습이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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