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⑲] 모이면 노래하고 응원가를 불렀다. 배재, 아카라카!
[홍미희의 음악여행 ⑲] 모이면 노래하고 응원가를 불렀다. 배재, 아카라카!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1.01.25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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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면 노래하고 응원가를 불렀던 아찔한 함성. 배재, 아카라카!

(서울=월드코리안신문) 홍미희 기자= 우리나라 근대적 의미의 서양음악 교육은 서양 문물을 최초로 가지고 들어온 선교사들과 함께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학교 중 하나인 배재중학교를 찾았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감리회 소속 H.G.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이듬해 고종황제로부터 교명 배재학당(培材學堂) 현판을 하사받았다.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다.

고덕동에 위치한 배재중학교를 찾았다. 현재 133년에 이르고 있는 배재중학교의 21대 교장인 서명석씨는 아버지도 배재를 졸업한 뿌리 깊은 배재인이다. 2층에 있는 교장실 옆의 벽에는 배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진 및 글씨가 붙어있다. ‘欲爲大者 當爲人役(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은 교훈으로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학창시절 음악교육이 어땠는지 물었다. 서명석씨는 대답 대신 배재의 모든 역사가 담긴 책이라며 배재학당사, 배재학당 등의 책을 꺼내왔다. 책에 의하면 초기에는 1908년 사립학교령에 기초한 고등학당의 교사진과 교과목 중 음악은 주당 1시간이고 복음찬가를 지도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음악교사는 성경과 음악을 같이 가르쳤던 학당의 장인 벙커였다.(배재학당사 中·高史, 117쪽) 그러더니 “교가도 재미있잖아요. 아! 모르시는구나.” 어떻게 모를 수 있지? 하는 눈빛이다. 그때 옆에 있던 분이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애합시다. 그건가요”라고 묻자 금방 “네 바로 그거죠.” 배재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노래가 있다. 교가다.

배재교가는 아펜젤러 교장의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로 1920년대 만들어졌다.(176쪽) “교가가 교가 같지 않죠. 그때는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를 연애합시다. 다시합시다 등으로 바꿔서 불렀죠. 교가가 한 번만 배우면 금방 알죠. 잊어버릴 수 없죠.” 서명석씨는 말을 이어간다. 신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단어들을 떠오른다. 소년, 열정, 수줍음, 당당함... 서로 반대되는 단어들이 혼재돼 소용돌이치던 시절. 그리고 소년들이 청년이 돼가며 만들어 내던 혈기와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제가 중학교 1학년 입학했을 때 중1, 고1은 한 달 동안 오후수업을 안 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는 그래도 됐던 것 같습니다. 점심 먹고 5, 6교시 2시간을 응원연습과 합창을 연습했어요. 스탠드에 중1, 고1을 모조리 앉혀놓고 교가, 응원가, 찬송가를 시키니까 배재학생들은 어디 모이면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응원했지요. 또, 월요조회 때마다 노래를 불렀습니다. 교가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찬송가, 예멘, 전송가등을 중1부터 고3까지 교장 선생님 훈시 후에 파트별로 시켰습니다. 중1 멜로디, 중2, 고1 테너 등 나눠서 매주 연습했지요. 배재졸업생들은 응원과 노래부르기 만큼은 잊지 못합니다.” 음악교육에서 교가를 떠올리는 당연함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런 경험이 자연스럽게 쌓여서일까? 배재인들은 노래부르기가 일상이다. 지금도 동문 중심의 배재코랄 합창단, 배재아펜젤러 합창단 2개가 있고 매년 정기발표회를 하고 있다.

그는 옛날 자신이나 선배들이 다녔던 때와 현재의 학교는 너무 많이 달라졌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1946년부터 이어져 온 배양전의 경우 그때는 모든 학생들이 1주일 정도 응원가, 배재찬가 등을 연습합니다. 하지만 수업시수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죠. 그리고 전체가 같이 모일 수 있는 조회라는 시간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졸업식, 입학식도 강당에서 하고 개학식이나 방학식 정도는 방송으로만 하니까요. 배재의 전통이던 합창대회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모든 교육이 같아지면서 오히려 사학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이나 매력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한참 말을 이어가던 서명석씨는 배재의 산역사와 같은 인물이라며 박물관에 계신 한총씨를 소개했다. 정동의 박물관으로 찾아가 동창회 사무국장인 한총씨를 만났다. 그 역시 교가와 응원가 이야기를 꺼냈다. “학창시절의 응원가는 잊을 수 없지요. 지금은 응원가가 이것저것이 있는데 그때는 응원가가 교가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모든 행사 때면 부동자세로 교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부로 불렀지요.” 배재 졸업생들의 추억은 동일하다.

정동 역사박물관의 피아노 얘기를 꺼냈다. 이 피아노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1933년 완공된 50주년 기념대강당에서 배재음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사의 한 축을 담당했다.(배재학당사 192쪽) 물론 유관순 기념관도 세종문화회관도 없을 때였다. “당시 우리가 수업받을 때는 그 피아노를 사용했어요. 백건우씨가 저보다 6년 후배입니다. 한동일씨는 1년 후배구요. 그래서 백건우씨가 작곡한 곡도 우리에게 많이 기증해서 현재 수장고에 있어요. 한동일씨는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갔고 자랑스러운 배재인에도 선정되기도 했지요. 언젠가 백건우씨가 한국에 왔을 때 이 피아노로 연주하고 싶다고 했는데, 피아노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때는 치지를 못했습니다. 재작년에 이 피아노를 고쳤는데 그 이후로 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6.25때 피난통에는 이흥렬씨가 음악교사였습니다.”
 

우리 때라면서 아펜젤러와 1800년대, 6.25 당시의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내 집안의 얘기처럼 눈을 반짝거리면서 말하고 있는 노년의 한총씨는 아직도 꿈꾸는 소년이다. 또, 배재의 음악교육에서 기억돼야 할 인물 중 하나는 한국인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 김인식이다. 그는 학생시절 서양 선교사로부터 음악을 배워 작곡과 오르간, 금관악기 등을 배웠고 배재학당에서 음악교사를 했다. 1907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 중학부의 음악교사가 됐고, 조선정악전습소에서 본격적인 후진을 양성하여 홍난파, 이상준등과 같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 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합창을 지도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을 결성했다.

공자는 ‘性相近也 習相遠也’라고 말했다. 사람의 기본자질은 서로 비슷하지만 배움과 습관으로 달라진다는 뜻이다. 이는 사람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의미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왕조 시대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시작된 배재, 새로운 것을 꿈꾸며 받아들였던 열린 마음은 오늘날에도 배재인들을 늘 꿈꾸는 사람으로 남아있게 하는 원동력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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