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0] 김정일과 성혜림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0] 김정일과 성혜림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2.0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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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함북 명천의 달밤

지난 1961년도다. 채 노인은 북한 땅에 들어오자 곧 김일성 중국통역(비서)일을 맡았다. 그때 추천자는 “당신은 아주 행운이 있는 사람”이라며, “절대 남에게 얘기를 전하지 않는다는 철칙만 지키면 된다”고 일렀다. 나이 20대 후반으로 북경대학을 떠나 북한 땅에 비로소 뿌리를 내리게 된 시점이다. 그 후 평양에만 60여년 살다 김일성 사후 밉보여 지방(함경도) ‘통제구역’으로 추방된 것이다.

채 노인의 지난 김일성후계자 얘기다. 후계자 편싸움이 한창일 때 대부분 측근은 김정일보다 김평일(김성애 아들)을 원했다 한다. 김정일은 키도 작고 여자에게만 관심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국가 원로 격인 최현과 최용건 두 최 씨가 갈라져 서로 다른 후계자를 추대했다. 둘 다 일제강점기 김일성과 함께 투쟁한 항일 유격대원들이다. 이들은 사망 후에는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힌다. 혁명열사릉은 애국열사릉보다 한 등급 높은 국가 열사 묘소다. 혁명 열사는 장례행진을 하고 길 연도에 주민들을 동원해 고인을 추모한다.

“당시 최현(조선인민군 총사령관/현재 최룡해 부친)은 김정일을 지지했고, 최용건(북 인민위원회 상임위 위원장)은 김평일을 적극 밀었지요. 최현은 일자무식(문맹)으로 전혀 글을 모르고 완전 독고다이에요. 최용건은 ‘국가지도자는 키도 커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최용건 아들과 무척 친했기 때문에 사실 김평일이 정권을 잡았으면 했어요.”

그러나 결국 김일성은 김정일을 택했고, 최용건은 큰 실망을 했다. 차츰 김일성부자와의 사이에도 틈이 생겼다. 최용건 부인은 중국인 왕 씨다. 최용건이 죽었을 때 김일성부자와 사이가 꽤 벌어져 있었다. 김 부자는 연도에 늘어선 주민들에게 슬프다는 눈물도 못 흘리게 지시했다 한다. 왕 씨 부인은 중국으로 돌아갔다.

채 노인은 김일성 주석 등 당시 고위인사들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김일성부자 관련 얘기를 많이 했다. 그의 얘기를 간추린다.

김일성은 60년대부터 늘 “총대 끝에 핵을”하고 외치며 ‘핵과 경제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당시 핵실험 장소로 정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지하에도 함께 다녀왔다. 처음엔 비날론(합성섬유)을 발명한 월북 인사 이승기 박사를 중심으로 핵 연구팀을 꾸렸다. 특히 20세 미만 인재들만 멤버로 뽑았다. 북에는 핵 관련해선 몇몇 측근만 알고 있었다. 김정일은 비록 1974년부터 뒤에서 국가권력은 맡았지만, 핵 관련 내용은 잘 몰랐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건 내 아들도 몰라”하며 비밀에 부쳤다. 1994년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 김정일에게 제대로 인계 못 한 부문이 핵 관련 사항이라 한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핵 관련 원자재가 필요하다는 제의서와 보고서가 들어오기 때문에 김정일은 차츰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존의 북한시스템 때문이다. 핵 문제는 어찌 보면 손자인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새삼 할아버지 김일성의 유훈정치를 따라 ‘핵과 경제’를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채 노인 얘기다. 김정일은 여자와 영화밖에 몰랐다. 일찍이 일본 (조)총련에서 선물한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누볐다. 초창기 북한에 오토바이가 거의 없을 때였다. 눈에 드는 여자는 누구든 추적하곤 했다. 이 때문에 부친 김일성은 “너는 왜 여자들만 따라다니느냐”고 꾸중했을 정도다. 김정일은 영화, 연극 등 예술 부문에 심취해 ‘5대 가극’을 만들었다. *피바다 *꽃 파는 소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 *금강산의 노래 *밀림아 이야기하라 등이 그것이다. 김일성도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후계자 구도에서 김평일에서 김정일로 마음을 굳힌 것이 아마 김정일 재질을 나름 다시 평가한 영향도 있을 것이다.

모스크바 성혜림 묘

그즈음 김정일은 영화배우 성혜림(37년생)에게 빠져있었다. 성혜림은 이미 딸 하나를 둔 유부녀였으나 김일성 몰래 관저에 데려다 살았다. 당시 김영순(탈북무용가)은 37년생으로 성혜림과 같은 나이였다. 평양예술학교 동기생이다. 그녀는 “성혜림이 내 가까운 동무”라는 발설로 인해 요덕 정치범수용소에 가족들과 함께 끌려가 9년간 고생하다가 홀로 살아남아 서울로 온 탈북여성이다.

김 씨는 내게 “성혜림은 원래 월북작가 이기영(조선작가동맹위원장/평양애국열사릉 묘소)의 장남 이평(김일성대학 연구사) 부인인데, 김정일이 5호 댁(김일성가계)으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당시 성혜림은 김정일보다 4살 연상이었다. 김정일은 성혜림을 강제이혼 시킨 뒤 그의 관저에서 살게 한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때 장남 김정남을 낳은 것이다. 한때 먼저 시부모였던 이기영 작가는 그때 충격으로 소설작업을 중단했다는 설도 있다.

잠깐 성혜림에 대해 부연한다. 성혜림 가족고향은 원래 경남 창녕군이다. 대대로 대지주 만석꾼 집안이다. 명문가 3대 독자인 부친 성유경과 모친 김원주(일제강점기 ‘개벽’ 잡지 여기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혜림은 서울 종로 계동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성혜림이 서울사대부속초등교를 나와 풍문여중 다니던 1950년 집안 전체가 월북했다. 현재 성기학 노스페이스(North Face/영원무역) 기업회장이 성혜림과 같은 가까운 집안이다. 역시 창녕이 본향인 성 회장은 서울사대부고 동기생이다. 재수 후 서울대 상대를 나와 노스페이스 아웃도어 의류 등 사업을 크게 일구었다.

평양 하나음악정보센터

성혜림 부모는 해방 후 좌파활동에 적극 나서 남쪽의 대지주 갑부환경을 내팽개치고, 자진 월북해 결국은 몰락한 신세가 됐으니 안타깝다. 성혜림 오빠인 성일기(33년생/4대독자)씨만 6.25전쟁시절 남한에서 전향 후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88세의 성씨는 오늘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주지하는 대로 성혜림 조카 이한영(본명 이일남)은 80년대 진작 망명 후 서울 근교 한 아파트 앞에서 북한공작원에 피살당했다. 성혜림 장남 김정남은 모스크바를 거쳐 스위스 유학도 했으나, 김정은에게 밀려난 후 지난 2017년 말레이시아공항에서 독극물로 암살당하지 않았던가.

성혜림은 6년간 김정일과 동거한 후, 반강제로 모스크바로 쫓겨나 오랜 세월 모스크바에 머물다가 지난 2002년 65세로 사망했다. 현재 모스크바 남서쪽 국립공동묘지 러시아 유명인사들 묘소 내에 묻혀있다. 언니 성혜랑(36년생)은 성혜림과 모스크바에 함께 거주하다 96년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현재는 프랑스에 딸과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추방된 채 노인 얘기로 돌아간다. 그가 7명 식구와 함남 ‘천을’ 지역으로 추방된 후 집과 식량이 주어지지 않아 무척 고생이 많았다. 모든 문제는 자체 해결해야 했다. 죄인으로 추방이니 어찌할 수 없었다. 채 노인이 평양감옥에서 6개월간 심문을 당할 때였다. “동무는 누구와 손잡았느냐, 어느 조직에 속하느냐”는 심문이 늘 같은 조사내용이었다. 하지만 별 특별사항 없이 결국 풀어줬다고 한다. “그때 나는 풀려나 집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밤인데 평양역전으로 가더라고요. 역에는 이미 처와 아들 2명 등 식구 6명이 전부 짐을 싸들고 모여 있었어요. 새벽 2시에 짐도 함께 함경도 산골로 추방된 겁니다,”

목적지 천을 땅에 닿자 일단 숙식이 문제였다. 옥수수 짚으로 대충 꾸미고 매일 산나물 등을 겨우 캐내 굶주림을 이겨냈다. 그나마 정치범으로 몰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천을 지역에서 80리 거리 앞에 요덕정치범수용소가 있었다. 북한에서 최고로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다. 차츰 통제구역 동네사람들과 지역사정에 익숙해져 갔다. 마을 내 주민들은 대부분 경제범에 속했다. 평양백화점 등지에서 도둑질하거나, 트롤리버스 동선 등을 훔쳐 팔다 걸린 사람 등등이다. 가정풍속사범도 있었다.

3개월 후에 엉성하지만 천막을 치고 집 모습을 갖추면서 채 노인이 먼저 김일성 주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방 한가운데 걸어놓았다. 채 노인이 김일성 바로 오른쪽 옆에 앉은 큰 사이즈 사진이다. 이 사진은 이 산골마을에서 큰 위력을 나타냈다. 마을 감독자인 비서(대표)나 행정일꾼이 평양에서 내려온 채 노인을 달리 보게 된 것이다. 북한은 고위급 인사들이 일시 징계 등으로 시골로 보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언젠가는 채 노인의 평양귀환을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내가 정치범이 아니니 조만간 평양으로 돌아간다고 믿은 것 같아요. 마을 행정책임자는 오히려 내게 잘 보이려고 여러모로 도움을 줬어요. 새끼돼지도 갖다주고, 개도 한 마리씩 3마리나 가져다줬습니다.” 그러면서 약 4년을 머물렀다. 처음 내려왔을 땐 굶주림에 못 이겨 산나물도 뜯고, 길가 소똥에 섞인 강냉이 알맹이를 발견해 그것도 먹은 적이 있었다 한다. 그런 절박했던 사정이 크게 변화된 것이다. 한번 채 노인이 평양을 다녀오겠다 하니, 통행증도 쉽게 끊어주는 등 크고 작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오히려 시골에서보다 많았다. “실지로 시골 통제구역보다 평양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많았어요. 평양 체류 시일이 전체 80% 정도 될 겁니다. 출가한 딸네도 있었고, 무엇보다 친구들이 많았어요. 일일이 명단을 적어보니 한 1백 명쯤 되더군요.”

북한 금화발행 2020년

채 노인이 반세기 이상 평양에 살면서 언론 일등 여러 직종을 가졌을 때, 남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한다. 이 때문에 평양에 가면 옛 신세 졌던 친구들이 도와줘 ‘동가숙 서가식’ 하며 지냈다 한다. 우선 채 노인이 정치범이 아니니, 묻지도 않고 별 부담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통제지역 천울에서는 그가 하도 자주 평양에 가서 오랜 시일 머무니 제때 통행증을 안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그럴 때 옥신각신해서 받아 내거나, 통행증 없이 다닐 때도 있었어요. 북에선 통행증 없이 다니는 시골 주민들이 많습니다. 까다롭고, 승인시간이 걸리니까요. 중간에 걸리면 사정을 얘기하고 적당히 뒷돈을 주든지 해서 넘기지요. 특히 시골 경우는 그래요.”

함경도에서 평양까지는 시간이 무척 걸렸다. 쉽게 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10시간 단선기차를 타고, 다시 평양을 향해 걸어야 한다. 그는 평양에만 오래 살아 평양 주변과 길 사정을 환히 꿰뚫고 있었다. 평양 어느 곳에 검문소 보초가 있는 것도 알고 있어 그 도로를 피해 다녔다.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일단 평양에 입성하면 딸집이나 친구들도 있으니 몇 주씩 묵다가 다시 추방된 시골로 되돌아가곤 했다.

평양국제공항건축 우표

채 노인은 ‘탈북자’란 말 자체를 추방 후 현지에서 생전 처음 들었다 한다. 평양에 산다고 해서 북한시골 사정을 다 아는 게 아니다. 지방인 시골에서 평양 환경을 모르는 것처럼. 평양에서도 평양 시내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를 때가 있는데, 지방 사정을 어떻게 잘 알겠는가. 더구나 완전 경직된 사회 환경 아닌가. 같은 직장이라도 타부서 일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미 한번 언급한 얘기다.

한때 김정은 행방이 원산 이후 묘연했을 때 북한 고위외교관을 지냈다는 한두 명은 한국 언론에 ‘김정은이 99% 사망했다’고 큰소리쳤던 일을 기억한다. 오히려 한국 어느 고위관리가 ‘살아 있다’고 주장했다. 결과가 어떠했는가. 또 성혜림 조카 이한영이 서울 근교에서 피살됐을 때 범인(북 공작원)은 살인 임무 달성 후 육로로 북에 돌아가 영웅훈장인가 받았다고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을 한 평양출신 탈북기자는 “아마 러시아 마피아가 행한 범죄일지 모른다”고 밝혀 실소를 금치 못한 일이 있다.

채 노인은 “평양 거주 때는 주위에서 누구든 탈북자라는 말 자체를 못 들어 봤어요. 시골로 추방 뒤에야 현지에서 비로소 탈북자란 존재를 듣고, 알게 됐지요. 그때부터 탈북이란 일을 서서히 고심해 봤어요”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태어나 공부한 그에겐 남들과 달리 중국 연고가 많아 탈북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평양 주민에게 탈북자 얘기를 하면 남의 나라 일처럼 듣는다. 그들에게 탈북자라는 개념은, 국가에서 무슨 잘못이든 저지른 100% 범죄자로 알고 있다. 아예 탈북자란 명칭이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 말이 탈북이지, 자신이 평생 살던 고향 땅을 등지고 막연히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자체가 얼마나 불안하고 위험한 발상인가.

평양 을밀대 봄

채 노인은 “그간 치밀한 탈북계획을 세우고 1999년 어느 새벽에 가족들과 국경을 건넜어요. 미리 국경대원들에게 뇌물을 줬는데도 또 힘들게 해서 겨우 통과했지요. 중국에 가면 나는 문제없어요. 중국 친구들이 많으니 그들이 도와줘 내 부부만 중국 땅에 남았고, 두 아들 식구들은 모두 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9년간 중국에 머물렀다. 혹시 한국에 입국하면 고문이나 다른 위협을 가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이 “한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라는 확신을 주어 비로소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부인사망과 곧 재혼과 함께 토론토행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중간 그의 많은 얘기가 생략됐다.

탈북자들이 한국이나 북미주에서 대개는 먼저 부딪치는 장소가 교회다. 채 노인도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서 매달 20만원씩 받았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교회를 다니며 내게 이구동성으로 깜짝 놀랐다고 하는 얘기가 있다. 다름 아니다. 성경책 구절이 북한 구조와 너무 흡사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삼위일체가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킨다. 북한에서 말하는 수령, 당, 후계자 3인과 같다는 놀라움이다. 또 기독교 10계명이 노동당 10대 원칙과 같이 확고하게 공포된 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한 탈북 정치인의 말처럼 북한의 10대원칙이 성경 10계명에서 유래됐다는 단정적인 주장에는 동의하지 못한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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