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칼럼] 잘생긴 ‘북한군’과 못생긴 ‘조선족’
[대림칼럼] 잘생긴 ‘북한군’과 못생긴 ‘조선족’
  • 전은주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 승인 2021.02.15 09: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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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영화 '용의자', '공조', '강철비'에 나오는 공유, 현빈, 정우성.아래는 영화 '범죄 도시', '황해'에 나오는 조선족동포.
위 사진은 영화 '용의자', '공조', '강철비'에 나오는 공유, 현빈, 정우성.아래는 영화 '범죄 도시', '황해'에 나오는 조선족동포.

시각적 이미지의 시대?

‘신앙심’의 단계를 말할 적에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믿는 것을 높게 친다. 우리는 흔히 6감 중에 시각을 가장 중요시한다. 물론 이 시각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해 다른 감각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 많은 것을 감별해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어떤 경우에도 눈으로 확인해야 신뢰를 주고, 그 대상이 지닌 진실을 바르게 판단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눈으로 본다고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마술의 본질이 눈속임에 있지 아니한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이나 ‘잘생김’의 미적 기준은 주로 시각에 의한 것이다. 서울의 이름난 대형 종교 시설에 가보면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신비롭게 장식돼 있다. 그런 시각적 장식이 신자들의 신앙심을 북돋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밖에도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이 다 시각적 다양성에 바탕을 둔다.

미적 기준에는 반드시 ‘힘의 논리’ 또는 ‘권력의 논리’가 전제된다. 곧, 정치나 재물이나 노동 같은 것이 그 이면에서 작용한다. 우리가 ‘아름답다’ 또는 ‘잘생겼다’고 하는 것의 배후에는 반드시 이 기준이 내재돼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애초에 설정된 조건을 잊어버리고, 그 조건에서 만들어진 ‘결과’를 통해 미의 기준을 설정해 그 대상을 ‘아름답고 잘생긴 것’으로 통용하게 만든다. 우리가 ‘아름답다’거나 ‘잘생겼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어느 틈에 슬그머니 그 조건을 사라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전족(纏足)’의 경우를 가지고 따진 시대도 있었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대명사로 말하는 양귀비 같은 미인도 당연히 전족이었다. 어릴 때부터 발을 비단 같은 천으로 꽁꽁 동여매고 가능하면 발을 작게 성장하게 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 전족은 남성의 성적 소유욕이 작용한 결과이다. 아프리카 호텐도트족들이 갖는 미녀의 조건은 유방의 길이라고 한다. 미인은 그 길이가 1미터쯤은 돼야 하는데, 아이를 업고 가다가도 등에 업은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이 경우는 노동력이 그 종족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조건으로 변한 결과이다.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난파해서 한양으로 압송되는 서양인들을 보고 사람들이 ‘도깨비’라고 했던 기록도 있다.

양귀비가 살던 그 시대나 어떤 종족의 ‘아름다움’ 또는 ‘잘생김’은 우리의 현대적 관점으로는 ‘더러움’ 또는 ‘못생김’으로 파악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나 잘생김 같은 미의 기준은 힘의 조건 또는 권력의 조건이라는 점을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아름다움이나 잘생김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서양의 미적 기준을 따르고 있다. 현재적 상황으로 보면 그들이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뛰어나고 문화적으로도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나 잘생김의 조건은, 서양 사람처럼 쌍꺼풀이 지고, 콧날이 오뚝 서고, 입술이 얇고, 피부가 희어야 한다.

TV에 그런 기준의 ‘아름답고 잘생긴’ 배우나 가수들이 나온다. 그들은 성형수술을 통해 아주 비슷한 몇 가지 유형으로 만들어진다. 아이돌이나 걸그룹의 연습생을 모집할 적에도 미리 얼굴 어딘가를 어떻게 고친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다고 한다.

물론 그들만이 아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미적 기준에 맞게 변모시키려고 애쓴다. 그 결과 새로운 ‘현대판 도깨비’들이 탄생하기도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 기준을 객관화시켜 그에 들어맞는 것을 아름답고 잘생긴 것이라고 정한다. 더더구나 그것을 ‘선(善)’하고 ‘정당(正當)’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흉측하게 생긴 꼽추 콰지모도는 악의 상징이고, 아름답게 묘사되는 집시 에스메랄다는 선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선입견은 그 시대 대중들이 지니고 있는 그릇된 판단일 뿐이다. 이 소설은 악과 선은 그 모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부패와 대중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는 것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세태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그 본질의 실상을 보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현실적 미적 기준마저도 그 내면의 다수 대중과 지배계층이 조작한 힘의 논리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판단이 기준처럼 신봉하는 그 이전의 조건을 잊지 않는 것이, 힘의 논리에 따른 어떤 계략에도 현혹되지 않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아름답거나 잘생기면 다 용서된다?”

드라마에 낯선 이와 어깨를 부딪쳐도 상대가 잘생기면 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겸손을 떠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생김’에 약하다. 귀엽게 생긴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면 호들갑을 떨지만 두꺼비나 뱀을 보고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지는 않는다. 물론 동화책에 등장하는 악마나 질이 나쁜 주술사는 뱀이나 지네를 잘생긴 존재로 보기도 한다.

물건을 고를 때도 예쁘게 포장된 것을 고른다. 못생긴 것은 잘생긴 것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구매 의욕을 떨어뜨린다고 믿는다. 그래서 미디어는 끊임없이 잘생김을 소환하고, 이젠 개그맨조차 잘생기지 않으면 무대에 설 수가 없게 되었다.

못생김을 개그로 승화시키던 심형래나 이주일 시대가 끝났을까? 이주일이 처음으로 방송에 출연한 이후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왜 저렇게 생판 못생긴 놈을 투입시켰냐?” “밥맛 떨어져서 토할 뻔했다!”

이런 악담을 수없이 받았지만 이주일은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오히려 자신의 못생김을 인기의 요소로 삼는 반전을 이룬다. 자신의 용모를 스스로 희화화해 외모지상주의를 극복한 몇 안 되는 ‘숨은 실력자’에 속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이 못생긴 경우,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예쁘고 잘생긴 건 매체나 시청자들 모두가 상식인 양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여주인공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는 언제나 잘생긴 남성이 된다. 오글거리는 대사도 잘생긴 남자가 하면 시청자들이 환호를 지르지만 못생긴 주인공이 하면 역겹다고 한다. 잘생긴 남자가 실수하면 안타깝지만 못생긴 남자가 실수하면 쳐 죽일 놈이 된다. 결국 못생긴 배우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잘생긴 배우를 이기지 못하고, 잘생긴 놈은 뭘 해도 용서받는다.

예전에는 영화배우나 가수는 성형수술을 한 것을 숨겼는데, 이제는 대놓고 자신의 얼굴이나 몸에 ‘칼 좀 댔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웃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고사상에 놓는 돼지머리를 보면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있다. 그리고 눈은 옆으로 찢고, 콧구멍은 서양여자들처럼 삐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부분만 보면 참으로 엽기적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외면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면의 아름다움은 잘 드러나지도 않고, 그 내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드물다. 왜 그럴까?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사람들은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것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실천해 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닐까?

잘생긴 ‘북한군’과 못생긴 ‘조선족’

한국 미디어나 영화에 등장하는 ‘북한군’과 ‘조선족’의 이미지는 ‘잘생김’과 ‘못생김’으로 양분화된다. 북한군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은 강동원(<의형제>, 2010), 김수현, (<은밀하게 위대하게>, 2013), 공유(<용의자>, 2013), 현빈(<공조, 2017), 정우성(<강철비>, 2017) 등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미남 배우들이다. 대체로 그들은 잘생기고, 아름다운 몸매를 지니고 있다. 더구나 그들은 특출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숨은 사연이 있는 멋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와는 달리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의 이미지는 대체로 ‘못생겼다’. 어둡고 칙칙하고 험상궂은 인물로 등장한다. <황해>(2010)에서 김윤식은 검정 선글라스에 텁수룩한 수염을 지니고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짐승 뼈다귀를 들고 사람을 도륙하는 범죄자로 등장한다. <신세계>(2013)에서는 ‘연변거지’란 모욕적인 이름을 단 ‘못생긴’ 아저씨들이 나온다. 이들은 수염이 시커멓고 머리칼이 어수선하고 잔인하며 더럽다. 그런데 <범죄도시>(2017)에 조직폭력배로 등장하는 윤계상은 본디 잘생겼지만, 잔혹하고 소름끼치는 ‘못생긴’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의 오른팔이자 흑룡파 조직원 중 하나인 진선규는 빡빡이로 등장한다. <도굴>(2021)에서 조폭 두목으로 등장하는 이성욱도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은 가능한 ‘잘생김’을 숨기고 험상궂고 소름 끼치는 ‘못생김’으로 등장한다.

잘생긴 북한군들은 의리남, 순정남, 매력남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다가 결국 평화, 화해, 치유, 소통, 통일 등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이와는 달리, 못생긴 조선족들은 범죄자, 조직폭력배, 장기매매 등의 서사를 이어가다가 결국 정의에 의해 소탕당하는, 지리멸렬하게 깨지는 운명을 맞이하는, 거지발싸개 같은 역할을 떠맡는다.

잘생김은 용서받고, 못생김은 원수가 된다. 잘생김은 끌어안고 포용 받아야 할 존재가 되지만 못생김은 차별받고 제외되는 이방인이 된다. 이분법적으로 대접받는 조선족은 분명 억울하다. 그래서 영화 <청년경찰>이 상영되었을 때 재한조선족 단체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은 그동안 한국 미디어에서 동포를 폄훼하고 악인으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잦아 조선족 이미지 왜곡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영화가 조선족에 대한 ‘혐오표현’을 통해 그들의 이미지를 폄하시켰다고 인정해줬다. 다시 말하면 미디어가 조선족을 모두 못생겼다고 비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조선족은 분명 못생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이분법이 지니는 비밀

모든 북한군이 잘생겼고 모든 조선족이 못생긴 것으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미디어는 그 둘을 극단적으로 이분화시켰다. 왜 북한군은 과장된 ‘잘생김’으로 등장하고 조선족은 과장된 ‘못생김’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두 가지가 가능하다. 첫째로 ‘현실성’이고, 둘째로 ‘필요성’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성’을 설명하려면 간단하지 않다. 실제로 조선족들이 대림동 같은 지역에서 칼부림과 같은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실성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우기려면 먼저 조선족이 겪은 기구한 이주의 역사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총으로 쏘아 죽인 것을 살인의 측면에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 현실적 현상이고 어떤 것이 그 이면의 실제 내용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에 대한 일제의 침략과 민족의 참살과 피눈물 나는 수탈 등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현상적 결과만 잘라내기보다는 그 이면에 깔려있는 다양한 역사적 조건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권력의 조건이나 힘의 조건을 숨기고 그것이 빚어낸 결과를 가지고 미적 논리로 삼는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이 이분법에 숨어 있는 대답은 ‘필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북한군을 잘생긴 존재로 만들고, 그것에 대비시키기 위해서 조선족을 못생긴 존재로 내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허구이고 오류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름답고 잘생기면 다 용서된다”는 허황된 논리를 따질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용서하기 위해서는 아름답고 잘생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논리의 이면에는 “조선족은 못생겼으니까 포용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의미가 강하게 담긴다.

한국영화에는 한국인의 삶과 서사, 그리고 기억들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영화는 한국인들이 지닌 트라우마나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거나 드러낸다. 북한군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에게 ‘분단 트라우마’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분단 트라우마는 한반도가 분단된 형태로 남아있는 한, 그들이 끊임없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이 숙제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는 통일을 어떻게 상상하고 포용해야 할 것인가? 통일은 가능할까?

그래서 그들은 대답해야 할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낀다. 이 분단 트라우마의 극복이라는 이념적 필요성에는 반드시 감성적 증오와 분노가 뒤따른다. 다시 말하면 북한에 대한 증오나 원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 대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감정이나 생각을 해소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그 감정을 임시방편으로 떠넘기는 방법이다.

첫째 방법이 바른 방향이다. 영화 <간 큰 가족>이나 <코리아>의 경우 사람의 통일로 분단의 장벽을 넘으려고 한다. 또한 <의형제>, <공조>, <공동경비구역 JSA> 등 영화는 제목만 봐도 공존과 소통 또는 화합을 통해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메시지를 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잘생김’을 이용한다. 이왕이면 잘생긴 놈과 공조하고 싶고, 잘생긴 놈과 의형제를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외모지상주의’ 욕망을 최대한 자극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 장벽 너머의 그 사람들이 잘생겼으면 좋겠고, 그래서 용서가 이루어진다고 바란다면 참으로 뜻깊을 수 있다.

문제는 둘째 방법이다

이 방법은 증오와 원망을 다른 존재한테 떠맡긴다. 그리고 그것을 떠맡을 존재를 조선족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릇되고 어리석은 관점일 뿐이다. 왜 그러한가? 증오나 원한은 그 자체로 풀어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넘긴다면 반드시 되살아나고, 오히려 증폭돼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잘생긴 북한군으로 풀어낸 증오나 원한을 못생긴 조선족한테 떠넘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단 트라우마는 한국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북한과 연변 조선족 모두에게 지워진, 우리 민족 전체에게 지워진 문제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을 한국인의 통일 프레임에 포함시키지 않은 짧은 소견이 문제가 된다. 한국영화 또는 여론을 이끄는 주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조선족은 ‘통일한반도’를 지향하는 물리적 영역권 밖의 존재라고 보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한민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정신적으로 ‘통일한반도’ 영역권에 귀속된다.

북한군과 조선족은, 한국인과 조선족은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존재가 아니다. 이미 분단 트라우마 이전에 이산과 식민 트라우마를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민족공동체이고 운명공동체이다.

식민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영화는 등장하는 족족 사랑을 받는다. <암살>, <밀정>, <동주>, <박열>, <봉오동전투> 같은 영화는 어느 정도 식민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 영화들의 배경 너머에 독립운동을 하며, 함께 피를 흘렸던 조선족의 이야기는 배제돼 있다. 그 서사에서 배제된 조선족은 분명히 한민족의 프레임 안에 소속된 아름답고 잘생긴 존재들이다. 한국영화나 그러한 역사의식을 지닌 주체들은 그것까지 관객들에게까지 전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군과 조선족은 증오나 원망 또는 과오를 서로에게 떠넘기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잘생김과 못생김으로 단순하게 나뉘는 이 이분법은, 겉으로 드러난 두 존재를 이간질시킬 뿐이다. 어쩌면 역사 공동체이고 민족공동체인 우리 자신을 서로 이간질시키려는 이 이분법의 비밀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 아직도 깊게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소개]
1986년 도문 량수 출생, 연변대학교 문학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시간 강사,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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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조선족 2022-07-16 19:13:07
ㅋㅋ 뭐 이딴 기사를 써 ㅋㅋ 조선족은 한국의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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