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태릉·강릉 탐방기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태릉·강릉 탐방기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2.1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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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泰陵·제11대 중종(中宗)비 문정왕후(文定王后) 능)

태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1501~1565)의 능이다. 문정왕후는 1517년(중종 12년) 왕비가 됐다. 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했다. 또 불교에 관심을 두어 승려 보우(普雨)를 신임하고, 승려가 되는 시험인 승과(僧科)를 설치하는 등 불교를 진흥했다.

태릉은 왕비의 봉분 1기만을 조성한 단릉이다. 단릉이면서 이렇게 큰 규모의 능은 흔치 않다. 지금까지 보아 온(1화~5화) 왕릉 중에는 석물들이 다른 능에 비해 1.5~2배가량 커서 문정왕후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하다.

태릉이 이곳에 정해진 연유가 궁금했다.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은 1544년 중종이 죽자 고양구 서삼릉에 있는 인종을 낳은 후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능인 희릉 옆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왕릉과 왕비릉이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그러나 1562년 명종 17년 문정왕후가 풍수지리적으로 장마 때면 물이 차오른다는 핑계로 정릉의 중종 능만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普雨)와 논의한 후 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로에 있는 선릉 옆으로 천장하고 서삼릉 정릉은 다시 희릉으로 환원시켰다.

문정왕후는 천장한 정릉 옆에 자신도 묻히기를 원하고 지대가 낮은 이곳에 거액을 들여 보토를 했으나 매년 여름이면 강물이 능의 앞까지 들어오고 재실의 절반이 침수되는 상태에서 다시 능을 옮기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결국 현재의 태릉에 단릉으로 결정했다. 잘 모셔진 서삼릉 정릉에서 남편 능만 천장하여 선릉 옆에 모시면서 같이 나란히 묻힐 생각을 하고 역사를 일으켰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혼자만 동떨어져 나와 단릉으로 후세를 준비한 문정왕후는 난해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전해오는 사람들의 말로 태릉은 후사가 끊어진다는 무후지지(无后之地)의 흉지라고 했다고 한다. 묘를 쓰기 전부터 그런 풍문이 나돌아 명종이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이 귀신에 씌기라도 하듯 그곳을 길지라고 우겨서 능을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의 결과는 명종대에 이르러 한 명의 정비와 6명의 후궁 사이에 정비 인순왕후 사이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는다. 이후 어떤 왕자나 공주를 생산치 못한다. 하는 수 없이 명종의 아버지 중종과 창빈 안씨 후궁 사이에 낳은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성군을 양자로 들여 명종에 이은 14대 선조로 왕통을 잇게 한다.

문정왕후 이야기

어미를 잃은 인종은 갓난아기 때부터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게 된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 제2 계비인 문정왕후를 이야기하려면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경빈 박씨는 얼굴도 미인이고 복성군 아들도 낳고 중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후궁이었다. 장경왕후가 왕자를 낳은 후 바로 세상을 뜨자 새 중전이 간택된다는 소식에 경빈 박씨는 세자(인종)를 죽이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자기 아들(복성군)과 함께 유배돼 사약을 받고 죽는다.

세자였던 인종이 어미를 잃자 외삼촌인 윤임은 경빈 박씨 같은 표독스럽고 욕심 많은 후궁이나 그 자식들로부터 세자를 보호해 줄 사람을 찾는 중에 자신의 가문 출신에서 문정왕후 윤씨를 새 왕비로 간택한다. 문정왕후 윤씨는 글도 알고 똑똑했으나 내리 공주만 낳아 힘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세자(인종)의 보호자 역할을 열심히 했다. 1534년 왕비가 된 지 17년이 다 돼 아들 경원대군, 훗날 명종을 낳게 됐다. 이로부터 문정왕후 여인천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문정왕후는 아들을 낳은 후 마음이 달라져 자기가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릴 생각만 하게 된다. 자연히 점점 인종을 경계하며 미워하게 됐다. 1544년 57세의 중종이 죽자 인종이 바로 30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의문의 변사를 한다. 독살설이 유력한 가운데 자신의 아들인 명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생모인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그녀는 대왕대비로서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적극적으로 정국을 틀어쥐고 흔들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을사사화와 연이어 양재역 벽서 사건인 정미사화 등으로 반대파들을 숙청한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정적을 몰아내고 자신의 측근을 정치 전면에 진작부터 내세웠다. 그래서 등장한 이가 바로 그녀의 오빠 윤원로와 남동생인 윤원형을 중용하는 척신정치의 서막이었다.

그러나 을사사화 때 장경왕후의 오빠인 외척 윤임(인종이 죽기까지 권력을 장악한 대윤의 영수)을 제거하고 연이은 숙청 작업에서 오빠인 윤원로를 귀양 보내고 동생인 예조참의 윤원형의 손을 들어준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치게 간섭을 해 조정을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 놓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권력을 사유화해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이때부터 조선은 점점 기둥이 썩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조선시대에 여자가 이렇게 정치에 전면에 나선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조선시대에 유일무이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혹은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여자 문정왕후. 참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이다.

그녀는 1550년 49세 때 불교를 믿기 시작해 승과와 도첩제를 부활한다. 불교를 중흥해 승려 보우를 병조 판서에 임명한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도 승과 과거를 보는 곳이 되고 선릉로에 있는 선정릉의 능침사찰이 되도록 했다.

1565년 64세를 일기로 그녀가 죽자, 사람들은 불여우 같은 년, 독한 년, 더러운 년이 죽었다고 환호한다. 그녀의 동생인 소윤 윤원형은 실각하고 윤원형과 그의 애첩인 정난정은 자살한다.

2001년 초~2002년 중반까지 박종화 소설 ‘여인천하’를 SBS 150부작 대하사극 TV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가 됐다. 미천한 신분에서 정경부인으로 천하를 쥐고 흔든 실권자(윤원형)의 부인이 된 정난정과 정난정의 도움으로 천하를 호령하게 된 문정왕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여인천하’ 드라마가 생생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강릉(康陵·제13대 명종(明宗)과 정비 인순왕후(仁顺王后) 능)

강릉은 조선 제13대 명종(재세 1534~1567·재위 1545~1567)과 인순왕후 심씨(1532~1575)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로 정자각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명종의 능, 오른쪽에 인순왕후 능이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1545년(인종 1년) 이복형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세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8년 후 명종은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며 외척 세력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국정은 어지러웠다. 1567년(명종22년)에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모셔졌다.

인순왕후는 1542년(중종 37년)에 경원대군(명종)의 부인이 됐다가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됐다. 명종과 사이에 순회세자를 두었으나 순회세자가 일찍 죽는 비운을 겪는다. 명종이 세상을 떠난 후 조카 하성군(선조)을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올렸으며 8개월간 수렴청정을 했다.

1575년(선조 8년)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모셔졌다.

명종 시대 이야기

명종이 20세가 돼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친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의 죽음 이후 조울증과 화병을 앓아서인지 성격이 괴팍해져 있었다고 실록에 나온다.

명종은 문정왕후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중용한다. 그러나 이량 역시 자기 세력 불리기만 하다가 역탄핵을 당한다.

친정을 시작한 1553년 경복궁이 근정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됐는데 재정의 어려움 속에서도 불과 1년 만에 경복궁 완전 복원을 해내는 과단성도 보인다.

1555년 왜구들이 침범해 전남 영암,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약탈과 살인으로 자행했던 을묘왜변, 삼포왜란 등을 겪은 후 해군력을 크게 강화 판목선의 도입, 총통의 개량, 수군의 정비, 권관제의 도입 등 장차 일어날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을 뒷받침하게 하는 전력 강화를 꾀한 사실은 특기하다.

명종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임꺽정이다. 임꺽정은 사회가 혼탁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도적이 들끓던 명종 시대의 대표적인 도적 두목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의적으로 통하던 인물이다. 양주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다만 힘이 장사인 데다가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당시의 양반 중심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임꺽정이 출몰하기 시작하던 1559년은 척족 윤원형의 일파와 이량 일파가 발호하여 온 나라가 그들의 세도에 눌려 있었고, 반대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사회는 온통 부정과 부패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고, 민간은 학정과 수탈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해야 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째 흉년이 계속돼 거지가 늘어나고 도적 떼가 할거했으며, 남쪽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민가를 불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야말로 조선 사회는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명종은 윤원형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억불정책에 돌입하는 등 정치를 안정시키나, 1567년 명종도 34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신의 정치는 물론 후사를 구사하기에도 짧은 2년이었다.

명종에 대한 평가는 종묘 정전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지지 못한 왕에서 볼 수 있다. 이는 후대 신하들이나 임금에게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22년이라는 적잖은 기간에 왕위에 있었는데 심지어 추존왕인 문조(효명세자)나 망국의 군주인 순종에게도 밀리는 등 존재감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재의 사가들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이 명종의 실정을 직접 공격하는데, 부담을 느껴 문정왕후와 윤원형에게 명종의 실정까지 모조리 떠넘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종묘의 대접을 보더라도 현재 사가들의 평가 분석이 힘을 얻을 수 있겠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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