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정릉 탐방기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정릉 탐방기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2.2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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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에서 바라본 정릉 전경. 특이하게도 어로와 향로가 기역자로 돼 있다. 아마도 풍수적으로 그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릉 전경. 특이하게도 어로와 향로가 기역자로 돼 있다. 아마도 풍수적으로 그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덕고황후(?~1396)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姜允成)의 딸로 태조의 두 번째 왕비이다. 신덕고황후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태조고황제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 영역을 넓혀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덕고황후는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 최초로 왕비(현비·顯妃)에 책봉됐다(태조고황제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의고황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 세상을 떠났고 신의고황후 한씨 능인 제릉은 북한 개성에 위치해 있다).

태조고황제와 첫 번째 왕비인 신의고황후 한씨 사이에는 6남 2녀를 생산했는데 2남 영안군(제2대 정종)과 4남 회안대군(이방간)과 5남 정안군(이방원·제3대 태종)이 주목되는 인물이다.

태조고황제와 두 번째 왕비 신덕고황후 강씨와 사이에는 2남(무안대군·이방번과 의안대군·이방석) 1녀를 생산한다.

태조고황제는 세자를 정하는데 첫 번째 왕비 소생의 여섯 왕자 중에서 세자를 정하지 않고 두 번째 왕비인 신덕고황후 소생의 둘째 아들 방석(의안대군·宜安大君)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등으로 신덕고황후의 정치적 입지 기반을 닦도록 후견인 역할을 돈독히 했다. 그러나 이는 훗날 ‘제1차 왕자의난’의 씨앗이 됐다. 1396년(태조 5) 신덕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시호를 신덕왕후라 정하고, 현 정동(贞洞) 영국대사관 부근(그 당시 황화방·皇华坊이라 부름)에 정릉(贞陵)을 조성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兴天寺)를 세웠다.

태조(이성계)는 태종 8년 74세로 승하했다. 살아생전에 유독 계비 신덕왕후 강씨를 사랑했다고 한다. 해서 신덕왕후가 있는 정릉(현 영국대사관 자리)에 수릉(살아생전에 미리 잡아놓은 능)을 만들어 같이 묻히기를 원했다.

태조가 죽자 태종은 유언에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 현재의 위치(서울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로 이장해버렸다. 그리고 능의 석물과 목재 일부는 청계천 광통교 및 태평관 공사에 사용됐다. 더 나아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능을 묘로 깎아내렸다. 태종의 아버지에 대한 반목과 갈등에 대한 사무친 원한의 표출로 보인다. 그리고 아버지 태조의 능은 지금의 자리인 동구릉에 조성했다.

건원릉(태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중앙의 깊숙한 곳에 있다. 주산을 검암산(儉巖山·구릉산)으로 두고 그 아래 능선에 정북에서 동쪽으로 약간 기운 방향으로 조성됐다. 건원릉의 입지가 결정된 것은 태조가 사망한 1408년 6월이었다. 태종은 영의정 하륜(河崙) 등에게 명하여 원평, 봉성, 행주 등 다양한 후보지를 둘러보도록 한끝에, 최종적으로 능의 위치를 양주 검암(현 구리시 동구릉)으로 확정했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아 능을 옮긴 후 정릉의 형식은 일반인의 묘나 다름없었으나, 송시열 등의 건의로 1669년(현종 10년)에 신덕왕후의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왕비로 인정받은 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했다.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하면서,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추존했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신덕고황후 능. 단릉이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신덕고황후 능. 단릉이다.

제1차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은 이씨조선 개국 초기에 벌어진 정도전과 이방원의 권력 투쟁을 말한다.

이씨조선 건국 과정을 살펴보자. 고려가 소수의 귀족에게 부와 명예, 권력이 집중되는 폐쇄적 사회를 조선은 사대부 중심의 좀 더 개방된 백성이 근본이 되는,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균형 잡힌 국가를 건국한다는 명분으로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다. 이어 1393년 2월15일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조 개국 당시 최고의 개국 공신은 삼봉 정도전이다. 그는 조선에 대한 건국 설계와 성리학의 정치 이념을 제공하며 나라의 초석을 마련하는데 진력했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공도 정도전과 비교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가 고려를 유지하며 개혁을 해나가자고 주장했던 정몽주를 죽이지 못했다면 이씨조선의 건국은 없었다 할 정도로 역사는 인정한다.

문제는 정도전의 정치는 신권(臣权)이 왕권(王权)보다 우위에 서는 신권국가(臣权国家)를 만들고자 했다. 요즈음의 내각책임제국가 형태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방원은 왕권이 우위에 서는 명실상부한 왕권국가를 생각했다. 요즈음의 대통령제 국가다. 이방원은 그 당시 정도전의 의도대로 신권국가가 되면 문약(文弱)한 나라가 되어 명나라와 북원(北元)의 압박에 눌려 조기에 패망하거나 자칫 정씨의 나라로 뒤바뀔 가능성이 컸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연히 정도전과 이방원은 누가 선공을 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과 각자의 운명이 극명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세력 판도를 보면 정도전 일당이 절대적 우위에 있었다. 반대로 이방원은 세자 책봉에서 밀렸고, 왕족과 귀족에게 주어졌던 사병들도 정도전의 요동 정벌을 위한 진법 훈련에 차출당한 상태로 무력이 해제된 상태였다. 아울러 정도전은 왕세자 이방석의 보도(辅导·옳은 길로 가도록 가르침)를 떠맡아 이방석이 왕위에 오르면 안위의 방패막이라는 보험도 들은 상태였다.

이방원이 제거될 경우 정도전의 일파를 견제할 수 있는 대항 세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방원으로서는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내던져 무력으로 이들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승리할 가능성이 컸다.

태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398년 8월26일 밤 정도전이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이방원을 죽이기 위해 남은 첩의 집에 모여 모의를 했는데, 이성계의 병이 위독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이방원을 비롯한 여러 왕자를 궁으로 불러들인 뒤 병사들을 동원해 죽인다는 계획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원래 실록은 승리자의 편에서 기술하는 게 대부분이라 사실이 아닌 부분도 많다.

거사 당일 그날 밤, 이방원은 갑작스럽게 궁으로 불려 들어갔으나 다시 빠져나와 준비된 보졸과 노복 수십 명을 이끌고 정도전 일파가 무방비 상태로 모여 한담하고 있는 곳으로 가 선공을 시작해 정도전 일파를 척살하여 거사를 성공시킨다. 그리고 이어 이방석 세자, 이방번 왕자를 귀양 보내는 과정에서 척살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은 막을 내리고 이방원이가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로 인해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이방원의 둘째 친형인 이방과를 정종으로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하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수습하게 된다. 이방원 편에서는 이를 무인정사로 기록하고 있다.

능력을 관리하는 재실. 다른 능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능력을 관리하는 재실. 다른 능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제2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명 방간의 난, 박포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정도전 일파들이 제거되고 난 후 정국이 완전히 수습된 것은 아니었다. 적장자 왕자 중 넷째인 이방간도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가 있었다. 그리고 사병도 거느리고 있었으나 인격, 공훈, 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때는 1400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고 한다고 이방원에게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던 박포라는 자가 논공행상에 대한 불평불만을 하다 귀양을 가게 됐다. 이에 불만을 품고 박포는 이방원이 이방간을 제거하려 한다고 이방간에게 거짓 밀고를 하며 이방간에게 거병할 것을 선동한다. 결국 이방간은 사병을 동원하여 이방원을 치려고 함에 역공을 당하여 귀양에 보내지고 박포는 사형 처해 2차 왕자의 난은 막을 내린다. 1400년 2월 이방원이 왕세자로 책봉되고 그해 11월 정종이 태상왕 태조의 윤허를 받아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이로써 이씨조선은 명실상부한 한 국가로 재탄생하게 된다. 건국 후 8년 만이다. 태조 이성계와 아들 태종 이방원 부자지간의 권력 투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력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의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태상왕으로 물러나 자기의 본거지 함흥에서 지낼 때 자식인 태종이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아버지 태상왕을 한양으로 모셔오기 위해 사신을 보내나 태조의 노여움으로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음을 두고 함흥차사란 옛말이 있다. 이처럼 권력은 냉정한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보자. 현직의 대통령이 전직 두 대통령을 감옥에 가두고 정치를 해야 하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태조와 태종 시대보다 더 냉혹한 권력이 아닌가 묻고 싶다. 진정 권력은 인정도 눈물도 없는 것일까. 필연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나라가 부강한 만큼 좀 더 고급스러운 정치는 정녕 할 수 없는 걸까.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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