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치매와 건망증
[이영승의 붓을 따라] 치매와 건망증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1.02.26 1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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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이 심한 노부부의 실제 대화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거실 냉장고에서 우유 좀 가져다줘. 까먹을지 모르니 적어서 가.” 
“당신은 내가 치매라도 걸린 줄 아세요?” 
잠시 후 아내가 삶은 계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오자 남편이 말했다. 
“왜 소금은 안 갖고 와? 그러기에 내가 적어 가라고 했잖아.”

이쯤 되면 부부 중 누가 더 건망증이 심한지 모르겠다. 고령화 시대가 본격화되면 이런 사례는 허다할 것이며, 장수가 최고의 축복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지 않을까 싶다.

100세 시대에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치매라고 한다. 주위에 치매 환자들이 날로 불어나니 걱정되지 않는 사람 누가 있으랴. 총기가 좋다는 말을 듣던 나도 언제부턴가 깜박깜박할 때가 있다. 혹시나 치매 초기현상은 아닐까 싶어 후배 의사에게 사례를 들어 물어보니, “어떤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도 힌트를 줘서 금방 기억하면 건망증이고 그렇지 못하면 치매인데 형님은 분명 건망증입니다.”라고 했다. 다행이다 싶어 마냥 기뻐하니 누군가가 옆에서 “건망증 환자라고 하는데 그렇게 기쁩니까?”라고 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정상인가 싶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최근 건망증과 관련해 내가 겪은 몇 가지 사례다. 골프 라운딩 후 옷 가방을 두고 집에 와서 택배로 받은 적이 있었다. 지난달에는 그린피를 계산하지 않고 나왔는데 외부 식당에서 식사 중 생각이 났다. 송금하겠다고 카운터로 전화했더니 일행 중 두 번 계산한 사람이 있다며 그분에게 직접 주라고 했다. 다행히 어이없는 나의 건망증은 묻혀버리고 그분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깜박해 지나간 적은 수도 없으며, 외출 시 마스크를 챙겨 놓고 그냥 나와 돌아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지하철을 타면서 환승역을 지나갔는데, 되돌아오면서 또 환승역을 지나친 적도 있다. 핸드폰을 보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스스로 위안했지만, 건망증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누르는 아파트 현관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아내에게 전화한 적도 있다. “당신 치매에요?”라는 말에 할 말이 없어 “당신도 내 나이 되어보라”고 웃어넘겼지만 이런 일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비밀번호를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을 했다. 이제 갓 칠십을 넘긴 나이에 이건 아니다 싶었으며, 혹시 치매가 나를 노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건망증이기만을 바랄 뿐 다른 도리는 없다.

의사의 진단 없이 치매와 건망증을 구분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 골프 칠 때 맨 마지막에 퍼팅 후 깃발을 꽂지 않고 나오면 건망증이고 깃발을 그대로 들고나오면 치매이며, 비자금을 은밀한 곳에 감춰 놓고 둔 곳을 찾지 못하면 건망증이고 비자금 관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면 치매라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두 사례를 나에게 대입시켜보니 아직은 다행히 안심이 된다.

건망증을 의학적으로 설명하면 ‘나이가 든 후에도 젊을 때처럼 온갖 기억을 다하게 되면 정신력과 체력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는 자연현상’이라고 한다. 건망증의 실체를 알고 나니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다 날아가 버렸다. 노후의 망각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겪는 현상인데 나는 그동안 너무 걱정하고 저주하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는 오히려 축복이라 생각하며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치매가 아닌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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