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5] 황장엽 망명 도운 이연길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5] 황장엽 망명 도운 이연길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3.1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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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이연길과 황장엽
이연길과 황장엽

북한 황장엽 비서와 이연길 전 켈로(KLO)부대 대장 두 사람 얘기다.

황장엽(23년생) 비서는 잘 알겠지만 이연길(27년생) 부대장은 아마 아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다시 확실히 짚고 가자. 황장엽은 1960년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낸 북한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70년대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10년 이상 지냈다. 오랜 세월 북한노동당비서요, 주체사상 창시자로 소문난 인물이다. 그는 한창 북한의 고난의 행군시기였던 97년 2월 남쪽으로 극적 망명귀순 했다.

이연길은 왕년의 켈로부대(KLO)대장이었다. 켈로(Korea Liaison Office)부대란 6.25 직전부터 1953년 전쟁 휴전 시까지 극비리에 북한지역을 넘나들며 군사첩보전을 펴던 게릴라부대를 칭한다. 미국 극동사령부 산하에서 특수부대 임무를 맡은, 반공청년들로 구성된 특수부대였다.

특히 KLO(8240부대) 해상부대에는 반공대학생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대원명단 중에 이지영(고려대/27/대장), 이연길(성균관대/25), 이양재(서울 문리대/26), 박원(서울 사대/27), 차병권(서울 상대/26), 박창권(국학대/25). 장범수(국학대/24), 하재룡(연희 전문대/27) 등 당시 25세 전후한 재학생들 활약이 컸다. 이연길 경우 친형이던 이지영 대장이 북 침투작전 중 압록강 하류에서 적의 총탄에 사망하자 그 이후 대장 바통을 이어받아 부대를 통솔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은 켈로부대원들에겐 갑작스러운 전쟁종식으로, 일부에겐 큰 비극을 안겨 줬다. 그즈음 평안도와 함경도에 침투해 있던 2개 부대의 25명 대원 탈출로가 영영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일체 예고 없었던 휴전 종결로, 북에 남겨졌던 대원들 생사 자체가 불명해진 기막힌 실종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이연길 부대장은 “부대원을 북으로 침투시킨 뒤 본의 아니게 퇴로가 막힌 옛 전우들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을 지니고 산다”고 털어놓았다.

켈로KLO부대 8240 이연길대장

더구나 해체된 남은 부대원들도 정부로부터 아무런 국가보상을 받지 못했다. 국군조직 아닌 신분상으로 ‘유엔군(미군)소속’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켈로대원은 아무 조건 없이 젊은 혈기로 반공에 목숨을 걸고 특수임무를 수행하던 풍운아들이었다. 결국, 국가보상 건은 미해결인 채 어두운 전쟁역사의 뒤안길로 파묻혀 버린 것이다. 그들 북파공작원의 탁월한 활동내역은 있었지만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의 군 신분대책도 확립되지 않아 병역문제에도 곤란을 겪었다고 들었다. 훗날 특수전 사령부역사관의 한 담당 장교는 켈로 대원들에 대한 평을 “음지에서 시작돼, 음지에서 사라진 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번 글은 황장엽보다 켈로대장 이연길에게 보다 초점을 두었다. 이연길이 2년간 거사작업으로 인해 황장엽의 한국망명이 성사됐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에서 입지가 흔들리던 황장엽에겐 이연길이 어느 면에선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이연길이 황장엽에게 접근하게 된 당시 상황과, 또 내가 이연길 부대장을 만난 시기부터 얘기를 풀어가 보자.

이연길 전 켈로부대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인가 재외언론행사로 서울을 방문했을 때였다. H라는 한 탈북자가 이연길 회장을 소개해 줬다. H는 신의주 의대를 나와 90년대 시베리아벌목장에 파견돼 있던 북한의사였다. 나는 H를 몰랐으나,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내 모스크바특파원 당시 처음 개설된 UN 난민기구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 시베리아 탈북자였기 때문이다.

H는 나를 처음 만날 때다. 그는 3-4미터 거리를 앞두고 내게 90도 각도로 절을 했다. “송 선생 덕분에 자유의 땅에 와서 잘살고 있습니다. 선생은 우리들의 은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모스크바 UN난민기구에 첫 탈북자를 등록시켜 창구가 개설된 것을 알고 있었다. H에 따르면 9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에 남았던 탈북자들이 서너 명씩 지속적으로 UN난민창구를 통해 한국에 왔다고 한다. “송 선생이 아마 한국에 살고 계셨다면 우리 탈북자들을 구해 낸 공으로 큰 훈장을 받았을 겁니다. 혹시 시간되면 한 군데 소개해 드릴 곳이 있으니 함께 가시죠” 해서 안내받은 장소가 북민협(북한민주화통일협의회) 사무실이었다. 거기서 70대의 이연길 회장(전 켈로부대장)과 처음 상면했다. 그때 그가 황장엽 비서를 귀순시킨 장본인임을 알게 됐다.

6.25 전쟁 (평양에서 국군입성환영)

이 회장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의 고향이 북강원도 원산이었다. 당시 나는 강원도민일보에 북미주 강원인을 대상으로 “지구촌 강원인”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있었다. 이연길 회장의 특이한 이력이 돋보여 그도 신문연재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그는 평범한 노인네처럼 보였다. 켈로부대원의 강인한 투사기질보다는 오히려 학자풍 인상의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졌다. 반면 치밀한 성격으로 예리한 감각을 지닌 검도 2단의 노장이었다.

그는 고향 원산에서 월남해 46년 서울에서 성균관대학에 입학해 6.25전쟁을 치른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해방 후 소련군과 공산당의 횡포에 못 이겨 반공에 앞장서게 됐다고 한다. 일제 시 원산은 함경남도에 속했다. 이 회장은 “북한정부가 옳게 한 일은 원산을 함경도에서 강원도로 편입시킨 것이요. 원산사람은 말투나 성격이 강원도에 속하지, 함경도와는 맞지 않아요”라고 지적했다. 또 성균관대를 졸업했다고 할 때 “저도 졸업장은 성대에서 땄어요” 하니, 대화 중 어디선지 두툼한 대학동문 책을 꺼내왔다. “여기 동문 록에서 언제 졸업인지, 몇 학번인지 찾아보시오, 졸업생 이름이 다 들어있으니” 하고 내밀었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이런 학교 얘기는 보통은 그냥 지나칠 일이었다. 대학졸업이라는 게 무슨 큰 대수인가. 첫 대면이니 사소한 것이라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는 황장엽 망명 이후 테러 위협에 하도 시달려 신경이 그만큼 예민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66학번 경제과 70년 졸업생명단을 찾아 보여줬다. 사실 나는 성균관대학을 겨우 졸업했다. 학점 관련 때문이다. 나는 서강대에서 편입할 때 교양과목에서 영어 10학점, 독일어 8학점 등 모두 18학점을 땄다. 다른 일반대학 교양과목 경우 보통 영어학점은 1-2학점에 불과했다. 당시 서강대학은 외국어교육에 치중했으니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편입된 성대에서 내 학점인정을 속히 정리하지 않은 데 있었다. 그러잖아도 학기마다 학생처를 찾아가 학점확인 정리독촉을 했었다. 편입시험 때 의미는 없지만 전체수석으로 합격했었다. 어쨌든 졸업 때가 돼서 내 학점이 부족하다고 일방적 통고를 해온 것이다. 학생처를 찾아 직원들에게 항의했으나 콧방귀도 안 뀌었다. 무조건 졸업학점이 부족하니 한 학기 더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졸병들과 대화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옆방의 학생처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마침 학생처장이 자리에 있었다.

“처장님. 저는 서강대에서 편입해 곧 졸업을 앞둔 학생입니다. 서강대는 외국어교육에 치중해 1학년 때 교양과목 필수로 영어학점 10학점, 독일어 8학점을 취득했습니다. 편입 후 매년 학기시작 때마다 학점 승인문제로 학생처에 문의해 왔어요.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제 졸업을 앞두고 몇 학점부족하다고 졸업이 안 된다니 너무 억울합니다. 그나마 제가 평소 학점을 더 따둔 탓에 몇 학점만이 부족하니 선처해 주십시오”하고 호소했다. 처장은 아무 답변도 않았다. 그냥 나를 데리고 학생처로 들어가더니, 큰소리로 “이 학생, 학점을 유권해석해서 속히 만들어줘요”라고 지시했다. 내겐 공개적으로 “사흘 후에 와서 새로 만든 학점을 찾아가게”하고 일렀다. 통쾌했다. 학생처에서 나올 때, 성대 편입 시 국어시험에 출제됐던 청산별곡이 절로 흘러나왔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6.25 전쟁 대동강철교를 건느는 피난민들
6.25 전쟁 대동강철교를 건느는 피난민들

이연길은 켈로부대장 당시 이룬 큰 거사 중 하나를 소개한다. 북한 미그기 조종사 문덕삼이 평북 철산에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현지에 침투해 납치해 온 일이다. 켈로부대 활약상은 지면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전쟁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불러 치안국장에 앉히려 했다 한다. 그는 “내게 맞지 않는 고위급 공무원 자리를 고사하고, 동원기계 상사라는 개인회사를 운영했소. 지금도 강남구에 20년 이상 된 사무실을 그대로 갖고 있소.”라고 말했다. 그즈음 의사인 김정옥씨와 중매결혼했다. 부인은 부산에 병원을 개업해 늘 자신의 뒷바라지를 감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연길은 83년까지 원산장학회(재단법인)를 설립해 이사장을 역임했고, 92년까지는 원산 명예시장으로서 실향민을 돕기도 했다. 그를 만났을 때는 북한 민주화협의회 회장,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이사장, 켈로 전우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숭고하게 산화한 전우들이 죽음을 회고하면 자신인 생은 덤이나 다름없지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매년 한국방문 때마다 틈이 나면 서울역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수전증으로 한 손을 계속 떨고 있었다. ‘부인이 의사인데 못 고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2년간 준비한 황장엽 망명 건을 중간 조선일보에 제보했다. 기자에게 정보를 줄 때 상의해 세상에 밝히기로 했다 한다. 그러나 신문사가 정보만 가로채 그들만의 ‘특종보도’한 행위에 대해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약속과는 달리 일언반구 없이 단독으로 대서특필해 터뜨렸기 때문이다.

이연길은 “2년 동안 혼자 뛰어다니고 고생하다가 신의 없는 신문사만 영웅 만들어 줬다는 생각에 무척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 그 조선일보 기자에게 ‘따로 혼내주겠다’고 심한 말까지 했다”고 토로했다. 수년 후 이 회장은 “그 기자가 내 딸 결혼식을 위해 부산까지 내려왔었다”며 지난날의 앙금을 깨끗이 씻고 잊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연길(故)

그가 황장엽을 귀순시킨 내용을 줄여 적는다. 2005년 1월11일 주간동아 표지부터 ‘최초공개’라는 이름 아래 <황장엽 망명비화>가 이연길과 황장엽 두 사람 사진과 함께 전모를 상세히 밝혔다. 나 역시 2년 전 그 내막을 이 회장한테서 들어 사건 경과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는 강원도신문은 너무 작은 매체라서 일반대중들이 읽을 수도 없으니 언급하지 말라고 말했다. 사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내 경험상 작은 지방신문이 큰 사건을 터뜨려봤자 ‘찻잔 속의 태풍’인 경우가 많았다.

이연길이 중국에서 대북무역사업을 할 때였다. 북경에서 북한 려광무역회사 김덕홍(당시59세) 총사장을 95년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김덕홍이 총괄하는 려광회사는 북한 외화벌이와 노동당 국제부의 재원 마련을 위해 설립해 놓은 무역회사다. 날이 갈수록 이연길과 김덕홍 두 사람은 인격적으로 대화가 통하고 호형호제할 정도로 의기투합이 됐다. 김덕홍은 황장엽 심복이었다. 몇 달 후 김덕홍은 황장엽을 소개해 줬다. 당시 황장엽은 자신이 확립한 주체사상을 김정일이 독재 권력에 악용해 비참하게 굶어가는 주민들에 대해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엄청난 심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다. 이연길은 “황장엽은 그럴 시기 나를 만나 비로소 망명의 꿈과 희망을 품게 됐다,”고 내게 말했다.

1990년대 중반 황장엽은 세계 각지에서 주체사상 강연이나 세미나 등 해외참석이 많았다. 그러다 96년 모스크바 주체사상 세미나 때 결국 문제가 터진 것이다.

모스크바는 황장엽이 50년대 유학시절(모스크바국립대 철학박사)부터 연고가 깊은 도시다. 주변에 아는 지인들이 많았다. 그가 급히 망명을 서두르게 된 것은 주체사상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되고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는 주체사상 설명을 평소 소신대로 “인간을 바탕으로 한 인본사상이다”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 근본이 김일성사상이라 말하지 않은 점이 문제가 터진 것이다. 그때는 그냥 지나가는 듯했으나 두세 달 후 노동신문에서 ‘밖에서 누군가 주체사상을 김일성사상이 아니라고 떠들고 다니는 자가 있다’고 공개 비판한 것이다. 인민군 국방일보는 같은 비판내용의 사설을 게재했다.

평양 장충성당 내부광경
평양 장충성당 내부광경

위험을 감지한 황장엽은 북경에 있는 김덕홍에게 전했고, 급한 상황임을 연락받은 이연길은 원래 짜여있던 황장엽의 일본 도쿄 학술회의 일정 중 망명을 단행키로 계획을 짰다. 그러나 엄중한 주변 경호로 일본에서 거사가 여의치 않자 평양 귀환 길에 북경에서 망명키로 계획을 바꾼 것이다. 황장엽은 도쿄에서 이연길에게 악수를 청하며 무언가를 손바닥에 넣어줬다. 똘똘 말은 한 종이쪽지였다. 종이에는 <북경에서 차를 꼭 대기 시키시오>라고 적혀있었고, ‘꼭’ 자엔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이연길은 급히 먼저 북경으로 가서 김덕홍에게 황장엽 메모를 전해주고 급히 망명준비를 서둘렀다. 드디어 2년간 준비해온 황장엽과 김덕홍 두 사람의 극적탈출이 성공을 이룬 것이다.

황장엽 귀순 후 이연길 회장은 황장엽 휴대폰(010) 번호를 알려줬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도 전했다. 황 비서가 망명 후 소개받은 40대 여성과 동거생활에 들어갔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 회장은 “벌써 아들이 5살이 됐소. 여자는 40대 중반인데 얼굴이 갸름한 미모여성이라오.”

토론토에서 황장엽 비서에게 약속 없이 국제전화를 했다. “캐나다인데요. 저는 한국 강원도 신문기자인데, 통화 가능합니까.” “아, 그럼요. 캐나다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구만. 강원도는 내게 인연이 깊어요. 나는 해방을 삼척에서 맞았지. 일제당시 42년 강제징용으로 삼척시멘트공장에 끌려가 3년 6개월 일하다 해방을 맞고 풀려다 북으로 갔소. 나에 관한 얘긴 이연길 회장에게 들으면 전부 알텐데···” “아, 저는 강원도 출신인 이태준(철원)작가와 최승희(홍천)무용가에 대해 혹시 그들 내용을 아시나 해서요.” “그런가. 해방 후 이태준 장녀(이소명/31년생)는 나와 함께 모스크바 유학을 했지. 그때 함께 유학한 친구를 이소명에게 소개해 둘이 중매 결혼했는데, 그 친구(김일성 종합대교수)가 귀국 후 일찍 병으로 죽었소. 그때 친구 말이 이태준이 종파분자로 몰리고 있다고 고민하며 말해주던 생각이 나네. 그 후에는 잘 모르겠고.”

황장엽은 49년부터 54년까지 5년간 모스크바 유학생활을 했다고 한다.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피해 구소련에 있었으니 운이 좋았던 셈이다. 모스크바엔 최승희 딸 안성희도 함께 있었고, 안성희 역시 예술부문 유학생과 연애결혼 했다고 전했다. 그는 “남한출신에 대한 숙청은 1955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됐다”면서 “그러나 최승희는 내가 66년 김일성대학총장으로 있을 때도 숙청당하지 않았다”며 “아마 69년쯤 숙청당했다가 훗날 명예 회복됐다”고 알려줬다. 황 비서와 30분 이상 대화를 나누었다. 관련 없는 내용들이라 생략한다.

평양 정월대보름(2021년 2월)

이연길 회장과 황장엽사건 얘기를 다루며 내 모스크바 시절 옛 경험이 생각난다. 95년인가 어느 날 모스크바국립대학에 근무하는 P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만나 보니 “송 특파원! 내가 얼마 전 소중한 역사자료를 입수했는데, 미화 3백 달러만 주시오. 자료를 줄게요.” ‘아니 이 양반이 무슨 그런 얘기를···’ 강원일보라 하니 얕잡아 본 것인가. “무슨 중요자료에요?” “러일전쟁 발발장소가 인천 앞바다 월미도라는 사실을 러시아자료에서 찾았소.” 내 초교시절 러일전쟁은 중국 여순에서 시작된 것으로 배웠다. 그가 원하는 대로 돈을 주고 관련 자료를 받았다. 실지론 돈만 기부키로 마음먹었다. 당시 P교수의 곤궁한 처지를 한두 번 목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P교수가 발굴한 자료사실을 기사에 먼저 밝히고, 본사(매일신문) 통산실로 보냈다.

1주일이 지나도 송부한 기사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매일신문 국제부장에게 전화했다. “1주전에 보낸 러일전쟁관련기사 받았어요?” “예. 지금 알아보는 중이요.” “어디다 알아봐요?” “서울 모 대학교수에게 알아보고 있어요.” “아니 현지자료를 직접 발굴한 기사를, 어디에서 무얼 알아본다는 말이요?”하고 불만을 토했다. 그는 신문사는 달랐지만 같은 또래였다. 아까운 기사가 사장될 지경이기에 연합통신 이병로(현 연합뉴스 부사장) 특파원에게 “좋은 내용이니 나중 내게 점심이나 사게”하고 기사를 건넸다.

당시 이병로는 제2대 연합통신 (나중 연합뉴스와 YTN으로 분리됨) 특파원으로 파견된 총각기자였다. 평소 오만하고 좀 건방졌다. “어이! 송 선배. 선배는 쉽게 기자가 됐지요. 나는 2백대가 넘는 공개시험에서 뽑힌 기자에요”하며 뽐냈다. 좀 겸손하면 어디가 덧나나. 그러니 동아일보 대선배인 고 장행훈 모스크바특파원(이사)이 후배들에게 “기자 이전에 인간부터 돼라”고 늘 충고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연합통신에서 기사를 나가니, 곧 타 언론지들이 베껴 썼다. 한 지방지 간부의 오판으로 남의 신문사 좋은 일만 시켜 준 셈이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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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3-15 18:59:12
국사 성균관(성균관대)자격뒤에서 왜구서울대극복은 서강대 학구파가유일.2차대전이전 세계지배세력 서유럽.교황윤허資格작용되면 가능한현실.패전국 일본 잔재니까 주권.자격.학벌없이 100서울대,국시110브[연세대>고려대]로살고 Royal성균관대(한국최고대)나 Royal서강대(성대다음예우)위로 점프不認定.대중언론통해 자격없는힘뭉쳐 이미지창줄수준.태학.국자감(北京大),볼로냐.파리대資格.

http://blog.daum.net/macmaca/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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