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㉑] 북하나로 호령하며 생사맥을 짚어주고, 근대 국악의 귀한 유산 화고(和鼓) 정화영
[홍미희의 음악여행 ㉑] 북하나로 호령하며 생사맥을 짚어주고, 근대 국악의 귀한 유산 화고(和鼓) 정화영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1.03.29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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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연주
대금연주

(서울=월드코리안신문) 홍미희 기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5호 판소리고법 인간문화재인 화고(和鼓) 정화영 선생을 돈화문로에 위치한 전수소에서 만났다. ‘고법’이란 판소리에 맞춰 고수가 장단을 치며 북으로 반주하는 것을 뜻한다. ‘고법’은 판소리 반주에 불과하다 해 조선시대에는 이름이 알려진 명고가 적었지만 ‘일고수 이명창, 소년명창은 있어도 소년명고는 없다’는 말처럼 판소리에서 북의 중요성은 예전부터 강조돼 왔다. 오로지 북 하나에 의지해 흘러가는 판소리에서 노래의 흐름에 따라 어떤 때에는 강하게, 어떤 때는 약하게 또는 굴리면서 추임새까지 넣어주는 북은 노래하는 가객과 깊게 엮어진 친구다.

건물 4층에 위치한 전수소의 풍경은 국악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에 사진과 글씨가 적힌 족자, 구석에 쌓여 있는 북, 장구, 장구채, 그리고 방석. 정화영선생은 한눈에 보기에도 멋쟁이 노년의 모습과 아우라가 있었다. 그가 국악의 전반을 꿰고 있는 이유는 북만 잘 치는 것이 아니라 대금으로도 대통령상까지 수상한 실력파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1943년 출생으로 1958년에 대금을 배우기 시작해 이일파 국극단에 입단하고 1980년에 KBS 국악한마당, 1982년에는 국립창극단원 및 악장으로 있으면서 김동준 선생께 북을 배웠다. 이후 대통령상, 국악대상 등을 수상하고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 창설에 힘썼으며, 1999년에 국립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2001년에 서울시 고법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의 일생은 국극, 창극, 민속악, 판소리, 정악까지 모든 분야를 거쳐온 국악의 산 역사 그 자체이다.

안숙선 선생과 함께

“처음 악기를 배웠을 당시에는 국극이 많이 번성했어요. 그러니 막 몇 달 배운 놈이 그런데 가서 연주했죠. 지금 같으면 누가 써요. 천지에 잘하는 놈 많은데. 그런데 제가 좀 재주가 있었어요, 보기만 하면 그냥 꽹과리도 치고 장구도 치고 뭐든지 보면 쳤어요.” 국극은 5.16이 후 통금이 6시, 7시로 되고 TV가 나오면서 사양길을 걸었다. 그가 북에 입문한 것은 1981년도 국립창극단에 들어갔을 때다. “김동준 선생님께서 자네는 재주가 있으니까, 대금은 나이가 들면 힘드니 고법으로 바꾸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김동준 선생님도 고법 무형문화재였어요,”

그는 악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습이라고 강조한다. “노력 안 하면 안 돼요. 제가 대금으로 대통령상도 타고 그랬잖아요. 연습은 나하고 약속이에요. 사람이라는 게 하루 쉬잖아요. 그렇게 되면 두 번 쉴 수가 있어요. 대회나 무대에 올라가면 잡념이 들게 돼 있어요. 그런데 연습을 많이 하면 잡념이 들어도 손가락은 그 가락이 되는 거예요. 그래야 실수를 안 하죠, 무조건 노력해야 해요.” 그는 연주자들이 같이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고수다. “저는 같이 무대에 설 때는 그 연주자가 잘하건 못하건 연습도 철저하게 시키고, 또 내가 소리가 전문이 아니지만 어디서 숨을 쉬어라, 어디서 한 호흡 주고 이 손을 어떻게 해라. 이런 것까지 지도해 주죠. 난 연출을 20년을 창극단에서 받았거든. 그래서 대회나 무대를 훤히 알고 어떻게 해야 여유가 있는지 알죠. 대금을 하고 산조를 하고 60년이 넘으니까 이제는 판소리건 기악이건 뭐건 알아들을 수가 있어요,”

화고족자
화고족자

정화영선생은 국악인들 특히 기악, 타악하는 사람들의 민생을 위해 힘썼다. 공연을 할 때도 소리하는 사람에 비해 반주단의 보수가 너무 차이 나거나 신문사나 방송국과 녹화를 할 때 불합리한 조건에 맞서 조정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유럽에 정명훈과 같이 공연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유럽에서는 반주자를 연주자와 같이 취급하는 것을 보고 부러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내의 무대에서도 서양음악과 국악에 대한 대우가 다른 것에 대해서도 “나참 슬프데···”라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후학을 기르는 일에는 넉넉하다. 다른 국악인들이 “선생님이 그렇게 받으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라고 할 정도다. 그는 “나는 가르쳐서 먹고사는 사람이 아녜요, 그리고 요즘도 가르치지만 거의 다 무료예요, 저는 그래서 머리에 아주 박혔어요. 조그만 건물이라도 있어서 내 건물에서 내가 해야 세라도 안 내겠다. 음악을 가르쳐서 먹고살진 않겠다.” 실제 이 연습소가 있는 건물은 정화영선생의 소유다. 또 2002년부터 제자들과 함께하는 화고발표회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고수는 외로운 직업이에요. 모든 걸 본인이 해결해야 해. 틀려도 잘해도 본인이 해결해야 해. 일고수이명창이라는 말은 고수가 먼저란 말이 아니고 그만큼 어렵다, 중요하다는 뜻이예요. 고수가 틀리면 다 틀려요. 장구 같은 시나위를 할 때 대금, 피리, 아쟁, 거문고, 가야금, 해금 있지만은 장구가 한 번 삐끗하면 다 틀리는 거예요. 춘향가를 하는데 다섯 시간 반 이렇게 걸리잖아요. 가사는 조금 틀려도 넘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북이 틀렸다 그럼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긴장을 풀면 안 되고 그리고 연습을 게을리해서도 안 되고 만약에 연습이 부족할 때는 다른 테이프라도 들어야 해요. 고수는 판소리를 전체를 외다시피 배워야 되요. 노래를 다 알아야 판소리가 틀려도 맞춰 주니까. 그러기 때문에 좋은 고수를 만나면 연주자가 틀리는 걸 객석에선 모를 수가 있어요. 요즘 북을 잘 치는 젊은 애들이 많아요. 그런데 혼자서만 잘 치고 경험이 노련하지 않으면 연주자가 틀려도 그대로 쳐 버리는 경우가 있죠.”

19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
19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

그는 본인의 소리가 가장 좋았던 시기를 6,7년 전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뭐 어딜 가도 정화영 그러면 다 알아주니까. 제 북에는 감정이 들어가 있어요. 소리가 그냥 잔잔하게 간다고 해서 북을 잔잔하게 치는 게 아녜요, 북을 잔잔하게 치다가도 강하게 팍! 짚어줄 때가 있어요, 생사맥을 짚어주는 거죠. 전 그런 걸 연구를 많이 했어요, 감정이 북의 가락자체가 틀리죠. 예전에 김선생님께서 ‘정군, 그전부터 고수들이 추임새가 다 똑같다. 그걸 개발해봐라, 너만이 가지고 있는 다른 특색을 개발해봐라’ 그러시더라구요, 그런데 그걸 특색있게 한다는게 쉬운게 아녜요. 수만번 연습을 해서 나는 조금 다른 거예요. 국악대상 받을 때 남상일씨가 그렇게 말하데, 추임새가 특이하다고.”

그는 최초의 고법책을 비롯 4권의 책을 썼다. 최초의 고법책을 쓸 때는 책의 모델이 없어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아트 블렉키, 미국의 세계적인 드러머예요. 그 사람의 책을 보고 ‘아!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 책은 연습곡이 있어요. 연습곡, 북으로 치면 두둥, 따닥 이런 게 하나하나 표시가 돼 있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고민해서 악보도 만들고 이선보, 구음, 표현도 만들어서 넣었다. 북을 연주하면서 제일 마음이 잘 맞았던 사람으로는 안숙선선생을 꼽는다. “가장 많이 했고 그 양반 숨소리까지 대충 아니까, 눈빛만 봐도 알고. 무너질 때도 있고 빨리 할 때도 있고 조정할 정도가 됐죠. 소리의 틀도 알고. 소리할 때 어디 간다고 하면 오늘 이 양반 어디 하시는구나 하고 말할 것도 없이 바로 그냥 들어가죠.”

2002년 제1회 화고발표회
2002년 제1회 화고발표회

잔인한 질문이지만 뇌경색을 앓고 난 이후의 심경을 물었다. “남들에게 표현은 안 하지만 그 심경은 말도 못 해요. 너무 안되니까 연습도 하기 싫은 거야. 손에 힘이 없으니까 자꾸 떨어지고. 그래서 고무줄을 북채에다가 감아요. 그러면 의지가 되지. 안 떨어지라고, 안 놓치라고. 지난번 남원에 가서 두 번 공연도 했지만 원 박만 치는 거야. 따드락 이런 게 안되니까. 예전에 잘 치던 내가 지금 안 되니까 답답하죠.”

반주를 하려면 모든 악기를 다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특히 타악은 음악에서 기본적인 박을 깔아주고 곡의 성격을 정리한다. 그 음악을 따라가고 같이 호흡하고 알아야 하니 음악을 모르면 타악을 하기 어렵다. 음악의 호흡을 맞추고 나아가 그 연주자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북의 역할이다. 요즘 영화 미나리가 화제다. 그중에서도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된 윤여정이 단연 최고다. 우리가 흔히 ‘신스틸러’라고 부르는 화면을 집어삼키는 조연은 주연보다 아름답다. 주연과 조연은 없다.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평생을 연습을 강조하며 살아온 정화영선생이 북을 대하는 마음은 순정이다. 그 한결같은 노력이 최고의 실력을 만들어 냈다. 옛날처럼 멋을 부리고 잔가락은 못 넣어도 음악의 흐름을 알고 북하나로 호령하며 생사맥을 짚어주고 추임새로 다독이며 활력소를 넣어주는 화고(和鼓) 정화영선생을 만났다.

정화영 선생과 부인
정화영 선생과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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