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62] 포크 소위와 조선의 보빙사
[유주열의 동북아談說-62] 포크 소위와 조선의 보빙사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4.0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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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8월의 어느 날 일본 요코하마를 떠난 여객선이 태평양의 파도를 가르고 있었다. 그때 미국의 군함 한 척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 한 승객을 내리게 했다. 놀랍게도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근무를 마치고 귀국 중이었던 조지 포크(George Foulk, 1856-1893) 대리공사였다.

새로 부임한 윌리암 파커 공사는 매일 술을 마셔야 하는 알콜 중독자임이 밝혀져 미 국무성은 파커 공사의 본국소환 명령과 함께 포크 대리공사를 긴급 인터셉트해 다시 조선으로 데리고 오는 매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려는 청국의 권유로 조선은 1882년 5월 서양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은 조선이 청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잠재력을 평가해 1883년 5월 칠레 발파라이소 총영사를 역임한 변호사 루시어스 푸트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했다.

미국이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 아닌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하듯이 청국과 동급인 최고위직 외교관을 파견하자 고종은 이에 대한 답례로 보빙사(報聘使)를 파견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다시 한번 만방에 알리고 싶었다.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진압해 조선에 대한 종주국 지위를 회복했다고 생각한 청국은 조미(朝美) 두 나라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해 보빙사 파견을 반대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1883년 7월 견미보빙사는 명성황후 조카 민영익(23세)을 정사로, 개화파 홍영식(27세)을 부사 그리고 서광범(24세)을 종사관으로 하는 20대 청년 사절단을 꾸렸다. 수행원 및 통역 포함 보빙사 일행 11명은 미국의 아시아함대 군함으로 제물포(인천)를 출발했고 요코하마부터는 정기여객선을 이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현지 상공인의 성대한 국빈환대를 받고 대륙횡단열차(1869년 5월 개통)를 이용 시카고를 경유 수도 워싱턴을 향했다. 미 국무성은 정부 내 유일하게 조선어가 가능한 조지 포크 해군 소위를 접반사로 임명했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포크 소위는 1876년 미국의 아시아함대 소속으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익힌 일본어로 고베에서 요코하마까지 600km의 도보여행을 통해 일본을 탐사했다. 후에 조선에 외교관으로 부임해서는 가마를 타고, 대동여지도를 근거로 조선의 주요 지방을 두 차례나 걸쳐 시찰해 조선의 정정(政情)을 파악 본국에 보고했다.

6년간의 아시아함대 근무를 마친 포크 소위는 1882년 6월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과 원산을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 유럽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해군성 자료실에 배치돼 조선에서 마주한 조선어를 학습했다. 보빙사 접반사 명령을 받은 포크 소위는 일본의 선례를 찾아 25년 전 미일수호통상조약과 이에 따른 일본사절단의 방미여정을 조사했다.

1853년 7월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에도(江戶) 막부 말기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흑선(군함) 4척과 함께 도쿄만으로 들어왔다. 쇄국정책을 펼치던 막부가 당황해 쇼군 이에요시(徳川家慶)가 병중이라는 핑계로 만남을 거절하자, 페리 제독은 1년 후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홍콩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중국 남부에서 시작된 태평천국의 반란군이 난징(南京)을 함락시키고 베이징과 상하이를 위협하자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내란에 흔들리는 청국을 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도 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홍콩에서 겨울을 보내던 페리 제독은 마음이 급했다. 자신의 손으로 일본을 하루빨리 개국시키기 위해 1854년 2월 9척의 흑선을 이끌고 다시 도쿄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강력한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가 동원됐다.

겁에 질린 에도 막부는 통상수교를 거부하는 대신 미국의 선박에 식료와 연료를 공급할 수 있는 하코다테(函館)와 시모다(下田) 두 항구를 개항하는 선에서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통상을 원하는 미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2년 후 1856년 타운젠드 해리스 영사를 시모다에 파견 막부를 끈질기게 압박해 1858년 7월 드디어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1860년 2월 동 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80명에 가까운 사절단을 미국 군함에 승선시켰다.

태평양을 횡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일본 사절단은 다시 남하해 파나마까지 내려갔다. 당시 미국에는 대륙횡단 철도가 개통 전이지만 파나마지협(77km)에 미국 자본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철도가 부설(1855년 개통)돼 있었다. 사절단이 이 철도를 통해 대서양으로 나오면 대기 중이던 미국의 군함이 그들을 태워 북상, 메릴랜드 볼티모어 항구를 통해 수도 워싱턴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일본사절단은 제임스 뷰캐넌(15대) 대통령을 예방, 국서를 제출하고 필라델피아 등 산업 시찰을 한 후 뉴욕을 출발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 희망봉을 돌아 귀국하는 여정이었다.

포크 소위는 워싱턴에 도착한 조선의 보빙사 일행을 안내해 체스터 아서(21대) 대통령이 출장 중인 뉴욕으로 갔다. 1883년 9월18일 뉴욕의 호텔 대접견실에서 악수를 청하는 아서 대통령에게 사모관대정장으로 조선식 전통예절인 큰절을 했다. 일본 사절단처럼 허리를 굽혀 악수를 나눌 것으로 예상됐었는데 민망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모습이 언론에 보도돼 예절 바른 조선사절단에 대한 인상이 미국 시민들에게 각인됐다.

시찰 등 방미 일정을 모두 끝내고 귀국인사 차 백악관을 예방한 보빙사 일행에게 아서 대통령은 특별히 군함을 내주면서 유럽 방문을 권했다. 보빙사는 두 팀으로 나누어 정사 민영익은 종사관 서광범과 함께 유럽을 향해 뉴욕을 출발하고 부사 홍영식은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다시 미 대륙을 횡단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민영익은 성실하고 조선어가 유창한 포크 소위의 조선 주재 공사관 근무를 요청하자 미 국무성은 중국 및 일본에도 없는 해군무관(Naval Attache) 직책을 특별히 신설해 포크 소위를 임명하고 민영익 일행의 유럽 순방을 수행한 후 부임토록 조치했다.

정사 민영익 일행을 태운 미국 군함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파리와 런던 등을 시찰하고 돌아온 민영익 일행은 스에즈 운하(1869년 11월 개통)를 거쳐 홍영식 일행보다 4개월 늦은 1884년 6월2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한편 공관을 개설한 푸트 공사는 정동의 한옥 두 채를 구입 사무실과 공사관저 겸 직원 숙소로 정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의료선교사로 있는 호러스 알렌을 공사관 촉탁의사로 채용, 기독교 선교가 금지된 조선에서 우회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푸트 공사는 신임 포크 무관을 크게 환영하고 자신의 이름 복덕(福德)에서 행운을 의미하는 ‘복’을 넣어 복구(福久)라는 조선 이름을 지어주었다.

미국 정부는 동아시아에서 조선의 상황이 바뀌어 당초 기대와 달리 중요성이 떨어지자 푸트 공사의 직함을 전권공사(Minister Plenipotentiary)에서 변리공사(Minister Residence)로 강등시켰다.

이에 불만을 가진 푸트 공사가 본국에 항의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서를 제출했다. 푸트 공사는 조선에서 마지막 외교활동으로써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연결된 우정국 개국기념행사 참석 중 정변을 목격하고 자객의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민영익을 공사관 촉탁의사 알렌이 치료하도록 배려했다.

1885년 1월 푸트 공사가 사임 귀국하자 포크 무관이 임시대리공사가 됐다. 공관장이 된 후 조선에 대한 그의 강직하고 개성 있는 상황인식은 본국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1866년 평양에서 수난을 당한 제너럴셔먼호 사건 관련 조선정부에 대해 보상금을 요구하라는 본국의 훈령에 대해 포크 대리공사는 사건 당시 조선의 시대상황을 근거로 배상청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1886년 가을, 재부임해서는 청국의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대해 지나친 내정간섭의 횡포를 묵과할 수 없어 민영익의 추천으로 고종의 비공식 외교자문역을 맡아 유창한 조선어로 조선의 반청자주외교에 공헌했다. 청국의 항의를 받은 미국 정부는 청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해 조선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말라는 훈령을 수차 내렸으나 듣지 않는 포크 대리공사를 1887년 4월 소환명령과 함께 해직시켰다.

명성황후는 이임하는 포크 대리공사에게 “공사께서 지금 떠나면 우리가 낯선 나라들과 상대할 때 정직하게 지적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하고 크게 아쉬워했다고 한다.

포크 대리공사는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 서신으로 친분을 유지해왔던 일본 여인과 결혼하고 요코하마에서 무역회사를 경영했다. 그 후 교토의 미션계대학(同志社)에서 교수 활동을 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후지산 근처의 하코네에서 요양 중 1893년 산책길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름 복구(福久)와 달리 그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포크 대리공사는 거북선을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하는 등 조선의 우수한 문화 및 기술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조선이 주변 강대국에 희생돼 소멸되지 않도록 미국의 특별한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본국의 훈령을 따르지 않아 직을 잃어가면서 조선을 변호한 최초의 미국 외교관이었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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