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호의 유래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
  • 김형남 국가브랜드 자문위원
  • 승인 2011.06.25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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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월드컵 4강신화를 기억할 것이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이라고 목청껏 응원하던 그 가슴벅찬 순간을 말이다.

한민족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축구팬들조차 그 의미는 모른채 ‘대~한민국’을 따라하면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뭐냐고 질문하면 ‘Great Republic of Korea'라고 대답해 주곤 했다.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를 알아보자.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오천년 역사를 살아오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의 이름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그러다 1897년 10월 12일 조선 말기 고종임금은 나라의 체제를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고자 나라이름을 ‘大韓’으로 선포하고, 서울시청 앞 소공동에 ‘환구단’을 지은 후 천지에 제사를 올린 다음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마침내 중국과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갖는 ‘大韓帝國’을 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이 때 국호를 결정한 이유를 황제 반조문(頒詔文)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大韓은 朝鮮의 부정이나 혁명이 아니라 도리어 檀君(단군)과 箕子(기자) 이래의 분립, 자웅을 다투던 여러 나라를 통합하고, 나아가 馬韓(마한), 辰韓(진한), 弁韓(변한)까지 呑倂(탐병)한 高麗를 이은 朝鮮이 유업을 계승, ‘독립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의 권리’를 행하는 뜻에서 국호를 정했다.」

이에 따라 당시 10월 16일자 <독립신문>은 이러한 사실을 알리면서 “금월 십삼일에 내리신 조칙으로 인연하여 조선의 국명이 대한이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조선 인민이 대한국 인민이 된 줄로 아시오”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 1919년 4월 13일에 중국 상하이(上海)에 우리 애국지사들이 주축이 돼 임시정부를 세웠다.

이들 애국지사들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 오늘날의 국회에 해당)에서 먼저 국호 등 정부수립에 따른 여러 문제에 대해 수차례 회합을 가졌다.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 29명의 의원이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관할 지역인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에서 밤을 새며 정부수립에 관한 논의를 하였다.

이 날 임시의정원에서 처음 ‘大韓民國’이란 명칭을 발의한 사람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하던 신석우(申錫雨) 선생이었다.

그러나 여운형(呂運亨) 의원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신석우 의원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고 되받았다.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하였고, 다수결로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채택되었다. 그 자랑스런 이름 ‘대한민국’을 온누리에 떨치며 널리 인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힘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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