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9] 1946년 발생한 김일성 암살미수 수류탄사건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9] 1946년 발생한 김일성 암살미수 수류탄사건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4.15 13: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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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태극기아래 김일성 환영
태극기아래 김일성 환영

1945년 해방되던 해 김일성은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8.15 해방직후 그가 평양에 등장했을 때 북녘주민들은 태극기 아래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당시 3년간의 신탁통치 실시로 소련군정(스티코브 중장)이 시작됐을 때다. 미국과 소련군대가 3.8선 남북에 진주하면서 무척 어수선한 시대였다. 김일성은 당시 북한 통치권자로 군림한 소련장군들 승인 아래, 뒷전에서 자신의 위상굳히기에 바빴다.

남한은 남한대로 미군정(하지중장) 아래 정부 안정이 쉽지 않았다. 소련과 미국 두 군정사령관의 군 경력이나 성향은 사뭇 달랐다. 미 하지 중장이 전형적인 직업군인으로 남한을 책임 맡은데 비해, 소련 스티코프는 정치군인으로 주민통치방법에 극명한 차이점을 보였다. 소련군정은 김일성을 앞세워 강압적인 정치세력을 펴나갔고, 서울에서는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 당대 국내지도자로 꼽히던 제1정객들이 잇달아 암살당하는 대 혼란기 속에서, 결국 이승만 단독정부가 세워졌다.

해방 후 비록 나라는 독립국가가 됐으나, 이제는 동족끼리 ‘이념문제’ 갈등으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비극이 연거푸 일어난 것이다. 이는 일제시기 강우규, 이봉창, 안중근 의사 등 일본을 겨냥한 민족의거가 아닌 우리 남과 북만의 뼈저린 아픔이었다.

김일성과 소령 군장성들(권력장악 이전)
김일성과 소령 군장성들(권력장악 이전)

해방 후 이러한 혼탁한 시대에 태어난 나는 서울에서 6.25를 겪으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늘 “사람 사는 생활환경이 일제시대 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던 것이 기억난다. 내 부모고향뿌리가 북한 대지주집안이고, 남북이 3.8선 둘로 갈려 있으니 더욱 그런 주변얘기들이 회자된 듯싶다.

1970년대 중반 캐나다로 이주해 그 뒤 한국 교육실정을 잘 몰랐지만, 나중 보니 6.25전쟁의 남침, 북침조차 제대로 파악 못 하는 한국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 20-30대 청년기 나이일수록 더욱 깜깜이었다. 학창시절 배운 역사교과 내용이 언제부터 한국 젊은이에게 그렇게 달라지고, 실종돼 있는지 몰랐다. 좌파성향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육과정이 조금씩 달라져 간 것인가.

또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가정환경이 좋았던 집안들은 대부분 친일파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 국어교과서에 글을 실었던 이광수, 최남선은 친일파로 낙인찍혀 교재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어느 정도 근거와 잣대에 따라 취해진 교과과정으로 이겠지만, 좌파성향 정부일수록 친일파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놓은 것 같았다. 서론이 좀 길었다.

북한 관련 글을 쓰다 보니, 한때 특파원 활동을 했던 러시아에 북한관련 자료 등이 많았다. 90년대 초반 모스크바에는 북한 한의사(고려의학) 2명이 상주해 의료 활동을 했다. 나도 두세 번 진료를 받은 적이 있다. 북한에서 파견된 미술관계자들도 모스크바에 거주했다. 그들은 시내 미술관 전람회장을 빌려 1년 내내 조선(동양)화 그림 등을 판매했다. 러시아 남쪽지역엔 북한 건설노동자들 수백 명이 있었고, 극동지역에는 시베리아 북한벌목공이 기천명이상 일했다. 카자흐스탄 알마아타 국립대학에도 북한교수가 파견돼 있었다. 나는 지난 1980년대부터 북한인을 일찍 접한 경험이 있어, 북한사람을 마주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다 같은 동족일뿐이었다.

해방직후 김일성 연설
해방직후 김일성 연설

1993년 모스크바에서 한 북한기자를 알게 됐다. 나보다 연상의 라웅걸 노동신문 특파기자(북은 특파기자로 호칭)다. 그는 50대나이로 꽤 오래된 벤츠를 몰고 다녔다. 별로 기자활동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경쟁자들인 한국기자보다 편했다. 그에게 가끔 전화해 술집에서 보드카를 둘이 마시곤 했다. 내가 늘 먼저 연락을 했다. 그는 한 번도 전화를 준 적이 없었으나, 만나면 반가워했고 마음이 통했다.

딱히 무슨 화제꺼리는 없었으나, 나는 언제나 질문자 쪽이고, 그는 듣기만 했다. 처음엔 나를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삶이니 그렇거니 했다. 그는 뭐든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답해 줬다. 한동안 친했는데 어느 날 귀국해 버렸다. 나중 방북해 그를 만나고자 했으나 북당국은 허락지 않았다.

한번은 라 기자가 해방 후 몰랐던 북한사건을 알려주었다. 나중 해당인물 사진(첨부)도 건네주었다. 1946년 3.1절 김일성 연설당시 발생한 김일성 암살미수 수류탄사건이다. 또 궁금했던 월북 작가 상허(호) 이태준(1904-?)에 관한 일부 얘기도 들려줬다. 이태준은 문학계에선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라고 일컫는 대표적인 한국근대문학 작가다. 관심 없는 얘기일 수 있지만, 어쨌든 이태준의 월북이후 소식이 완전 끊어진 마당에 일부 족적을 알게 됐다.

북한 3.1절에 발생한 김일성암살 미수사건부터 간략히 전한다.

1946년 3월1일 해방 다음해다. 평양역전 광장에는 3.1절 행사를 위한 군중대회가 오전부터 열리고 있었다. 해방 후 두 번째의 대규모 군중대회다. 북한주민들은 금의환향한 젊은 ‘김일성장군’ 장악 아래 공산정부체제를 확립해 나가던 시기였다. 김일성이 단위에서 기념식 대표연설을 끝냈을 때, 갑자기 조그만 폭탄(수류탄) 하나가 날아들었다. 주위에는 소련군 보초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단 앞에 서 있던 경비간부인 소련 노비첸코(Novitchenko) 소위가 곧 이를 발견해 주웠을 때 수류탄이 터졌다. 폭음과 함께 소련소위는 오른팔이 달아나고, 몸과 눈에 상처를 입는 등 중상을 입었다. 그나마 경비소위가 구사일생 살아남은 것은 가슴 속에 넣어 둔 책이 보호막 역할을 했다 한다.

노비첸코 소위
노비첸코 소위

폭탄을 던진 사람은 18세의 ‘김형집’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곧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형 돼 처형당됐다고 전해졌다. 해방 후 북한에는 ‘백의사’라는 반공우익의 비밀결사단체가 있었고, 김형집은 이 단체멤버였다. 이 백의사는 신익희 등 임정요인들이 관련해 결성됐다고 한다. 6.25전쟁 이전 남쪽 켈로(KLO) 부대처럼, 남과 북에는 이념으로 갈린 좌우세력이 극한대립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울 때였다.

김일성은 그때 자신을 구한 야콥 노비첸코 소위를 잊지 않았다. 김주석은 북한정부가 자리 잡은 훗날인, 지난 1984년 소련방문 때 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에 거주하는 노비첸코 집을 방문했다. 그때 ‘노력영웅’ 칭호를 주고, 북한에 국빈자격으로 여러 차례 그 가족을 초청했다. 러시아 북한공관을 통해서도 매년 선물 등을 전달했다. 김일성주석과 구소련시민 노비첸코 와의 관계는 후대 김정은 대까지 이어졌다. 2019년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은 “김정은 위원장 명령에 의해 북한대사관은 노비첸코 생일기념으로 그의 무덤에 헌화하고, 고향 집 뜰에 우호의 나무로 사과나무를 심었다”고 보도했다.

나는 그때 북한 라웅걸 기자가 알려준 수류탄사건을 처음 알았고, 나중 모스크바에서 만난 고려인 박길룡(전 북한 외무성간부) 노인이 사실임을 확인해 줬다.

고향 노비첸코 묘소
고향 노비첸코 묘소

라 기자는 또 리(이)태준 작가에 대해 “나는 평양에서 학교 다닐 때 리태준 선생으로부터 배웠소. 가끔 평양거리에서도 조선옷(한복)을 입은 리 선생을 본적이 있지요”라고 전했다. 이태준이 1940년에 쓴 ‘문장강화’ 책은 오랜 세월동안 문인들에겐 글(문장)쓰기 안내, 지침서였다. 그는 46년 월북했으나, 그가 한국 근대 단편소설 완성자라는 데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다. 이태준은 월북이후 소련을 두 차례 방문하고 견문기도 썼다.

이태준 고향 강원도 철원에선 매년 11월 그를 기리는 문학제가 열린다. 마을에는 문학비와 이태준 흉상이 건립돼 있다. 이태준 작가를 연구하는 한 문학전문가는 “이태준은 비록 북에서 숙청당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는 북 당국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가였다면서 “최승희 무용가와 한설야 소설가는 숙청당한 후 나중 신분이 복원돼 평양애국열사릉에 묻혔지만, 이태준 경우 말년에 행방조차 알 수가 없다”라고 애석해했다.

딱한 사실은, 좌익성향의 이태준이 월북 후 김일성정권을 위해 애를 썼으나, 결국은 존재감도 없이 북한 내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는 북에서 순수작가로서의 작품 활동보다 정치적인 문필활동이 많았다. 그의 글은 주로 노동신문을 통해 발표됐다. 6.25전쟁 시기인 1952년 재일본교육자동맹 문화부에서 발간된 “신 문장강화‘ 책에 게재된 이태준 글 일부를 소개한다. 이 원본내용을 밝히는 이유는 당시 이태준 사상을 엿볼 수 있고, 주요 역사기록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노비첸코
김일성과 노비첸코

<조선최고 인민회의 제1차회의인상기> 이태준.

··· 오늘 땀과 피로 투표한 전조선 인민들의 열화 같은 기대 속에 조선최고인민회의는 드디어 열리었다. 이날 평양은 우리 민족의 신생을 상징하는 듯 봄비 같은 고운 비가 내리어 지난 모란봉을 신록처럼 씻어주는데··· 우리 손으로 새로 세운 모란봉극장에서 반만년역사에 일찍 있어 본 적 없는 명실그대로의 인민회의가 열린 것이다. ··· 북으로 강계, 경흥으로부터 남으로 거제, 제주도까지 방방곡곡에서 뽑혀온 대표들, 빈발의 허연 노 혁명가가 계신가 하면 무쇠팔뚝에 석탄내와 흙내그대로 풍기는 노동자와 농민도 있고, 옷매무새 단정한 젊은 여성이 있나 하면, 테러와 반동경찰과의 피투성이 싸움판에서 찢어진 적삼인 채 온 투사도 있다··· 노동자, 농민, 학자, 예술가, 사무원, 상인, 각계각층의 대표들, 여기가 한 덩어리 조선이요, 이것이 한 덩어리 우리 민족인 것이다. 누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는가? 오직 민족의 원수 리승만, 김성수 따위 매국도당들 뿐이다. ··· 각도별로 대의원들 자리가 거의 찰 무렵, 내빈석에는 우리 민족 해방의 은인이요, 오늘 우리의 조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탄생에 절대적인 협조국인 소련의 귀빈들이 참석해 주었다. 정작 오전 11시가 되자 장내에는 우레 같은 박수가 일어났다. 우리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을 선두로 김두봉선생, 박헌영선생, 허헌선생, 최용건선생, 김원봉선생, 홍명희 선생 모두 웃음에 찬 얼굴들로 입장하신 것이다. 역사적 우리 조선인민의 최고회의는 최고령 대의원 충남 정운영선생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주야 없이 지하 몇천 척 탄층 속에서와 끓는 용광로 앞에서 싸워온 아오지 탄광 박동수동무, 황해제철 한기창동무들이 저기 앉았으며, 동포들을 다시 식민지 노예로 만들려는 미 제국주의자와 그 주구들과 피투성이 싸움을 해온 제주도 무장 항쟁의 김달삼 동무며 허다한 구국투쟁의 투사들이 저기 있다.··· 나는 오늘처럼 뜨거운 박수소리를 들으며 쳐 본적은 없다. 한 가지 순서가 지나갈 때마다 우레 같은 박수들과 끓는 시선들··· 3천만 조선인민들이 오늘 이 자리를 향해 두드리는 박수며, 이 자리를 향해 우러러보는 끓는 시선들일 것이다. (1948년 9월3일 노동신문에 난 필자의 인상기)

이태준
이태준 "신 문장강화" 책

월북작가 이태준만큼 아까운 인물이 또 한명 있다. 역시 해방 후 월북한 ‘신불출’이란 천재만담가다. 그는 그냥 만담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일제시기 조선백성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안긴 인물로, 시인이요, 창작가요, 연극배우요, 극작가로 문필활동을 한 인재였다. 신불출은 일제강점기 혜성과 같이 나타나 ‘만담’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해, 해학과 날카로운 세태풍자로 민중들의 심금을 울린 연예인이었다. 요즘과 비교하면 ‘개그맨의 원조’이며, 50-60년대 장소팔/고춘자 등 만담가의 선배 격이다.

또 신불출(1907-?/본명 신상학)은 1930년 불멸의 민요곡 ‘노들강변’ 작사가(문호월 작곡/박부용 노래)다. 3편 작사 중 기억에 남는 1편을 소개한다. (1편)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매여나 볼까/에헤야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그가 작사한 이 노들강변 노래는 일제 시 국민 누구나 애창됐던 신 민요였다. 특히 초등교에선 무용시간에 레코드 (OK레코드 사에서 음반제작)를 틀어놓고 학생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 신민요 5개 대표곡은 아리랑, 도라지, 천안삼거리, 양산도, 노들강변을 꼽았다한다. 신불출 이름자체가 ‘세상에 태어나보니 일제가 판치는 사람 못살 세상인데 이런 세상인줄 알았더라면 아예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1955년 그는 북에서 공훈배우를 거쳐, 최고 칭호인 인민배우까지 됐고, 50-60년대 평양에서 <신불출 만담연구소>를 설립해 활동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숙청당해 북한사회에서 흔적이 없어졌다. 70년대 초반 김영순 탈북무용가(성혜림 친구)는 “나는 신불출을 1972-3년 요덕정치범수용소(15관리소-1작업반)에서 만났다. 그때 나이는 10여살 아래로 체격이 큰 부인 이양초도 함께 있었다”면서 “당시 신불출은 키가 작고 선량한 인상으로, 수감자들을 웃기고 즐겁게 하다가 1975-6년경 부부가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으로 들었다”고 알려줬다.

신불출 만담집
신불출 만담집

1995년 김정일 위원장이 신불출의 만담을 회고해, 2009년 다시 ‘신불출 만담집’이 출간됐다. 나는 56년판 발간된 신불출 ‘만담집’ 복사판을 갖고 있었다. 평양 방문했을 때 인민대학습당(북한 최대중앙도서관)에서 새로운 신불출 자료 등을 찾고자 했으나 실패한 경험이 있다. 신불출 관련한 내 글은 지난 2009년 5월 ‘주간동아 686호’에 <만담가 신불출을 아시나요?>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이태준 작가도 그렇고 특히 신불출 만담가 경우, 처음부터 월북했다는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그들이 남쪽에 택했더라면 두 사람 전부 비중이나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한 연로한 지인은 “이태준은 김일성을 추종하다 버림받은 아까운 좌파지식인이고, 신불출은 천성이 불의에 대한 야유와 비판이 몸에 배어 있던 좌파연예인인데, 김일성 일당독재의 북쪽을 선택했다는 자체가 아주 잘못된 판단”이라고 개탄했다. 한때 소중한 우리네 인재로 사랑받던 두 사람 전부 북녘땅에서 흔적도 없으니, 그들 마지막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뿐이다.

조만식 선생과 소련 군정사령관 부관 메크레르 중령 식사
조만식 선생과 소련 군정사령관 부관 메크레르 중령 식사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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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2021-09-11 01:05:15
김용순이란 탈북자가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활한 적도 없고 성혜림과 친분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탈북자의 증언을 사실로 전제하면 결론이 엉뚱해 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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