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융건릉 탐방기-2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융건릉 탐방기-2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4.17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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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에서 바라본 건릉= 정조가 1800년(순조 즉위년) 6월27일에 승하하자, 같은 해 7월6일에 묘호 등을 정하면서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정했다. 이후 그의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6일 현륭원(지금의 융릉)의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했다. 정조가 승하하고 21년 후인 1821년 3월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3월17일에 시호를 올리면서 능호는 정릉(靜陵)이라고 했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건릉= 정조가 1800년(순조 즉위년) 6월27일에 승하하자, 같은 해 7월6일에 묘호 등을 정하면서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정했다. 이후 그의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6일 현륭원(지금의 융릉)의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했다. 정조가 승하하고 21년 후인 1821년 3월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3월17일에 시호를 올리면서 능호는 정릉(靜陵)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 문예 부흥의 주역이었던 정조(正祖, 1752~1800년)는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로서 한평생 정치 개혁과 아버지에 대한 회한으로 점철했던 임금이다.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隆陵)을 경기도 화성군 송산리 화산 자락에 모시고 융릉의 원찰인 용주사를 중창했다. 정조 자신의 무덤은 아버지 능 옆에 마련하고 건릉(健陵)이라 이름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군왕이 된 후 헌신적인 노력으로 살아 있는 동안 다하지 못했던 효심을 눈물겹도록 펼쳤다.

정조는 영조 28년(1752년) 9월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기상(氣像)이 늠름하고 체상(體狀)이 특이하며 성품이 곧고 영특해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종묘사직을 이을 기대주로 촉망받는다. 정조는 나이 7세에 세손에 책봉됐으나 불과 10세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쓰라린 죽음을 목격한다. 아버지를 잃고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後嗣)가 됐다가 영조가 승하하고 1776년에 왕위에 오른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건릉= 전반적으로 조선왕릉의 표준을 따르고 있으며,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융릉과 비교해 보았을 때, 융릉이 봉분에 화려한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데 반해서, 건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두르고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다만, 19세기 조선 후기의 왕릉 형식 답게 석물들이 화려함을 갖추고 있고, 문인석도 금관조복(문무백관들이 국가행사 때 입는 대례복)을 입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융릉과 같이 정자각 앞쪽을 굉장히 넓게 조성하였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사도세자와 정조를 황제로 추숭하고 융릉과 건릉을 황제의 릉으로 조성하면서 그 격식에 맞게 꾸민 거라고 한다.
 

정조는 이후 세수 48세(1800년)의 젊은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불꽃 같은 삶을 정치 개혁에 바친다. 정조가 재위한 25년의 조선 역사는 문예 부흥기로 찬란히 빛난다. 규장각을 설치해 인재를 등용하고 도서를 간행했으며, 탕평책을 시행하여 당파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 날의 상처와 한을 무던히도 감내하며 갸륵한 효성과 치적으로 승화한 것이었다.

정조의 치적을 열거해보면 우선 사색당쟁에 대한 탕평책으로 사색을 고루 등용하여 당쟁을 줄이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호학 군주로 규장각을 세워 서얼 출신들인 실학자를 등용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사회적인 개혁을 추진케 하여 개혁을 실천하는 한편 실학을 장려하여 학문의 발전을 이루도록 했다. 나아가서 신분은 낮으나 능력 있는 서얼들을 각 계에 등용토록 기회를 제공하여 사회와 과학 발전을 도모했다.

융건릉 인근에 위치한 용주사 대웅전: 용주사(龍珠寺)는 융릉과 이어진 화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이곳은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광종 21년(970년)에는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호란(胡亂)으로 소실된 채 숲속에 묻혀 있었다. 1789년 7월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을 영건하기로 결정했다. 용주사는 1890년에 정조가 왕실 이하 팔도에서 시주한 8만 냥을 들여 현륭원의 원찰로 지은 절이다. 조선 왕조 능침사찰(陵寢寺刹)로는 1632년 지어진 원종 장릉 원찰 봉능사(奉陵寺) 이래 158년 만의 예이자 마지막 능침사찰이다.
융건릉 인근에 위치한 용주사 대웅전: 용주사(龍珠寺)는 융릉과 이어진 화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이곳은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광종 21년(970년)에는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호란(胡亂)으로 소실된 채 숲속에 묻혀 있었다. 1789년 7월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을 영건하기로 결정했다. 용주사는 1890년에 정조가 왕실 이하 팔도에서 시주한 8만 냥을 들여 현륭원의 원찰로 지은 절이다. 조선 왕조 능침사찰(陵寢寺刹)로는 1632년 지어진 원종 장릉 원찰 봉능사(奉陵寺) 이래 158년 만의 예이자 마지막 능침사찰이다.

이렇듯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군주로 평가됐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으며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정치의 배경이 됐다. 재위 기간 중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했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1800년 48세 재위 25년 만에 돌연 사망하자,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서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통하여 반대파인 소론과 남인 등 개혁세력들을 제거하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지면서 정조가 이룩하려던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조선의 역사는 깊은 정체 상태에 빠지면서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이는 정조 사후 100년 동안 조선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복마전이 돼버린다.

1795년(정조19년)에 창건된 수원 화성 성곽 창룡문(蒼龙门)=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르킴으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수원 화성 성곽은 창룡문, 장안문, 팔달문, 화서문으로 건축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 복원됐다. 수원 화성(華城)은 정조의 이상향인 신도시 건설로 새로운 세상을 펼친 곳이요, 아울러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심이 어린 영원한 사부곡의 무대이기도 하다.
1795년(정조19년)에 창건된 수원 화성 성곽 창룡문(蒼龙门)=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르킴으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수원 화성 성곽은 창룡문, 장안문, 팔달문, 화서문으로 건축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 복원됐다. 수원 화성(華城)은 정조의 이상향인 신도시 건설로 새로운 세상을 펼친 곳이요, 아울러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심이 어린 영원한 사부곡의 무대이기도 하다.

최근에 개봉된 ‘자산어보’라는 영화에서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서학의 탄압으로 각각 강진, 흑산도로 유배를 당하는데 조선이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시대의 시대상을 잘 읽을 수 있다. 대한민국 현재의 정치 상황이 클로즈 업 되면서 사색당파에 의한 붕당정치가 위선과 편가르기, 내로남불의 가치관이 왜 반복되는 역사로 클로즈업 되는지 이 ‘자산어보’ 영화가 잘 보여 주고 있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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