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몽골 늑대사냥 날의 일기
[해외기고] 몽골 늑대사냥 날의 일기
  • 고형권 現 주OECD 대표부 대사
  • 승인 2021.04.1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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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고문은 필자가 세계은행 컨설턴트를 맡아서 2년간 몽골 재무부장관 자문관으로 일했던 당시의 경험을 담은 글이다. 1964년생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필자는 제30회 행정고시 합격 후 줄곧 기재부에서 근무하며 기재부 제1차관도 역임했다.<편집자주>

고형권 現 주OECD 대표부 대사

오늘은 시베리아 바로 아래에 있는 셀렝가 지방으로 늑대사냥을 하러 가는 날이다. 아침 여섯 시경 바트게렐과 간숙트가 함께 집 앞으로 왔다. 둘은 몽골 재무부에서 동갑이라는 이유로 항상 나를 챙겨주는 좋은 벗들이다. 타이어 바퀴가 트럭의 그것처럼 굵고 큰 랜드크루저를 몰고 왔다. 바트게렐이 트렁크를 열더니 우리나라 두루마기와 흡사하게 생긴 양가죽으로 지은 몽골 전통의상인 델로 갈아입으라고 한다. 목이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는 가죽 신발도 건넸다.

내가 입고 있는 방한복 차림으로는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으로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추위를 견디기에는 턱도 없다고 한다. 특히 목 길이가 충분치 않은 등산화를 신었다가 눈이 신발 안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동상에 걸린다고 했다. 머리와 귀 아래까지를 완전히 감싸는 토끼털로 만든 모자도 썼다. 둘이 준비해 온 복장으로 완전무장하고 나니 나는 영락없는 몽골 유목민과 같은 모습이 됐다. 둘이서 내 모양을 보고 좋아하며 웃다가, 술잔에 보드카를 따라서 약지 손가락으로 술을 하늘로 튕기면서 자동차를 따라 세 바퀴 돌았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몽골인들이 여행길의 안전을 비는 의식이다.

그 후 우리는 울란바토르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렸다. 길 따라 늘어선 전봇대와 굴뚝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는 유목민들의 게르가 드문드문 보이기도 했지만, 시야가 끝나는 지점까지 모든 것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간간이 길옆에 어워(우리나라 성황당과 유사하다)가 나오면 차에서 내려 어워를 따라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면서 돌을 올려놓았다. 마음속으로는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둘은 의식이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보드카를 마시며 나에게도 권했다. 사냥을 앞두고 무슨 술을 아침부터 이렇게 많이 마시냐고 해봐야 소용없다. 술잔을 받아서 조금만 마시고 남는 술은 하늘에 뿌리는 방식으로 요령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점심 무렵이 다되어서 한 유목민의 게르에 도착했다. 열다섯 명 정도의 유목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군복 비슷한 복장에 AK 소총 비슷하게 생긴 사냥총을 메고 있었고, 또 일부는 말을 타고 있었다. 게르 옆에는 나무 말뚝으로 둘러친 울타리 안에 소, 말, 양, 염소, 낙타 등 수백 마리의 가축들이 서로에게 바짝 붙어 서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우리는 유목민들과 인사를 나눈 후 소고기 국물에 밀가루 국수를 넣어서 끓인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마치고 게르에서 20~30km 떨어져 있는 산으로 이동했다.

미리 산에서 망을 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늑대를 목격했다며 급하다는 전갈이 왔다고 한다. 산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상기된 얼굴로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늑대의 배설물을 보여주며 산속에 세 마리의 늑대가 있다고 했다. 무리 중에 사냥 경험이 가장 많다고 하는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늑대는 워낙 영리하고 예민한 동물이라 이제부터 일체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손짓으로 각자의 역할을 알려줬다.

말을 타고 온 다섯 명 정도는 산기슭으로 가서 막대기를 휘저으며 늑대를 산 능선으로 몰고 올라오는 역할을 맡았고, 다른 일행들은 산 능선에 배치돼서 엎드려 쏴 자세로 잠복해 있다가 늑대가 나타나면 총으로 쏘는 역할을 맡았다. 나와 바트게렐, 간숙트 셋은 능선 좌측에서 숨죽이며 아래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면 늑대가 사람 냄새를 맡고 도망갈 수 있다고 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더 깊숙이 낮춰서 땅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은 늑대를 잡을 수 있고, 영혼이 강해야만 늑대를 볼 수라도 있다는 몽골 속담을 들은 기억이 있어서 내가 운이 좋거나, 영혼이 강한 사람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초조하게 늑대가 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두 시간 정도가 지나도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몰이꾼들이 허탈한 모습으로 능선으로 올라오면서 늑대가 눈치채고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 같다고 했다. 유목민들은 손님인 우리를 위로하면서 바위 위에 맥주캔 몇 개를 올려놓고 그것을 표적 삼아 총이라도 쏴보라고 했다. 나는 군에서 사격 훈련했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번번이 빗나가고 말았다. 바트게렐과 간숙트가 늑대가 나타났다 한들 그 솜씨로 뭘 할 수 있겠냐면서 낄낄대며 놀려댔다.

우리가 다시 유목민 게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다. 게르 옆에는 장작불이 피워져 있었고 유목민 부부가 양을 잡아서 손님 접대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게르 안은 유목민들이 연료로 사용하는 소똥이 난로 속에 벌겋게 불붙어서 더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햇볕에 그을려 얼굴이 빨갛게 탄 유목민의 코흘리개 아이들도 겸연쩍게 앉아 있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 주인인 유목민이 이렇게 귀한 손님이 자기 집을 찾아줘서 내년에는 좋은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인사말을 마친 뒤 성대한 만찬이 시작됐다. 계속해서 술잔이 돌았고 양고기가 끝없이 나왔다. 취기가 오를 무렵부터는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한국에서 온 특별한 손님인 나에게는 더 많은 술을 권하는 것으로, 나에게는 고통이었지만, 특별한 배려가 주어졌다. 밤 열시가 넘어서 우리는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되는 사이지만 몇 번씩 번갈아 가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정을 다짐하며 헤어졌다.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바라보는 몽골의 겨울 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맑은 별들로 가득했다. 성운이라는 말 그대로였다.

우리는 차 안에서 별을 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숙트는 서툰 영어로 모스크바 대학 유학 시절 자기의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바트게렐은 재무부 생활이 끝나면 고향에서 비타민 성분이 많다고 알려져 있는 차차르강 농장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새벽이 다되어서 집 앞에서 그들과 헤어지면서 나는 늑대를 잡을 만큼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닌 것으로 판명 났지만, 몽골에 오기 전까지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과 교감과 우정을 나누는 것에 더없이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몽골의 광활한 대지나 위대한 역사보다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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