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4.19는 잊혀진 혁명인가
[전대열時論] 4.19는 잊혀진 혁명인가
  • 전대열(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21.04.2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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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전대열(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세월이 빠르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서 살아왔지만 4.19혁명이 일어난 지 어느덧 61개성상이 흘렀다. 1960년 그때 나는 전북대 정치학과 3학년이었으니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다. 자유당 일인독재 체제에 저항하여 수많은 국민들과 언론이 12년 동안 싸워왔지만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학생이었다. 결과만 가지고 얘기한다면 모든 공로는 학생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저변에 깔린 반독재 기운은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이승만은 36년간의 지긋지긋한 일제 치하에서 해방을 맞이한 조국에 엄청난 기대를 받으며 편안하게 귀국했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도 맡았고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한다고 많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반면에 이역에서 동포들과의 갈등으로 분쟁의 소용돌이에 들기도 했었다. 특히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상해에서 활동해야 할 사람이 상해정부에 있지 않고 주로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임을 미루는 통에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탄핵을 당한 것은 독립운동가로서는 치명적인 불명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복을 이룬 조국에 화려하게 귀국했다. 미군정 하에 있던 조국에는 상해에서 풍찬노숙으로 고생하던 임시정부 요인들도 귀국하여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이승만과 쌍두마차를 형성했으나 조국은 미소 양국이 각각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을 점령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희생양이 되어 하나였던 나라가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비극을 잉태했다. 이때 김구는 북쪽의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벌여 통일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을 가졌으나 두 차례에 걸친 평양행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는 북핵 폐기를 목표로 북한과 협상을 해왔다. 게다가 미국의 트럼프와 김정은의 정상회담을 싱가포르, 판문점, 하노이까지 3차에 걸쳐 주선했으나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김구의 남북협상이 실패한 것이나 북핵 협상이 물 건너 간 것이나 공산독재자와의 협상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긴 듯해서 씁쓸하기만 하다.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고 정읍선언을 했으며 결국 남북은 미소군정3년을 마치고 각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부를 수립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김구는 암살되고 배후에 이승만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나 안두희는 죽을 때까지 진상을 밝히지 않았다. 한민당은 이승만을 추대하여 대통령을 만들었지만 토사구팽으로 쫓겨나고 새로이 자유당이 탄생하여 여당이 되었다. 이승만정부에는 몇몇 독립운동가들도 참여했지만 친일분자를 포함한 철저히 이승만 개인추종세력이 포진했다. 그들의 장점은 아첨과 아부다. 노쇠한 대통령을 둘러싸고 입에 발린 달콤한 말만 듣게 된 이승만은 집권2년 만에 터진 6.25를 기화로 정권안보에만 모든 것을 바쳤다.

헌병을 동원한 정치파동과 연이은 3선 개헌 사사오입개헌 등 종잡기 어려운 정치행보는 사실상 전국을 경찰 국가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거는 돈과 막걸리 고무신으로 매수가 판쳤고 경찰과 공무원이 총동원된 야무진 관권선거로 일관했다. 게다가 신익희와 조병옥은 대선을 코앞에 두고 죽음을 맞이하는 통에 국민의 한풀이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불운까지 겹쳤다.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에 신물이 난 국민들의 분노는 끓어오를 대로 끓어올랐다. 때마침 3.15선거의 부정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면서 2.28대구, 3.8대전. 3.15마산시위가 불붙었고 4.4전북대와 4.18고대시위가 감행되어 전국을 격동시키는 활화산이 되었으며 4.25교수데모가 결정타를 때렸다.

4.19혁명이다. 전국에서 186명의 희생자가 나오며 이승만은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여 죽은 후에야 귀국한다. 외국에서도 보기 드문 학생혁명이 올해로 61주년이 되는데 작년부터 코로나19로 기념식은 축소되어 100명도 못되는 사람만 참석했다. 대통령은 새벽에 혼자서 참배하고 떠났다. 혼밥을 즐겨서일까. 그런데 모든 매스컴이 4.19혁명 61주년 기념식을 사실상 외면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으로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대혁명과 비견되는 4.19학생혁명이 이처럼 홀대 받아야 할 이유라도 따로 있는가.

4.19혁명은 국경일로 대우 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혁명기념일은 국경일이다. 유독 한국에서만 인색한 것은 고사하고라도 다른 기념식도 생중계를 남발하는 방송국들이 하나같이 조각뉴스로 취급한 것은 4.19혁명에 대한 모독이다. 신문들도 사설이나 칼럼에 인색했으니 모두 담합(談合)이라도 했단 말인가. 국가보훈처에서도 혁명 참여 학생들의 공로자 추가신청을 공고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4.19를 이렇게 대접하는 것은 정부와 국민의 도리가 아니다. 자유 민주 정의. 4.19혁명정신을 가슴 아프게 조용히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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