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망국으로 몰고 간 시부와 며느리 정쟁(政争)-1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망국으로 몰고 간 시부와 며느리 정쟁(政争)-1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5.21 14: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양주 홍릉(洪陵) 이조왕릉 탐방-1편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로 352-1에 위치한 홍릉(洪陵)과 유릉(裕陵) 입구이다. 1970년 5월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됐다.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과 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1851~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유릉은 조선 제27대 왕 순종(純宗·1874년 3월25일(음력 2월8일) ~ 1926년 4월25일)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순종은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자 한국사의 마지막 황제이다.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로 352-1에 위치한 홍릉(洪陵)과 유릉(裕陵) 입구이다. 1970년 5월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됐다.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과 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1851~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유릉은 조선 제27대 왕 순종(純宗·1874년 3월25일(음력 2월8일) ~ 1926년 4월25일)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순종은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자 한국사의 마지막 황제이다.

홍릉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능이다. 홍릉은 기존 조선왕릉의 형식과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하고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하여 개혁한 형식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했다. 기존의 능침공간에 있던 석물(석양, 석호, 문무석인)들은 제향공간 앞으로 배치하고, 종류와 개수를 늘렸다. 제향공간에는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침전을 세우고, 안에는 당가를 설치했다. 침전 앞에는 문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태석, 낙타석, 석마의 순으로 석물을 배치했다. 기존의 조선왕릉과 달리 향로(香路)가 가운데에 깔려 있고, 판위는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에 놓여 있다. 그 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예감, 어정 등이 능역 안팎으로 배치됐고 능역 옆에는 재실이 있다.

능의 역사​

1895년(고종 32)에 명성태황후 민씨는 일본에 의해 시해된 후(을미사변) 시신이 궁궐 밖에서 소각됐다. 이후 일본의 압박으로 폐서인됐다가 다시 복위되고, 동구릉 내 숭릉 근처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산릉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고종이 아관파천 하자 산릉공사가 중단됐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새로 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청량리 홍릉에는 기존의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설치했다. 그러나 1900년에 홍릉의 불길론이 주장되어 현재의 남양주 금곡 홍릉에 새로운 산릉공사를 시작했으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공사가 또다시 중단됐다. 그 후 고종이 1919년에 세상을 떠나자 중단됐던 금곡의 홍릉자리를 다시 공사하여, 명성태황후를 먼저 천장한 후 고종을 합장하여 능을 조성했다.

홍릉 연지는 고종황제가 홍릉을 새로 조성할 때 작은 연못을 연지로 크게 확장하며 천원지방·天圆地方(밖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이고 안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일반적인 조선 왕릉의 방형원지가 아닌 원형의 원지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홍릉 연지는 고종황제가 홍릉을 새로 조성할 때 작은 연못을 연지로 크게 확장하며 천원지방·天圆地方(밖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이고 안은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일반적인 조선 왕릉의 방형원지가 아닌 원형의 원지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이야기

고종태황제(재세: 1852년 음력 7월25일~1919년 양력 1월21일, 왕재위: 1863년 음력 12월13일~1897년 양력 10월11일, 황제위: 1897년 양력 10월12일~1907년 양력 7월19일)는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과 여흥부대부인(순목대원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52년(철종 3)에 청니방 사저(운현궁)에서 태어났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익황후 조씨가 양자로 삼아 익종(문조)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하여, 익성군에 봉해지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올랐다.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신정익황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그 후 최익현의 상소로 인해 대원군이 하야하고 1873년(고종 10)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재위기간 동안에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고, 군제를 개혁하고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산릉제례를 주관하는 제관이 머무는 공간인 재방. 앞면 7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기존 왕릉 재실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산릉제례를 주관하는 제관이 머무는 공간인 재방. 앞면 7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기존 왕릉 재실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다.

하지만 친정선포 후 민씨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94년(고종 31)에는 농민혁명이 발발했으며 갑오개혁을 실시했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을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파천을 단행하기도 했으며, 1897년에는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내세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에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1907년에 일제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를 빌미로 일본과 친일 대신의 강요로 1907년에 강제 퇴위됐다. 그 후 1919년에 덕수궁(경운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이야기

​명성태황후 민씨(재세: 1851년 음력 9월25일~1895년 음력 8월20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한창부부인 이씨의 딸로 1851년(철종 2)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6년(고종 3)에 고종의 사친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로 책봉됐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친정일가가 실권을 장악했다. 쇄국정책에 맞서 일본과 수교하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생활을 했는데,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했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공사에 의해 1895년(고종 32)에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했다(을미사변).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에 맞서 명성황후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1894년 흥선대원군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주도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정자각이 아닌 침전에서 바라본 홍릉 전경. 황제 능의 효시이다.
정자각이 아닌 침전에서 바라본 홍릉 전경. 황제 능의 효시이다.

미우라는 1895년 10월2일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거액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고하고,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 계획을 10월8일 새벽으로 정했다.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했다. 낭인들은 시신을 궁궐 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웠으며, 그 후 일본은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서인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불운한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는 곧바로 복위됐고,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됐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 (한신잠실코아)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1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