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64] 만주국 황제와 아마기산의 정사(情死)
[유주열의 동북아談說-64] 만주국 황제와 아마기산의 정사(情死)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5.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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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상징 후지산은 동북아시아의 가장 높은 산의 하나로 해발 3776m이다. 1000만년 전 후지산 근처는 바다였는데 필리핀해 플레이트가 북상하면서 근처의 섬이 육지와 충돌했다. 그 충격으로 화산이 폭발하여 후지산이 만들어지고 쏟아낸 화산재로 지금의 도쿄 중심의 관동 평야가 형성됐다고 한다. 육지와 충돌한 섬은 남으로 50km 길게 뻗어 나와 이즈반도가 됐다. 이즈(出)는 현지어로 돌출의 의미라고 한다.

이즈반도는 제주도보다 약간 작지만, 반도 중앙에 해발 1400m의 아마기산(天城山)이 동서로 가로질러 남북의 육로통행을 방해하는 난소(難所)가 되고 있다. 필자가 도쿄 대사관 근무 시 일본인 지인의 별장이 아마기산을 넘어 반도의 최남단 시모다(下田)에 있어 휴가철에 가족과 함께 며칠 지낸 적이 있다. 시모다항은 1854년 체결된 미일화친조약으로 개항된 항구로 1856년 타운젠드 해리스 미국 총영사가 이곳 옥천사라는 절에 최초의 주일 공관을 개설했다.

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아마기산은 일본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지명이라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의 배경으로 유명했고 1950년대에는 만주국 황제 아이신줘러 푸이(愛新覺羅 溥儀)의 동생 푸지제(溥傑)의 장녀 후이성(慧生)이 대학 2학년 때 남친과 동반 자살(心中)한 ‘아마기산 신쥬(天城山心中)’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화제가 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는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후에 베이징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청조의 멸망과 일본에 의한 만주국 건국 그리고 두 나라의 정략결혼 사실을 알게 되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됐다.

베이징의 자금성 북서쪽의 ‘사찰해’라는 호수 근처, 광서제의 친동생 순친왕(載澧)의 왕부에서 한 살 터울로 푸이와 푸지에 형제가 태어났다. 청조의 실권자 서태후는 유폐 중인 광서제가 1908년 11월14일 붕어하자 순친왕의 장남으로 아직 세 살이 되지 않은 푸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아버지 순친왕을 섭정왕으로 임명한 후 다음날 자신도 죽는다. 푸이는 보름 후 12월2일 이른바 ‘라스트 엠페러’(선통제)로 즉위했다.

1911년 10월10일 우창(武昌) 봉기를 시작으로 반청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청조정은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위안스카이를 총리대신과 호광총독에 긴급 임명하고 혁명군의 진압을 지시했다. 무술변법(1898년) 당시 서태후를 도와 광서제를 배신한 죄를 물어 신임 섭정왕에 의해 파직돼, 고향에서 연금 상태로 낚시를 하면서 3년을 기다리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이 기회를 이용 청황실에 대한 우대조건(자금성 계속 거주 등)을 전제로 푸이황제의 퇴위를 요구했다.

대세가 기울어지자 광서제의 황후였던 융유(隆裕) 황태후의 결단으로 황제 퇴위와 함께 청조는 멸망하고 공화국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중화민국의 총리와 중화제국의 황제가 됐던 위안스카이가 1916년 3월 사망하자 그의 부하 군벌들에 의한 국정농단으로 중국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 무렵 푸이는 자금성에서 한가하게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스턴을 가정교사로 채용 영어와 서양의 문물을 공부하고 있었다. 1924년 11월 군벌 펑위샹의 쿠데타로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는 16년 전 황제대관식에서 아버지 순친왕의 무릎 위에서 울면서 보채던 집으로 돌아갔다.

중국의 군벌들 사이에서 푸이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푸이를 업고 청조를 다시 일으키려는 복벽파와 푸이를 아예 제거해 복벽의 빌미를 없애려는 공화파에 의해 푸이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다. 존스턴은 영국과 일본 정부에 푸이의 비호를 요청했다. 영국은 내정간섭이라고 거절했으나 일본은 미래의 재화로 여겼다. 존스턴은 푸이를 자동차에 태워 순친왕부에서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으로 은밀히 피신시켰다.

푸이는 일본 공사관을 거쳐 텐진의 일본 조계지역에서 보호를 받았다. 일본 정부는 푸이의 요청으로 푸지에를 일본에 유학시킨다. 푸이는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건국과 함께 집정으로 취임했다가 1934년 3월 수도 신징(新京, 지금의 장춘)에서 만주국 황제(강덕제)로 즉위했다.

푸이와 일본 정부는 정략결혼을 추진해 1937년 푸지에를 메이지천황의 외가인 사가(嵯峨) 후작의 장녀 히로(浩)와 결혼시킨다. 1920년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영친왕)과 황족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가 장녀 마사코(方子)와의 정략결혼이 연상된다.

푸지에와 히로 부부 사이에 1938년 장녀 후이성(慧生)이, 그리고 2년 후 차녀 후성(嫮生)이 태어난다. 장녀는 교육 문제로 가족과 떨어져 도쿄의 외갓집에서 생활했다.

1945년 여름, 전황의 위급함을 인지한 푸이와 푸지에 형제는 가족과 함께 소련군의 공격을 피해 신징을 떠나 조선과의 국경 근처로 이동했다. 일본 정부가 푸이 형제를 구하기 위해 구원기 파송을 결정하자 푸이 형제는 우선 경비행기로 펑텐(지금의 셴양)으로 갔다. 펑텐공항에서 구원기를 기다리는 사이 소련 공병대의 선발대가 공항을 점령, 푸이 형제를 생포했다. 두 사람은 소련군에 의해 하바롭스크 수용소를 거쳐 랴오닝성 푸순 노동개조소에 이감됐다.

푸이와 푸지에 형제가 떠난 후 가족들은 육로로 한반도로 향하던 중 중국의 8로군에 붙잡혀 지린, 옌지 등으로 끌려다녔다. 아편 중독이 심한 황후 완룽은 도중에 목숨을 잃고 히로와 차녀 후성은 석방돼 랴오닝반도 후루다오(葫蘆島)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귀환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현지를 장악하고 있는 국민당 군에게 다시 붙잡혀 상하이로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 1947년 1월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히로는 부친 사가 후작이 경영하는 사립학원의 서예 교사로서 두 딸과 함께 생계를 이어나갔다.

푸이와 푸지에가 소련군에 체포됐다는 소식은 있었지만, 생사를 알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가족을 대표해 후이성이 중학교 때 배운 중국어로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에게 보냈다. 저우언라이는 푸지에의 소재를 파악해 이산가족의 서신 교류를 도와주고 후에 히로의 방중을 주선했다.

후이성은 중국어로 편지를 쓸 정도로 중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은 도쿄대학 중국 철학과를 희망했는데 집안의 권유로 할 수 없이 가쿠슈인(学習院)대학의 국문과로 진학했다. 가쿠슈인대학은 전쟁 전에는 귀족의 자제만 입학이 허가됐으나 전후 일반인도 다닐 수 있게 됐다.

1956년 후이성이 입학하자 클래스메이트로 다케미치(大久保武道) 군이 눈에 띄었다. 다케미치 군은 일본 혼슈의 최북단 아오모리 현의 태평양 연안의 도시 하치노헤(八戶)시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만주국에서 헌병으로 군복무를 했다. 다케미치 군은 개방적이면서 쾌활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후이성을 좋아했고 후이성도 우직하고 야성적인 다케미치 군을 마음에 들어했지만 가족은 반대했다.

특히 어머니 히로는 장녀가 중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면서 다케미치 군을 사귀는 데 거부감을 보였다. 가족의 반대가 예상외로 강하자 머뭇거리는 후이성에 대해 다케미치 군은 끈질기게 접근했다.

1957년 12월 다케미치 군은 무슨 결심이 섰는지 후이성을 데리고 이즈반도의 아마기산으로 갔다. 당일치기 원거리 데이트로 생각하고 따라간 후이성은 날이 저물어가는데 돌아갈 생각을 않고 택시를 잡아 산 정상으로 가자는 다케미치 군에게 늦기 전에 도쿄로 돌아가자고 졸랐다. 택시 운전사는 늦은 시간에 산 속 깊이 들어가는 젊은 남녀의 모습이 수상해 파출소에 신고했다.

4일 후 두 사람은 시체로 발견됐다. 아버지의 군 시절 사용하던 권총을 훔쳐낸 다케미치 군이 후이성을 먼저 쏘고 자신에게도 쏴 정사(情死)를 한 것이다. 사가 후작가에서는 “스토커 납치살인”이라고 주장했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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