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⑤] 카이로에서 제2의 기자 인생을 열다
[아프로⑤] 카이로에서 제2의 기자 인생을 열다
  • 한상용(연합뉴스TV 기자, 前 연합뉴스 카이로 특파원)
  • 승인 2021.05.2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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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북아프리카에 속하면서도 중동과 맞닿은 이집트는 두 대륙을 아우르는 중요한 거점 국가다. 이는 연합뉴스가 30년 가까이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지부를 둔 이유다. 하지만 카이로는 생활 환경이 거칠고 분쟁이 잦은 탓에 기자들이 파견 나가기를 상대적으로 꺼리는 지부이기도 하다. 한상용 기자는 2011년 사회부 사건팀에서 근무하던 중 카이로 특파원 자리를 제안 받았다.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타성이 생길 무렵이었던 만큼 덜컥 수락했다. 때마침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아랍의 봄’이 휘몰아치며 반정부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시리아와 리비아, 예멘 곳곳에서는 분쟁의 씨앗이 전쟁으로 번졌다. 한상용 기자는 분쟁 지역을 취재하는 일이 기자로서, 특파원으로서 경험하기 쉽지 않은 흔치 않은 기회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세계 외신 기자들과 경쟁하며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현장을 보고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무엇보다도 국제 이슈를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전달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 부쩍 성장했고 스스로 ‘제2의 기자 인생’을 열었다고 한다.

카이로, 그 강렬했던 첫인상

2011년 사회부 사건팀 중부라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매일 새벽에 출근한 경찰서에서 대기하다가 사건 사고가 접수되면 현장에 나가 취재했다. 연합뉴스는 통신사로서 그 어떤 언론사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많은 기사를 생산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늘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가장 늦게 철수하는 일이 반복됐다. 국내 언론사 중 가장 힘들다는 통신사에서도 가장 힘든 팀에 있다 보니 고달프기도 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기도 했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 사내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기자가 나 하나뿐이란 얘기도 들었다.

그 이유 때문인지 동일본 대지진 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일본에 파견되기도 했다. 한때 일본 특파원으로 나가는 일을 목표 삼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회사는 이집트 카이로 지부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카이로 특파원을 교체할 시점이 되어 사내에서 후임자를 찾기 위해 모집 공고를 냈는데 지원자도 없었는 터였다. 회사는 카이로 특파원 출신의 당시 사회부 부장에게 부서 내에서 후임자를 물색하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북아프리카와 중동은 ‘아랍의 봄’이라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다. 어차피 나가면 대규모 시위, 폭동, 테러 등의 사건 사고를 취재해야 하니 사건팀 기자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부장은 나를 포함한 사건팀 기자 여러 명에게 의사를 물었고, 그중 유일하게 내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미지의 세계’로만 상상하던 이집트였지만 나 혼자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카이로 특파원 제안을 받은 당일 전화로 넌지시 운을 띄우자 아내는 의외로 “재미있겠다. 지원해 봐.”라고 반응했다. 물론 아내는 그때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듯 했다.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게 다가온 ‘돌파구’에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그해 7월 카이로를 향했다. 가족은 그로부터 4개월 뒤 합류했다.

카다피 취재(2011)<br>
카다피 취재(2011)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던 7월의 어느 날. 카이로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비행기에서 내려 첫발을 디딘 카이로는 혼돈 그 자체였다. 공항 터미널 안에서 경찰들이 아무렇게나 담배를 태우는가 하면, 짐을 들어주겠다고 모여든 사람들로 정신이 산란했다. 겨우 전임자를 만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선도 신호등도 없는 도로를 차들이 경주하듯 내달렸다. 불현듯 이집트에서 교통사고로 매년 2만여 명이 목숨을 잃고 부상자는 셀 수 없다는 과거에 읽었던 기사가 머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숙소로 가는 길에 전복된 차량을 목격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짧지만 강렬했던 도시의 무질서한 분위기에 앞으로 3년을 잘 버틸 수 있을지 순간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취재 경험도 맛볼 수 있겠구나’란 상상을 하니 다시 마음이 들뜨고 가뿐해졌다. 전임자를 따라다니며 이국적인 도시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며 짜릿한 모험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점차 증폭됐다. 일주일간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전임자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환상이 걷히며 내 처지가 실감났다. 이집트대사관, 코이카, 코트라 직원, 한국 교민 등 취재원을 소개받기는 했으나 앞으로 나혼자 기사를 기획하고 취재하고 작성하려고 하니 막막함이 가슴을 조여 왔다.

사진 기자, 영상 취재기자도 없어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는 일 또한 온전히 내 몫이었다. 출국하기 전 약 3주간 국제부에서 근무했지만 북아프리카와 중동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무엇이 핵심 이슈로 부각했는지 파악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두 명 이상 체류하는 곳에만 특파원 사무실이 마련되는 터라 나 혼자 쓰는 사무실도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두바이 지부에 파견된 회사 선배가 있어 함께 상의하며 당장의 취재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다.

나는 특파원이다

첫 해외 파견 근무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던 8월 중순, 회사에서 급하게 지시가 내려왔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Tripoli)가 반군에 함락됐으니 빨리 가서 현장을 취재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회사에서도 알지 못했다. 리비아는 이집트와 국경을 맞닿은 이웃 국가이지만 당시 서방 국가의 공습이 매일 이어지는 여행 금지국가였다. 이집트대사관에 도움을 청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리비아 트리폴리 주재 한국대사관도 안전상 튀니지로 철수했다. 결국 차선책으로 리비아 정세에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카이로 주재 교민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운이 따랐다.

리비아 서쪽에 위치한 튀니지로 먼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후 육로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불어 카이로에 있는 한 유학생이 튀니지에 거주하는 또 다른 한국인 유학생을 연결해주어 그를 통해 현지인 가이드를 소개받았다. 튀니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를 만나 그의 차를 타고 무작정 국경을 향했다. 튀니지에서 리비아로 넘어가려면 비자가 필요했지만 회사에서 한시바삐 가라고 하니 일단 몸으로 부딪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 비자 없이 국경을 통과할 수 없었다. 나는 우선 국경에서 현지 분위기를 전하는 르포 기사를 쓰고 리비아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동시에 검문소를 거치지 않고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수소문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나름 수확을 얻었다.

남부 지역이 이미 무정부 상태여서 비자 없이도 들어갈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그 즉시 렌트한 차를 타고 남쪽을 향해 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남쪽 국경을 통과해 다시 트리폴리까지 올라가는 데 장장 8시간이 걸렸다. 흙먼지 날리는 사막을 달리며 비행편을 편도로 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사리 입성한 트리폴리는 유령 도시 같았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반군들은 자축의 의미로 어디서든 시시때때로 총을 쏘아 올렸다. 휑한 도심에서 총성만이 뚜렷하게 내 귓가를 울렸다. 먼저 기사를 송고할 수 있는 숙소를 찾아야 했다.

가장 안전하리라고 여긴 고급 호텔들은 이미 모든 방이 외신 기자나 반군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호텔 직원을 상대로 알음알음하여 빈 방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총을 찬 반군들이 들락거리는 묘한 분위기의 호텔까지 가게 됐다. 알고 보니 그곳은 무장 반군 대원들이 주요 거점으로 쓰는 호텔이었다. 승리에 도취된 반군들은 우리를 반겼지만, 무장한 그들이 언제 어떻게 태도를 바꿀지 몰라 내심 두렵기도 했다. 또 카다피 잔당 세력에 속하는 저격수가 여전히 도시 곳곳에 숨어 반군을 노리고 있다고 하니 시내를 돌아다닐 때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카다피 동생 무타심 취재
카다피 동생 무타심 취재

생존을 위한 식량도 문제였다. 혼돈의 도시에서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경에서 만나 함께 이동한 기자들끼리 챙겨온 초코바와 소시지와 같은 간식거리를 나눠 먹으며 버텨야 했다. 물도 아껴 마셔야 했다. 호텔에 물이 나오지 않아 샤워를 할 수 없을뿐더러 물이 내려가지 않는 화장실을 쓰는 일도 고역이었다. 잘 먹지도 씻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태로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를 함락한 리비아의 위태로운 정세를 알리는 르포와 인터뷰 기사를 쏟아냈다.

보름쯤 지나 도시가 점점 제 기능을 찾자 회사에서 복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제 마음껏 씻을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기뻐했다. 비자가 없어 돌아올 때도 남부 지역을 통과해 튀니지로 향해야 했다. 튀니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카이로로 돌아오니 보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지독한 여독을 풀고 서서히 일상에 적응할 무렵 이번엔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 카다피(Muammar Gaddafi)가 죽었다는 외신이 떴다며 다시 리비아로 가라는 지령을 받았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 곧바로 다음날 새벽 비행기를 타고 튀니지로 넘어간 후 무작정 국경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튀니지인 가이드가 리비아인 운전사를 섭외하여 셋이서 이동했다. 그런데 상황이 전보다 더 나쁘게 전개됐다. 국경 검문소에서 여권을 압수당한 채 3시간 넘게 조사를 받거나 마냥 대기를 해야 했다. 분쟁 지역에서 국제 미아가 되는 일은 정말 위험했기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비록 통행세 차원에서 300달러를 내긴 했지만 리비아인 운전사의 협상과 중재로 겨우 여권을 되찾아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트리폴리를 향하던 차에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일본인 기자가 카이로에서 리비아 동쪽으로 진입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의 내용이었다. 그는 카이로에서 함께 활동하며 식사도 함께 하고 친분을 쌓은 기자였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감상에 빠질 겨를이 없었다. 그저 내 머릿속에는 온통 한시라도 빨리 카다피의 시신을 확인해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써야 한다는 기자로서 특파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맴돌 뿐이었다.

카다피의 시신은 트리폴리에 있지 않았다. 그 도시에서 동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북부 도시 미스라타(Misrata)의 한 냉동 창고에 안치돼 있었다. 트리폴리에서 다시 차를 타고 지체 없이 미스라타로 이동했다. 창고 앞에는 취재진과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스라타 주민과 리비아에 사는 외지 사람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취재진이 서로 뒤엉켜 창고에 먼저 들어가 카다피의 시신을 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일대는 소란했다. 그리고 곧 그 소란은 몸싸움으로 번졌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중대한 국제적 사건을 놓고 국내 기자가 아닌 외신 기자들과 경쟁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더불어 42년 동안 리비아를 통치한 독재자의 참담한 말로를 보며 죽음 앞에서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지 느꼈다.

카다피의 시신을 사진에 담고 관련 기사를 쓰고 카이로로 무사귀환한 지 반년쯤 지났을 무렵, 이번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회사에서는 위험하다며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 출장 허가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나로선 카이로에서 친분을 쌓은 외신, 특히 일본 특파원들이 현장을 취재하러 가자지구로 향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이 타들어 갔다. 중동에 특파원까지 파견해 놓고 외신 기사를 인용하는 것이 모양새도 그렇거니와 중동 특파원으로서도 자존심이 다소 구겨지는 일이기도 했다.

기자로서 개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동시에 국내 언론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현장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오랫동안 외신을 통해 외국의 시선과 관점으로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점도 몇 안 되는 한국인 중동 특파원으로서 몹시 안타까웠다. 우리 문화와 실정에 맞게 국제 정세를 바라보고 이를 국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열망이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하여 회사를 설득하고 출장 정보를 수집한 뒤 이집트-가자지구 국경을 거쳐 ‘중동의 화약고’에 들어갔다. 그 뒤 이집트와 하마스의 관계가 악화하며 그 국경이 막혔으니 아마 내가 그 국경선을 넘은 거의 유일한 국내 기자로 남았을 것이다.

가자지구 국경선을 넘을 때 우연히 만난 독일인 기자와 택시 차량을 섭외해 가자지구 내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인 가자시티로 이동했다. 멀리서 미사일이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쿵’하는 굉음이 들렸고 이내 차가 흔들렸다. 가자 지구에는 한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은 물론 교민도 없어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도움을 청할 길이 없었다. 두려움과 긴장감이 서서히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회사에 가자지구에 진입했다고 보고를 하기 위해 전화를 했더니 이스라엘이 곧 지상군을 투입한다며 “당장 이집트로 되돌아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독일인 기자에게 이런 상황을 전했으나 그는 예정대로 가자지구 도심에 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차에서 내렸다.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또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급히 국경 검문소로 향했다. 사실 말이 택시지 속도계도 고장 나고 사이드미러도 없는 낡은 고물차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검문소는 이미 닫힌 후였다.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량한 국경지대 한복판에서 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운 좋게 택시 운전사를 발견하여 근처 마을에 하룻밤 머물 곳을 물었고, 그는 나를 적신월사로 데려갔다.

가자지구 폐허<br>
가자지구 폐허

이슬람권의 구호 단체인 적신월사의 건물에는 하마스 대원처럼 보이는 이들이 십여 명 있었다. 그들은 내가 스파이일 수 있다고 의심을 했는지 째려보듯 노려보거나 아랍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가능한 아랍어를 총동원하여 아니라고 겨우 설득했다. 100달러 정도 내고 적신월사 건물 꼭대기 층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게 됐지만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폭격에 건물이 수시로 흔들리고, 머리 위로 비행기와 드론이 날아가는 소리가 밤새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은 낮이어서 전화 통화를 통해 연합뉴스TV와 연결하여 현지 상황을 전하고, 르포 기사를 작성하며 어느 정도 걱정을 털어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회사의 지침대로 다시 카이로로 돌아가려던 찰나에 국제부 부장이 이왕 어렵게 가자지구에 들어간 김에 가자 시티(Gazah City)를 취재하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 가능성이 낮아진데다 가자지구가 그리 큰 땅이 아니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젯밤 적신월사로 데려다준 택시 기사와 만나 도심을 향했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도시는 혼돈 그 자체였지만, 곳곳이 폐허가 된 도심을 카메라에 담고 현지 주민, 하마스 대변인과 인터뷰하고 병원을 취재하는 등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슬슬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순간 운전기사가 자기 집에 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제안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납치 등의 범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지 지구 현지 주민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를 따라 집을 방문하여 가족들을 만나 일반 시민들이 하마스와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자 지구 사람들의 힘든 생활상을 마주하자 전쟁의 참상이 더 피부에 와 닿았다.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나는 카이로로 돌아와 촬영한 영상과 사진을 정리하고 르포 기사를 썼다.

뒤늦게 내가 당시 이스라엘-하마스 간 전쟁 때 가자지구에 들어간 유일한 한국인 기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최초’ ‘유일’ 등의 가치를 좇아 한 행동은 아니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분쟁 지역에 뛰어드는 외신 기자들을 쫓아 나도 들어갔을 뿐이다. 그때 쓴 르포 기사로 연말에 회사에서 ‘올해의 보도상’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고맙게도 국제부 부장이 나 모르게 신경을 써 주신 덕분이었다. 국내 미디어 관련 매체에서도 이메일 인터뷰와 함께 ‘가자지구 출장’에 대한 기고문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2년 뒤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에 더 큰 전쟁이 났을 때는 이집트 국경이 막혀 이스라엘을 통해 가자 지구로 넘어갔다. 그때 이스라엘 주재 한국대사관은 위험하다며 극구 말렸지만 나는 중동 특파원 본연의 업무로서 다시 가야한다고 했다. 물론 가자지구 내 연락할만한 사람을 확보한 뒤 추진한 일이었기에 나름 안전도 확보한 터였다. 하물며 브라질이나 칠레와 같은 남미 출신의 기자들도 가자 지구를 파고들어 취재하는 것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나는 혼자라도 그 틈에 껴 우리의 시각으로 국제적 사건을 바라보고 기사에 담고 싶었다.

최종 임기가 끝날 무렵, 분쟁과 내전이 뒤얽힌 시리아 현장 취재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리아에 가 본적 있는 다른 특파원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해 시리아 취재 경로를 알아본 뒤 회사에 문의도 해 봤으나 회사는 물론 외교부에서 위험하다며 회사를 압박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물론 자국민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국내 언론의 뒤쳐진 취재 역량을 높이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문제 아닐까. 카이로 주재 외신 기자들이 간혹 시리아로 출장을 가는 모습을 보면 외국 언론에 비해 우리나라 언론이 현장 취재보다는 안전에 더 신경을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어떤 자세로 다가갈 것인가

회사의 특파원 임기는 원래 3년이다. 나는 임기 2번에다 6개월을 더해 6년 반 동안 카이로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첫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회사에서 두 차례 모집 공고를 냈지만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도 아랍의 봄 이후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며 IS가 등장하는 등 다룰 소재가 많았다. 이 시기에 후임자가 온다면 그도 무척 바쁘면서도 혼란스러웠을 것 같았다. 그래서 회사의 상의 끝에 특파원 임기를 한번 연장키로 했다. 그렇다면 총 임기가 6년이어야 하건만, 6개월이 더 따라붙은 이유는 2번째 임기가 끝났을 때도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아 연장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나는 두 번째 임기를 맞으며 아랍 국가를 좀 더 깊이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중동의 역사와 정치, 분쟁, 국제관계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연속이었다.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IS로 관심이 이어졌다. 국내에 출간된 IS 관련 책들을 구해 모두 읽었다. 무척 아쉬웠다. 대부분 번역서이거나 이슬람 혹은 중동 역사를 주로 다루며 IS 관련 내용을 살짝 덧붙인 수준이었다. 그 내용 또한 외신의 기사나 자료를 재구성한 정도였고. 나는 이렇듯 중차대한 국제 이슈를 다른 사람의 시각에 기대지 않고 우리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책 한 권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장에 파견된 특파원으로서 사명감을 느낀 나는 당시 국가경영연구원 객원 연구원이던 최재훈 씨와 힘을 모아 IS 심층 연구 서적 <IS는 왜?>를 출간했다. 책을 낸 후 주변 반응을 통해 비슷한 갈증을 느낀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세종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아내는 카이로에 소재한 명문대 아인 샴스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자신만의 행로를 개척했다. 아내가 타지에서 자신이 원하는 길로 나아가도록 옆에서 북돋았기에 나도 6년 6개월 동안 무탈하게 내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카이로에 머물며 일만 한 건 아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가족들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그럼에도 이집트를 여행한 나날은 내 인생 최고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일주일간 이집트 남부 지역 여행이 가장 큰 감동이었다. 그중 나흘은 나일강 크루즈를 했는데, 소설 <람세스>의 저자 크리스티앙 자크(Christian Jacq) 가 남긴 ‘이집트를 발견한다는 것은 바로 나일강을 항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명언처럼 나는 나일강을 유람하며 이집트를 재발견했다. 작지만 호화스러운 크루즈 선은 신기하게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강을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갑판에 놓인 선베드에 누워 강바람을 맞으며 배가 끊임없이 스쳐 지나는 풍경을 바라봤다. 크고 작은 수변 식물 너머로 광활한 사막이 펼쳐지고, 그 이국적 풍경이 물릴 때쯤 이름 모를 유적이 등장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미지의 세계에 와 닿은 듯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특히 항로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아스완은 겨울에도 따뜻하여 주민들이 수영을 즐기고 어부들이 돛단배를 타고 나와 고기를 잡았다. 강바닥이 보일 정도의 투명한 나일강 물을 그대로 마시는 주민도 있었다. 반짝이는 수면에 비친 그들의 평화로운 모습은 내가 헤쳐 온 분쟁 지역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요즘도 일상의 시름을 잊고 싶을 때면 나일강 위를 미끄러지듯 항해한 순간을 떠올린다.

아프리카 수단 취재(2017)
아프리카 수단 취재(2017)

카이로는 전 세계에서 연합뉴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부 중 하나다. 워싱턴DC, 뉴욕, 베이징, 도쿄, 파리와 함께 연합뉴스 지부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중동과 아프리카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거점 도시인 까닭이다. 특히 아랍의 봄 이후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격변의 시대를 맞으며 카이로는 지부로서 가치가 더 높아졌다. 실제로 이곳을 거쳐 간 선배 기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자신이 카이로 특파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나 또한 카이로 특파원으로 활동한 시간을 통해 제2의 기자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식견과 사려를 가지고 나름대로 국제 정세를 관통하는 눈이 생겼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을 쌓기도 했다.

우리는 아프리카와 중동에 사실 관심이 적은 편이다. 물론 국내 사회가 워낙 급변하다 보니 그리고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해외, 그중에서도 국내에 영향력이 적은 아프리카나 중동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을 법도 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프리카, 중동이라고 하면 석유, 가스, 테러 등의 핵심어만 어렴풋이 떠올린다. 한정된 관점으로 이 지역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의 교역 상대나 정치,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수용해야 한다. 아프리카는 더 심각한 수준일 수 있다.

못사는 나라, 원조의 대상으로 국한하여 판단하고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전 세계가 아프리카 대륙이 지닌 잠재력을 논한다. 많은 나라들이 특히 중국만 보더라도 아프리카에 투자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의 관심과 노력은 여전히 미미하지만, 다행히도 유리한 출발점을 선점했다. 현지에서 국내 기업의 인상이 좋으며, 한류도 제법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러한 기류를 잘 활용하면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과 우호적인 정치, 외교, 경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 나는 카이로에서 특파원 활동하며 중동사를 몸소 체험, 공부하고 책까지 냈으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이 특별한 성취와 지금 그리고 미래의 경험을 잘 엮으면 언젠가 더 큰 미래를 그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카이로는 내게 정말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준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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