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④] 서울로 상경··· 신촌체육관에서 학생들 가르쳐
[현봉철 회고록④] 서울로 상경··· 신촌체육관에서 학생들 가르쳐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6.0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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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붐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 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쿠웨이트 건설현장

제주에서는 모든 사람이 나의 우승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에서는 드문 일이다 보니 신문에도 기사가 크게 실린 모양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촌 출신 소년이 도를 빛낸 기대주로 도약한 것이다. 집이 있는 시골에서도 김한석 이장을 비롯해 여러 유지들로부터 뜻하지 않게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제주도 차원에서 나를 키우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멀리서 소문을 듣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분들도 계셨다. 승리에 기쁨에 취해 며칠을 보내자 어느 교수님께서 연락이 왔다. K대학교 체육학과장과 가까이 지내는 M 교수님이었다. 그분은 내 우승 경력으로 K대학에 특채 장학생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그 당시 체육과가 있는 대학이 몇 군데 없었다.

나는 꿈에 부풀었다. 대학이란 자체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말이었는데 게다가 K대학 체육과에 진학할 길이 열린 것이다. 아이들을 끝까지 교육시키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어머니 마음에 남아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대학교에 간다면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운이 뒤따랐다. 때마침 아버지의 오랜 지우라는 성공한 재일교포 한 분이, 어머니 앞으로 있는 땅을 시세의 1.5배나 되는 값에 사겠노라고 제의하셨다. 나의 우승 소식을 듣고 기특하게 여겨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가 외가댁에서 물려받은 것 중 가장 값진 재산이 나의 미래를 위한 투자금으로 바뀌었다.

우승 상장과 그 외 서류를 K대에 보내고 나는 M교수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앞서 말한 재일교포인 안재호 선생님이 서울에 있는 지인의 회사에서 돈을 찾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셔서 그 일도 처리했다. 그뿐 아니라 지낼 곳을 찾을 때까지는 그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 댁에 신세까지 지게 되었다. 당시 받은 돈이 24만원이었다. 서울에서의 한 달 숙박비는 3천-4천원이었던 시절이다.

한국 태권도 사절단, 베트남 붕타우 운동장에서 태권도 시범[1966년, 사진=국가기록원]
한국 태권도 사절단, 베트남 붕타우 운동장에서 태권도 시범[1966년, 사진=국가기록원]

나는 대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니고 여러 곳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24만원으로 졸업할 때까지 4년을 지내겠다고 다짐을 몇 번이나 했다. 가족들은 아직 어렵게 농사에 몸이 매여 있는데 집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앞날을 계획하며 꿈을 눈앞에 펼쳐 나가고 있던 어느 날 M교수님이 실기전형 심사위원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해야 하겠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저녁식사 값이 어느 정도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지 여쭸더니, 2만원이란 답이 돌아왔다. 이 대답은 당시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학교 들어가기 위해 사적인 자리에서 식사를 대접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내가 짜둔 예산에도 큰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나의 실력으로 대학을 갈 수 있는데 이토록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서울에는 살아있는 사람도 눈 깜빡할 새 코를 베어 간다는 옛말도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으레 있던 일이려니 싶지만, 그때는 절대로 타협하도록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없었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렇게 하면서 손에 잡힐 것만 같았던 대학교 꿈도 물거품이 됐다. 이어서 쓰라린 좌절감이 뒤따랐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5일을 꼬박 누워 지냈다. 가족들 얼굴이며 기대를 심어주었던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며 제주도민들이 얼굴들이 스쳐 갔다. 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그것도 억울한 이유로 말이다. 나는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좌절감과 환멸과 수치심이 번갈아 나를 사로잡았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1960년대 신촌로타리 시계탑[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60년대 신촌로타리 시계탑[사진=서울역사박물관]

닷새째 되던 날 화장실에 가려는데 정말 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내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싶었다. 내 몸과 씨름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열망이 문득 솟았다. 길을 찾자. 무엇이든 하자. 이겨내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지나고 보니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마비된 것이었다. 마음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대학 졸업장을 쥐고 당당하게 어머니 앞에 나타나자.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가지고 있던 돈 22만원을 시골집으로 내려보냈다.

제주에는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감사한 분들을 뵐 낯이 서지 않았다. 내 힘으로 꿈을 이루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내 스스로 대학을 졸업하고 어머니 앞에 떳떳하게 서고 싶었다. 좌절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태권도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내 힘으로 대학을 가려고 의지를 갈았고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맸다.

용산 경찰서에 있는 도장을 찾았다. 체계가 전혀 잡혀있지 않아 선수로서 수련하기는 역부족인 곳이었다. 다시 서울역 뒤 정도관을 찾았다. 그때는 일반적으로 유단자는 어디에 가도 회비를 내지 않은 것이 예의며 관습이었다. 그러나 내게 회비를 요구했다. 그래서 다시 마포 종점에 갔다. 나를 환영하면서 숙박비며 생활비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장이 너무 협소하고 이곳 역시 훈련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아서 다시 이대입구 신촌체육관을 찾았다.

그곳의 고윤삼 관장님께 상황 설명을 하면서 말씀을 드렸더니 운동도 하고 아침에 학원도 갈 수 있도록 시간과 숙식을 보장해 주겠노라고 하는데 조금 부족한 면은 있으나 도장으로선 훌륭했다.

이곳을 종착역으로 삼고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기보다는 운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강습이 하루에 7부로 나뉘어 있는데 3부 정도를 지도하기로 했다. 그런데 금방 4부 5부까지 지도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나는 별다른 수없이 일이 주어지는 대로 했다.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 회원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현봉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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