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⑤] 대학 진학 꿈 남아 월남파병 지원해
[현봉철 회고록⑤] 대학 진학 꿈 남아 월남파병 지원해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6.1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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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붐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 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도장 운영엔 여러 유단자들의 협조가 관건인데 처음엔 협조적으로 대해주는가 싶더니 곧 제주 촌놈이 와서 도장을 장악한다느니 뒷말이 많아지면서 사람들 태도가 비협조적으로 변했다. 도장에는 규율이 있다. 대련(겨루기)으로 규율을 지킨다. 또는 선후배 관례로 규율을 지킨다.

3-5부를 지도하고 중간중간에 선의의 도전자들과 대련(겨루기)을 해야 했다. 텃세를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하루에 2-3명이 도전을 해 온다. 잘 단련된 체력으로 전국에서 우승까지 한 내게는 너무 쉬운 도전자들이다. 2개월은 그렇게 내 위치를 잘 유지했다. 하지만 석 달째가 되자 몸이 힘들어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신촌체육관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문제가 생겼다. 관원은 계속 늘어 가는데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부담이 내게 고스란히 더해지는 형국이었다. 도장은 후배들이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한 사람이 도맡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때 당시 여러 무도관이 있었는데 중앙관장끼리 이관은 할 수 없고 일시적으로 그곳에서 내가 지도하기로 각 중앙관과 협의된 것이었다.

운동에서 관에 몸담는 것은 말하자면 집안 조상을 모시는 것과 비슷하다. 그만큼 엄격하다. 그러다 보니 처음 기대와는 달리 공부할 시간도 마련할 수 없었다. 또 그때 수도대, 항공대, 숭문고 등 여러 학교 학생들을 지도했다. 운동은 잘하는 사람과 해야 하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만 있다 보니 기술이 늘지 않았다.

일은 갈수록 많아졌다. 신촌체육관이 을지로에 있는 한국체육관보다 태권도 인원이 많아진 것이 화제가 돼서 인터뷰도 여러 차례 했다.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중국영화 선우에 어린이 대역도 지원했다. 정보부 요원도 특별히 지도했다.

누가 보면 성공의 길로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알았을 테지만 나는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 대학교 진학이라는 꿈이 목에 걸린 생선 뼈처럼 계속 내 마음에 걸렸다. 허송세월만 하는 것 같았고 약속은 잊혀 있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윤삼 관장에게 항의성 반항을 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로 문짝을 찍으면서 울부짖으며 항변했다. 그곳 생활에 대해 회의감이 상당히 높아졌을 때였다.

쿠웨이트 대추야자나무

그리고는 얼마 후 나는 군에 입대했다. 입대 전에 아는 분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분은 내가 서울 가까운 직할부대로 배치받을 수 있도록 힘써주기로 했고, 나는 예비사단에서 훈련에 임했다.

ㄷ군에는 그때까지도 선수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군에 태권도를 직접 보급한 분이 최홍희 26사단장이다. 우리나라 태권 시작은 최홍희씨라고 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분의 관심과 노력으로 군대에서 체력과 시범을 중심으로 하는 태권도가 시작된 것이다. 섣불리 대련하면 쉽게 사고가 많이 나기 때문에 시범에 역점을 두었던 것 같다.

훈련이 끝났는데 서울지역 직할부대 배치라는 전보를 받지 못하고, 경기도 문혜리에 있는 8인치포대에 떨어졌다. 그곳에는 운동하던 분이 많이 있었다.

부대에서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부대장이 나를 특별히 별도 관리를 해 준 것이다. 혹자는 특혜를 받은 것이 어떻게 난관이 되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에는 군의 규율이 있는 법인데 남들과는 다른 대우를 버젓이 해주니 시선 따가운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령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주로 하는 것은 도수체조, 태권도, 총검술 등을 지도하는 것이다. 하루는 위에서 나를 외부로 출장을 보냈다. 다녀오니 전 병력이 중무장하고 단체 기합을 받고 있었다. 내가 기합에서 빠지도록 출장을 보냈던 것이다. 주변에서 나를 편하게 대할 리 없었고 그 속에서 내가 마음 편할 리도 없었다.

월남 파병에 대해 들려오던 얘기가 많은 무렵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월남 파병 지원을 결정했다. 대학 문턱의 꿈이 남아 있었기에, 월남에 다녀오면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사 한 분이 이병인 내게 조언을 주셨다. 며칠 전 태권도 사범 월남파병 차출이 있었는데 우리 부대에는 차출될 인원이 없는 것으로 보고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일러주었다. 그러니 인사계를 잘 접촉해 보라고 했다.

월남파병 환송식

나는 나의 강점을 발휘했다. 바로 내가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얘기하고 협력을 구하는 것이다. 진심은 통한다는 것이 내 믿음이었다. 인사계 찾아가 내 상황과 가고자 하는 길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여기는 군대다. 개인 사유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현 이병은 이 부대에서 필수 요원이다.” 파병은 안 된다는 답이었다. 대신 부대에서 전국체육대회 전 삼 개월 휴가를 줄 것이니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하라고 했다. 게다가 나만을 위한 자그마한 도장도 주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인지 부대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 특혜를 받는 셈이었다. 군대는 계급사회다. 이병은 일병 상병 병장 하사 식기도 닦아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특별대우를 받으니 일병 고참부터 시작해 상병들의 불만이 뒤 따른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며칠 후에 다시 인사계를 찾아가 더 간곡하게 부탁을 드렸다. 그 후 넉 달 만에 월남 파병 차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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