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3] 평양에서 만난 고등학교 선배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3] 평양에서 만난 고등학교 선배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6.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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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한국언론사 대표 평양 방문(2000년 8월)

지난 2000년이다. 대망의 21세기가 시작됐다. 그해 8월 김정일 위원장은 한국 언론사장단 전부를 초청했다. 직전인 6월에는 평양에서 2박 3일간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6.15 공동성명선언이 발표된 후였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성사 관련해, 현대그룹을 통해 김정일 해외 비자금계좌로 5억 달러를 제공한 사실로 무척 시끄러웠다. 결국 특검에 들어가고 현대그룹 정몽헌(48년 생) 사장이 회사사옥에서 투신자살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사건이었음을 기억한다.

당시 김정일로는 막대한 큰 공짜 돈이 생겨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파격적 아이디어로 대한민국 언론사 사장들 모두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한국 중앙지든, 지방지든 몽땅 싸잡아 1주일 동안 특별초청을 한 것이다. 숙소도 처음 고려호텔에서 외국귀빈용 고급초대소로 등급을 높여 환대했고, 김정일과 단체기념촬영도 했다.

김 위원장이 남쪽언론사장단을 초청할 때다. 먼저 동아일보가 첫 불참을 선언했고, 곧이어 조선일보가 뒤를 따랐다. 동아/조선 두 신문이 동참을 안 했다. 조금 있다가 연합뉴스와 전북일보 두 매체도 불참했다. 연합뉴스 경우 당시 회사비리 관련 건 내부사정으로 방북을 포기했고, 지방지 전북일보는 사장이 병원에 입원 중이라 불참했다고 전해졌다.

그 기사를 보고 ‘역시 전통의 동아/조선은 뭔가 다른 언론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일부 지방신문은 행여나 방북 초청명단에 자신 소속사 이름이 빠질세라 마음 급급해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북한 우표(2000년 김대중-김정일 평양 상봉)

당시 방북사장단은 한국신문협회(회장 최학래) 소속 31명, 방송협회(회장 박권상) 소속 19명 등 모두 50명이었다. 불참한 4개 언론사를 제외한 총 46명 사장단이 중국 베이징을 거쳐 북한을 다녀왔다. 서너 개월 뒤 12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초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남북정상회담 (6.15 공동선언)을 성사시킨 공로로 인해서다. 수상식 때는 900만 스웨덴 크로네 (약 11억원) 상금도 함께 탔다.

그해 가을 나는 평양에서 열린 제5차 세계청소년태권도대회를 취재했다. 당시 5번째 방북이었다. 그때 외조모 친척(조카)을 다시 만났다.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첫 만남을 가진 지 약 10년이 지났을 때다. 그동안 조카노인네는 많이 쇠약해졌고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강원도(북한) 산골에서만 살아와 변함없는 농부차림인상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별로 명랑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처음 북한을 한두 차례 방문할 때는 얼떨떨해 잘 몰랐다. 차츰 취재기회가 잦아져 북녘 땅을 밟으면서 느끼게 된 감회다. 평양을 벗어나 지방주민들을 스치면 씁쓰름한 기분이 들고, 그리 편한 마음이 아니었다. 꼭 외조모 친척 관련된 얘기만이 아니다.

평양에서 만났던 고 최건국 고교선배 (최덕신, 류미영부부 장남)가 한 말이 생각났다. “송 후배! 나는 8년 전에 끊었던 담배를 여기서 다시 피우게 됐네. 이곳(북한)에 오면 답답해져 절로 담배를 찾게 되지.” 그때는 그 얘기를 귓등으로 흘렸다. 현대판 이산가족이 된 최 선배의 복잡한 집안환경 탓으로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독일 거주 최 선배는 평양에 고위층 부모가 계시다. 그 때문에도 겸사겸사 자주 북한을 방문했다. 어머니 류미영 위원장은 2010년대 초반까지 북한서열 22위 (청우당 당수) 내외였다. 한때 그는 비즈니스를 위해 평양에 무역사무실을 둔 적이 있다. “선배님. 북한과 사업은 잘 돼 나가세요? 지속적인 수입이 들어오세요?”하고 물었다. “수입이 있든 없든 평양에 렌트한 사무실 경비도 매달 내야하고, 무역일이 쉽지 않아”라고 전했다.

“동창들과 연락은 됩니까. 삼성에 그냥 계셨다면 고교동기 이건희 회장이 계열사 사장 자리 하나는 만들어 줬을 텐데. (부모 월북사건으로) 중간에 회사(부장)를 그만두셨다니 아까워서요.” “그딴 얘기는 할 것 없고. 한국에는 못 들어가지만, 동창들과는 가끔 연락하지. 얼마 전에도 홍사덕(의원)과 통화했는데. 홍사덕이 알지?” “그 선배님이야 유명인사니 이름만 들었지요. 국회의원은 예전 춘천에서 이민섭 선배님(전 문화체육부장관)만 사무실에서 한번 뵌 적이 있지요. 그 선배님은 강원도 출신이에요.”

금강산 외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그 후 갑작스레 최 선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북한에 아직 어머니가 정정하실 때인데, 아들이 먼저 숨진 것이다. 독일에서 직접 최 선배부인이 전화로 알려줬다. 1년 후에는 선배부인 또한 하늘나라로 갔다. 최 선배와는 타계 시까지 교류를 20년 이상 지속됐다. LA에서 만나 미 서부관광도 함께 했고, 토론토에도 부부가 함께 온 적이 있다. 살아생전 최 선배와는 무슨 대화든 나눌 수 있는 통이 큰 인물이었다.

“북한에 자주 드나드시니 뭐 좀 아실 것 아니에요? 북한 미래의 어떤 흐름 같은 거. 제 눈엔 늘 마찬가지예요.” “그래. 북한은 언제나 똑같아. 앞으로도 절대 안 변해. 꼭대기에서 개방할 생각이 없는데, 뭐가 달라지겠어? 꼭대기에선 오직 군 관련만 관심 있지. 군대만 꽉 틀어잡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야. 김일성-김정일 칭호도 ‘최고 국방위원장’ 아닌가. 또 평양에도 잘사는 사람들이 꽤 있어. 그러나 그들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어? 지방 내려가면 주민들 생활모습 보잖아. 매양 그 타령이니 답답하지. 그들에게 무슨 큰 낙이 있겠어.”

최 선배뿐 아니라 나는 고교선배들로부터 도움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강원일보에서 92년 모스크바로 발령 났을 때 주돈식(1937년생) 고교선배가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다. 그때 특파원활동 관련해 코치를 해 줬다. 주 선배는 93년 김영삼 대통령 방러 시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으로 모스크바에서 재상봉한 기억이 난다. 어느 필요한 시점에 선배 동문들이 포진돼 있어 도움을 줬다. 홀로 상주하던 초대 모스크바특파원시절도 러시아한국대사관에도 두 명 고교동문이 근무해 외로움과 스트레스 해소 등에 위안이 됐다. 숫자가 많지 않은 우리 동문끼리는 모교(서울 사대부고)를 ‘천하부고’라고 곧잘 불렀다. 한때 천하부고 명성은 경기고교를 능가했다. 유치하고 낯 뜨거운 얘기지만 사실이고, 반세기도 훨씬 이전 일이다.

김정은 시대에 와서 수도 평양 도로와 건물 등이 현대화되고, 외형적 변모는 서구 이상 근사하게 변했다. 평양이 천지개벽됐다는 소리도 나왔다. 그렇다고 북한주민들 생활이 근본적으로 개선된 것이 아니다. ‘평양과 지방과의 큰 간격 차이’는 결코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없다. 그동안 평양과 시골과의 갭(gap)은 너무나 깊다. 그래서 진작 ‘평양은 북한이 아니다’라는 말이 예전부터 회자되는 것이 아닌가. 다만 김정은 정권이 시골 주민환경 개선에 신경을 쓴다는 소문도 들리니 사실이라면 다행이라고 본다.

또 옆으로 다른 내 스토리를 전한다. 해외교포기자들을 위한 참고 얘기다. 지난 1980년대 토론토 교포기자 때다. 교포사회에선 나를 곧잘 ‘마포’라고 부르는 지인들이 있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어느 날 모임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갔더니, 지인 두 명이 나를 보며 “아. ‘마포’가 이제 오시는 군”하며 낄낄대는 것이다. 알고 보니 ‘마누라가 포기한 남자’가 마포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실상은 마포였다.

송광호 캐나다 민간 우체국 운영

조그만 교포사회에서 신문 일을 한다고 실속 없이 뛰어다니니, 남들 눈엔 무슨 건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해외 어디든 열악한 교포신문사 재정으로 교포기자 환경은 대동소이하다. 교포기자 수입만으로는 가족생계를 꾸려가기 힘들다. 아마 한국지방신문들 또한 재정상황이 비슷할 것이라 본다. 1999년 2월 정식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사령장과 발령을 받았지만, 토론토에서 캐나다 연방정부 민간우체국을 따로 운영해야 했다. 모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다. 그때 사업자금으로 빌린 캐나다은행 40만 달러는 7년에 걸쳐 다 갚았다.

지난80년대 시절 한때는 신문사 (캐나다조선일보 발행·편집인)도 운영해봤지만, 직원봉급조차 제때 주기 힘들었다. 내겐 보장된 소득도 없었다. 이러니 밖에서 보기엔 ‘마포’ 소리가 나올만했다. 집안 살림은 아내의 캐나다직장 소득과 매달 어머니 노인연금을 보태 생활해 나가는 형편이었다. 겉으로는 교포신문 발행-편집인이나 실속이 없으니 그게 무슨 대단한 벼슬인가.

어머니는 주정부가 무료 제공해준 신축된 고급 노인아파트도 마다하고, 내 집에 함께 살며 두 자녀를 잘 키워주셨다. 어머니는 30여년 세월을 그렇게 함께 사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도움을 준 어머니에게 나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한 기억이 없다. 그렇게 불효였다. 어머니 덕분에 애들은 둘 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미국에 가서도 잘 산다. 중학생인 친손자는 졸업 때(코로나19 시작) 전교수석으로 미 트럼프 대통령상까지 수상했다.

생전 어머니는 내 2번째 방북에서 처음 북강원도 외조모 조카노인을 만난 사연을 전했더니 깜짝 놀라 “정말이냐, 그게 정말이냐”를 연발하셨다. 당시 평양 책임지도안내원 배려로 친척을 쉽게 찾은 사실이 지금도 믿기 어렵다. 그냥 행운이라고 하기엔 운명적인 무엇이 작용했던 듯싶다. 나는 외조모 조카노인을 가까운 친척으로 생각 안 해, 이산가족신청조차 안 했기 때문이다.

송광호 브리타니카 상 수상

어머니는 나중 방북기회가 오면 북한노인가족에게 전해주라며, 연금을 쪼개 놓곤 하셨다. 당시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힘들 때다. 형편이 좋은 다른 형제들은 아무도 북쪽 노인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모두 외면하고 일전 한 푼 돕지 않았다. 이 일을 생각하면 친형제라도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

외조모는 해방 후 북에서 38선을 넘어와 평생을 우리 형제들을 돌봤다. 외동딸 어머니를 위해 마치 식모(가정부)처럼 일만하며 함께 살았다. 결국 북 고향으로는 영영 못 돌아가고, 서울에서 세상을 떠난 한 많은 노인네다. 이 얘기는 이만 그친다.

2000년이 되고 나서 벌써 20년이 지났다. 해외교포기자 위상이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언제나 힘든 일상 같아 보인다. 교포사회에서는 언론인이라고 존중해 주지 않는다. 누구든 너무나 쉽게 기자가 되고, 하루아침 언론인 행세를 한다. 내 눈엔 해외교포기자는 ‘빛 좋은 개살구’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회의 속에 젖어있던 어느 날 한국 특파원발령으로 모스크바로 떠나게 된 것이다.

비록 지방신문 5개 연합 공동특파원 직이나, 교포기자와 한국 특파원 차이는 위상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국에서 매달 내 봉급을 미화로 송금 받는 토론토의 아내는 신이 나 있었다. 오죽하면 전화로 “와! 매달 ‘계’ 타는 기분이네요. 모스크바에서 혼자 힘들겠지만, 거기 오래 좀 계세요.”라고 했을까.

얘기가 뒤죽박죽이다. 87년 한국 본사에서 조선일보를 들여오기 직전 스토리다. 그때 교포기자 일을 그만두고 잠깐 책 세일즈를 했다. 당시 어처구니없는 실수(빚보증)로 3만 달러 캐나다외환은행 빚을 졌기 때문이다. 그 시기 토론토에는 새로 일간지 동아일보가 출범했을 때다. 김상석 토론토 지사장(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창간한 김성수 씨 7남/김상만 회장 친동생)은 동아일보 후원을 위해 서울에서 각종 한국서적들을 엄청 들여와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었다.

미 시민권자인 김상석 사장은 나를 LA로 불렀다. 신문사 후원을 위한 한국서적 전집류 등 재고처리문제 때문이다. 나는 갑작스러운 빚 때문에 박봉의 교포기자직을 접고, 급한 마음에 영문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책 세일즈에 뛰어들 때다. 김 사장에게서 한국서적들을 모두 인계 받았다. 하지만 해외이민자들이 누가 그렇게 한국 책들에 관심을 가질 것일까.

2020년 8학년 송 Ryan

어쨌든 한국 책이고, 영문 책이고 많이 팔기만 하면 소위 장땡 아닌가. 오래전 이민 온 교포들에겐 주로 한국전집류를, 자녀를 가진 교포들에겐 영문백과사전을 권했다. 사실 거의 강제로 안기다시피 했다. 앵벌이가 따로 없었다. 약 1년8개월간 체면 가리지 않고 서적판매에 동분서주했다. 한국인, 외국인을 가리지 않았다. 교포기자생활을 통해 안면이 넓혀져 있는 점을 최대한 이용했다.

나중 지인들로부터 빈정대는 우스갯소리 등이 들려왔다. “송광호를 피해라. 그를 만나면 갑자기 집에 도서관이 만들어진다.” “송광호 때문에 지식인이 된 무식한 교포들이 많다.” “송광호는 에스키모 지역에서도 냉장고를 팔아먹을 녀석이다.”라는 등등 뒷소리다. 책을 많이 판매하다보니 나온 얘기다. 영문백과사전 경우 캐나다전국 판매실적 1위로 최고 세일즈맨 (The Willam Benton Award/The Rep. of the Year)상도 수상했다. 당시 단순히 책장사만으로 빚 전부를 갚았다. 주택도 큰 집으로 옮겨, 오늘까지 만33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때는 정말 얼굴을 두껍게 하고 다녔다. 뜻하지 않은 빚 발생으로 내 코가 석자가 됐는데, 무엇을 가리고 따지겠나. 1980년대 3만 달러 부채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정말 다행인 점은 당시는 세계경제 호경기 시절이라, 대부분 교포생활 역시 여유가 있었다는 점이다. 전두환 정권 시기였다.

지난 1987년 2월, 책 판매를 그만두고 기자생활로 돌아왔다. 한국본사에서 조선일보를 들여와 신문사(조선일보) 등록으로 코리아타운의 레빈(Levine)이라는 변호사를 만날 때였다. 그는 유태인으로 평소 잘 아는 처지다.

“Mr. 송. 이미 한인신문들이 많은데 또 신문을 만드네요. 신문사 비즈니스가 되겠어요? 코리안 커뮤니티는 작은데, 왜 그리 한인신문들이 많아요? 코리언은 저널리스트를 무척 존경하는 모양이지요?”하고 묻는다.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요. 내겐 신문사 일이 맞는 것 같아서··· 변호사 비(회사등록)나 적게 청구해줘요”하고 얼버 무렸다.

당시 한인 교포신문은 10여개로 일간지만 2개 (한국/동아일보)였다. 다른 소수민족신문보다 몇 배로 많았다. 인구가 엄청 많은 중국교포신문은 일간지 2개였고, 일본교포 신문은 주간지 ‘니까 타임스’(Nikka Times)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캐나다소수민족 내용을 잘 아는 외국인 눈에는 이해를 못 할 수밖에.

송광호 브리타니카 캐나다 1위

그러다 어느 순간 교포신문 하나가 없어지면 곧 다른 하나가 생겨난다. 급기야 일간지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이어 중앙일보가 새로 등장했다. 캐나다 조선일보는 주간지였으나 운영이 무척 힘들었다. 혼자 기사 쓰고, 편집, 취재, 광고 등등 모든 역할을 해야 하니 쉴 틈이란 없었다. 골프는 40여 년 동안 단 한번 쳐 본적이 없다. 골프에 손 안 대니 주위 친구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나중 보니 지인들 중 골프 프로선생(프로교습)만 여러 명이 돼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무슨 구기 운동이든 잘했다. 신문사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주말(토/일요일)에도 한인교회들과 한국인 식품점에 신문 배달을 해야 했기에, 좀처럼 시간 내기가 힘들었다.

훗날 경험했던 일이다. 2000년대 초반인가보다. 새벽 6시경 인천공항에서 일본 도쿄로 가려할 때다. 지나던 한 젊은 여성이 “송 선생님!”하고 부른다. 예전 토론토 조선일보 창간 당시 경리 겸 광고디자이너로 근무했던 K였다. 그녀 역시 일본 후쿠오카로 나간다며 급히 달려가는 중이었다. 10여년 만이라 반가웠지만 서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핸드백에서 뭘 뒤지더니 명함과 함께 던지다시피 건네줬다. 1만원짜리 돈뭉치였다. 그땐 5만원 권이 나오기 이전이다. 그리곤 “시간이 전혀 없다”며 그대로 뛰어가 버렸다. 그 후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가 한 말만 머리에 남았다. “선생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본 적이 드물어요. 인사이니 받아주세요. 지금은 한국에서 일해요.”

지난 2002년 5월이다. 북한은 ‘아리랑 축전’ 행사로 세계각처에서 대규모 관광을 받아들였다. 그때 30여명의 토론토교포들이 단체로 북한을 다녀왔다. 당시 토론토 A는 평소 북한을 한번 가봤으면 하던 중 마침 관광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는 그때 느낀 방북소감을 글로 써서 내게 전해줬다. 오래전 일이나, 북한은 사회변화가 심한 나라가 아니니 참고를 바란다.

북한 지방 인민학교 학생들

(수기)

중국 심양(옛 이름 봉천/Shenyang)공항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화창한 날씨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북한 산야는 듣던 대로 헐벗은 모습이었다. 간단한 입국 수속 후 일제 닛산 대형버스를 타고 숙소 보통강호텔로 향하던 중 거대한 김일성동상이 세워진 만수대공원에 들러 일행대표가 헌화했다. 버스에 돌아온 후 안내원은 “경건한 수령 동지 동상 앞에서 너무 떠들고 웃는 등 경박스럽게 행동했다.”는 주의를 들었다.

호텔음식은 기대이상으로 좋았다. 흰 쌀밥, 두부조림, 생선구이, 무국, 포기김치 등 별미였다. 아리랑축제기간에는 밤 12시까지 야시장을 연다. 첫날밤이라 눈여겨보기만 했다. 일부 관광객은 조개구이, 빈대떡 등을 안주로 평양소주에 흠뻑 취하고 있었다. 다음날 시차관계로 일찍 깼다. 오전 5시쯤 호텔 주변을 산책하다가 나물 캐는 40대 아주머니를 만났다. “무엇을 캐느냐”고 물으니 “쑥이요.”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안내원 없이 다니지 말라는 말이 생각나 곧 호텔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는 평소 우리 음식과 다름이 없었다. 이면수 조림, 국, 계란 후라이, 우유와 커피도 나왔다. 아침 8시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으로 갔다. 일요일 아침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입구에 몰려 있었다. 점심은 옥류관에서 순모밀로 된 평양냉면과 빈대떡을 먹었다. 개성에 가서는 한 관광객이 상점에서 4백 달러 부르는 공예품을 2백 달러밖에 없다 하니, 그 값으로 흥정이 됐다.

이번 관광목적인 아리랑축전은 요금이 40달러, 60달러, 100달러 등 가격에 따라 자리가 구분됐다. 카드섹션을 시작으로 축전이 시작됐다. 기가 막히게 잘했다. 특히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함께하는 종합 마스게임(집단체조)은 세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10만 명이 펼치는 화려함과 웅장함에는 누구든 놀라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과연 이 거창한 행사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축제인가 하는 상념에 빠져, 생각이 복잡해 졌다.

묘향산으로 가서 국제친선전람관을 구경했다. 전람관 주위엔 군인들 경계가 삼엄했다. 안내원은 ‘군인들과 사진을 찍거나 말을 걸지 말라’고 특별 주의를 줬다. 보현사 대웅전에서 부처님에게 큰절을 올리며, 속히 통일이 오기를 기원했다.

전람관 내부에는 지미 카터 부부가 기증한 미화20달러정도 유리그릇이 있고, 금송아지로부터 각종 진기한 명품 및 그림들이 진열돼 있었다. 선진국일수록 값싸 보이는 평범한 선물이고, 후진국일수록 값이 올라가고 있었다. 김정일 전람관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남한 재벌들의 선물이 놓여 있고, 현대 정주영회장이 기증한 다이너스티 승용차도 전시돼 있었다.

평양에 돌아와 공중곡예(서커스/교예)단 구경을 했다. 역시 곡예기술이 세계적 수준이었다. 평양에서 우연히 만난 5-6세 어린이 등과 사진을 찍을 때다. 어린이 얼굴이 내내 무표정이라 안타깝게 생각됐다. 떠나기 전날 한 번 더 야시장으로 가서 평양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야시장 상인들은 호객행위가 없고, 계산이 어두워 보였다.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할 때다. 청구된 전화요금에 깜짝 놀랐다. 토론토 전화통화 3번(25분)에 미화 150달러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리랑축전 행사 후 안내원들에게 팁(1인당 10달러, 33명)을 전했을 때도, 누구 한명 고맙다는 인사가 없었다. 북한주민과는 언어뿐이 아니라, 의식수준도 비슷해져야 통일이 이루어지겠다고 느꼈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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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권 2021-06-27 23:37:18
LA교포 유산을 전달하신 글을 우연히 읽고 흥미가 생겨서 1편부터 전부 읽고있습니다~ 32편을 읽고 33편이 언제나오나 기다리고 있었네요~ 34편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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