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기] 청년 윤봉길과 꽃같은 일본 가나자와 사람들
[방문기] 청년 윤봉길과 꽃같은 일본 가나자와 사람들
  • 최토출 (사)푸른한국 이사장
  • 승인 2011.07.0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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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토출 (사)푸른한국 이사장

윤봉길의사 유해발굴단 이건우선생(좌)과 필자
일본 가나자와 방문기-오래전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나는 여러가지 강한 인상을 받았다. 공항에 내려 목적지까지 가면서 펼쳐진 농촌풍경이 한편의 수채화 같았다. 농촌마을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작은 동산은 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잘 가꾸어져 마치 정원 같았다.

그후 여러곳을 다니면서 받은 인상은 전국토의 공원화가 아니라 전국토의 정원화가 되어 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후 알게된 사실이지만 세계 산림조성으로 성공한 4대국가가 일본 · 독일 · 뉴질랜드 · 한국인데 그 중에서도 일본이 제일 앞서가는 나라였다. 요즘 한국 농촌을 가보면 우리나라 농촌도 내가 처음 일본 갔을 때 느꼈던 정도로 동네 동산은 숲이 많고 잘 가꾸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 당시 일본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목적지인 긴자 근처 사무실을 찾는데 쉽게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듬더듬 하는 일본말로 어떤 여고생에게 목적지를 물었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면서 신호등을 건너 한참 가서 내가 찾는 사무실 앞에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그때 받은 신선한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번 여행 때도 음식점에서 화장실을 물었더니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나를 안내해서 바깥에 있는 화장실 문앞에 까지 안내해 주었다. 일본의 국력이 이런데서 나오는 구나! 절정의 친절미에 참으로 느끼는 바가 많았다.

일본에 처음 갔다 온 다음 해 12월 중순경 조선호텔 옆 지하도에서 일본 여성 두분이 청진동에 있는 서울호텔에 묶고 있는데 길을 잃고 해매고 있었다. 그날은 영하 13도 내려가는 강추위인데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경에서 받은 고마움 때문에 강추위를 무릅쓰고 상당한 거리에 있는 청진동 서울호텔까지 길을 안내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일본인 특유의 절을 일곱 번이나 하지 않는가.

매헌 윤봉길 월진회 이우재 회장께서 윤봉길의사가 14년간이나 묻혀있던 가나자와 암장지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턱대고 따라나서기로 했다. 월진회에서 매년 윤봉길문화축제에 간다는 것이었다.
떠나기전 인간 윤봉길 연구(윤규상 저), 윤봉길의사 일대기(임중빈 저), 매헌 윤봉길(김학준 저) 등 평전 3권을 급히 구해 읽었다. 청년 윤봉길이 집을 떠나기전 丈夫出家生不還(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임)라는 글을 남겼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할때 청년 윤봉길이 상념에 사로잡혀 읊은 시 한편을 소개할까 한다.

목발이 시내 한 굽이 맑은 물로
수덕산 깊은 근원 샘솟는 물줄기여
내몸의 더러운 때 씻어버리고
천추를 흘러흘러 다함이 없으리
죽지 않고 구태여 오늘까지 살아왔는데
소리없이 통곡하는 이 사람들이여.

떠날 때 남긴 글과 이 시를 종합해 보면 청년 윤봉길은 나라와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로 확고하게 결심한 것을 살필수 있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들판에서 쓰러져 죽는 것도 위대한데 조국을 위해 미리 목숨을 버릴것을 결정한 것은 얼마나 위대하고 위대한가!

책을 다 읽고 난 후 마음이 너무 아팠다. 조국해방이고 독립이고 다 좋지만 피가 펄펄 끓는 청년이 24년 6개월만 살고 꽃다운 청춘을 버리다니! 애틋하고 애닯고 서러워 가슴이 아리고 찡하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내 마음 둘곳없어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한편으로는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무엇을 했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조국과 호국영령들 앞에 부끄럽기짝이 없었다.

가나자와에 도착하여 윤봉길 의사 매장지를 방문하여 정중하게 참배했다. 매장지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었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청년 윤봉길은 1932년 4월 26일 거사 후 상해 일본군 9사단 헌병대에 구금되어 있다가 오사카 육군 형무소로 이송된 후 거기서 1개월간 머물렀다.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그 이튿날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 교외 공병작업장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왜 일본까지 끌려와서 처형되었을까? 피살된 시라가와 대장의 9사단 군부대가 가나자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복차원에서 거기까지 끌고가서 처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청년 윤봉길을 처형한 후 일본 육군 공동묘지에 있는 쓰레기 하지장에 매장했다고 한다. 해방 후 윤봉길 의사 발굴단이 구성되어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다고 한다.

발굴단은 총 5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발굴본부장 서성민, 총지휘 박진섭, 현장책임자 박동조, 정보책임자 박성조로 짜여졌다고 한다. 암장지 위치를 확실하게 알 수 없어 그 당시 관리소 책임자 기무라 부부에게 물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잘 모른다고 잡아떼었다고 한다. 발굴단은 수소문 끝에 매장할 당시 근처의 스님이 독경을 하였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물어물어 야마마도 료도 여스님을 만나 위치를 확실하게 알수 있었다. 3일간의 어려운 작업 끝에 윤봉길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1946년 6월 30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 의사묘역에 안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발굴단 50명 중 모두 작고하고 두분만 생존하고 있었다. 한분은 매헌 윤봉길 월진회 일본 회장인 박현택씨의 부친인 박성조씨고 또 한분은 이건우 선생이시다. 이건우 선생은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가 우리 일행을 만나러 오셨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건우 선생의 발굴 할 때 현장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값진 성과는 발굴 생존자 이건우 선생을 만나 그 당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을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평생 잊을수 없는 행운이었고 가보로 오래 간직하고픈 기념촬영도 하였다.

암장지를 방문 하던날 그날 저녁 만창장에서 만난 일본인 몇분들을 나는 오랫동안 잊을수 없을것 같다. 후꾸리꾸대학 다무라 교수, 가나자와 시의원 모리씨, 그리고 칸자키 키요카씨 등이다.

다무라 교수는 후꾸리꾸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윤봉길 의사와 함께하는 모임>의 대표이기도 하다. 이 모임은 전부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회원이 40명 정도 된다고 한다. 다무라 교수는 윤봉길 추모사업을 하다가 대학에서 쫓겨나 낭인생활을 하다가 지루한 소송 끝에 복직하기도 했다. 여행 마지막날 공항에서 내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오랜 감옥생활을 한 이야기를 했을 때 주먹을 불끈 쥐고 한국 운동가를 부르기도 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평화세력의 한분이며 일본 양심세력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되었다.

모리 시의원은 매헌 윤봉길 월진회 일본지부 총무를 맡고 있다. 모리씨는 윤봉길의사 추모비를 건립하자고 가나자와 시의회에 발의했다가 동료들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동료의원들로부터 왕따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윤봉길의사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해서 뛰겠다고 했다. 모리 시의원에게 진심으로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칸자키 키요카씨는 중년 여성분인데 고향이 윤봉길의사에게 피살된 시라가와 요시노리 대장과 같은 에히메에 살고 있는 분이었다. 우리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윤봉길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무려 8시간 걸려 가나자와로 달려 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시라가와 대장과 같은 고향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8시간 걸려 달려오다니 정말 감격스러워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꽃보다 더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마침 내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윤봉길의사를 진심으로 사모하며 윤봉길의사의 평화운동을 알리는데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당당하고도 단호하게 말을 했다. 이런 분을 만나다니! 이번 여행은 정말 내평생에 두 번 다시 찾아올수 없는 빛나는 여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지면을 통해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윤봉길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매헌 윤봉길 월진회 박현택 일본 회장과 회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나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상념에 사로 잡혔다. 앞에서 언급한 일본인 세분처럼 일본의 양심세력과 평화세력은 꽃보다 더 아름다운데 일본의 군주주의 잔당들은 왜 반성할줄 모르는가. 일본이 아시아를 향해 진심으로 뼈저린 사과를 하면 한국과 일본이 얼마든지 가깝게 지낼수 있지 않은가. 독일을 보라. 독일 수상 브란트가 폴란드에 있는 유태인 전몰 추모비 앞에 엎드려 전 세계를 향해 사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미르켈 총리가 재작년 종전 기념일에 온 세계의 매스컴이 지켜보는 가운데 엎드려 사죄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일본은 아시아의 피해자들이 납득할만한 진정성 있는 반성을 한번도 하지 않는가. 일본의 잔혹한 소인배기질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가.

나는 평소 일본인은 왜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은지에 대한 깊은 의문을 갖고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며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안하는 몇가지 배경을 적어보고자 한다.

첫째 일본의 리더들은 아직도 1910년 체결한 한일병탄조약을 합법적이라고 우기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 때 한국이 받은 3억불은 배상금이 아니라 이웃나라가 독립하니 주는 독립 축하금이라고 우기고 있다. 진정한 사과는 커녕 천인공노할 노릇이다.

둘째 일본인의 철학적 사상에는 신불사상의 융합이 깔려있다. 두루뭉실 애매하게 덮어버리는 기질이 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리는 기독교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이러한 사상적 기조와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셋째 일본 집권세력은 대동아전쟁 전범들의 2세 3세로 승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진정한 사과는 자신들의 조상들이 전범임을 인정하며 모든 죄과를 뒤집어쓰는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발버둥치는 것이다.

넷째 한국을 비롯하여 주변국가들이 거의 친일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친일파 정권이 일본의 사죄를 강력히 요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섯째 경제대국 일본이 주변국가에 엄청난 원조를 했다는 것이다. 원조를 받는 나라가 어떻게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낼수 있는가.

끝으로 감동적인 여행에 동참하도록 해주신 월진회 이우재회장과 강희춘 사무총장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동행한 월진회 회원들에게 신의 가호와 행운이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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