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4]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4]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 승인 2021.07.1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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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이희아(몬트리얼 피아노 연습), 우갑선, 송광호
이희아(몬트리얼 피아노 연습), 우갑선, 송광호

지난 2006년 남짓해서다. 북녘땅에서 한번 피아노공연을 했으면, 갈망하던 남쪽의 한 장애인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남쪽에선 이미 유명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었고, 북녘 주민들에게도 그간 자신이 오래 연마해온 음악 솜씨를 선보이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국내연주시절 해외매니저라고 자처해, 바깥 세계에 이 장애인 피아니스트를 소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녀의 평양공연을 위해서도 내 나름 서너 군데 통로를 접촉했지만 허사였다. 북에서는 반응조차 없었다.

일찍 타계한 고 최홍희 태권도총재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었다면 북한태권도 행사 때라도 그녀 연주를 잠시 대중에게 보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최 총재는 평소 무도뿐 아니라 노래, 서예 등 예술부문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천재적 소질을 지닌 이 장애인 소녀의 평양 피아노 연주 소원을 외면하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최 총재의 다른 태권도 관련 얘기다. 지난 89년 평양축전 당시 15만 명 수용의 능라도경기장에 태권도의 출연시범계획은 당초 프로그램에 빠져 있었다. 그때 최 총재는 당시 고위급 중심인물이었던 김중린 당 중앙위 대남비서협조를 얻어, 축전 본 마당에 태권도 전체시범광경(첨부사진)을 집어넣은 것이다. 능라도경기장(5.1경기장)에서 펼친 수백 명 태권도사범들의 시범경기는 관중들에게 깊은 감명과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최 총재의 그러한 지난 사실을 알고, 또 평양축전 현장에 있었던 나는 불현듯 최 총재의 빈자리가 아쉽게 생각됐다.

이 장애인 피아니스트 연주는 힘든 일상으로 살아가는 북녘땅 주민들에게 좋은 본보기였다. 장애를 스스로 극복한 그녀는 누구에든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애인 소녀 얘기는 피아니스트 ‘이희아’ 양에 관한 스토리다. 그녀는 지난 85년 ‘선천성 사지기형 1급 장애인’으로 태어나 일명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세상에 불렸다.

이희아 장애인 소녀의 신기에 가까운 연주는 정말 놀라웠다. IQ는 낮았지만, EQ는 아주 뛰어났다. 악보도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늘 북한공연에 관심을 가진 가톨릭 신자로서 어떤 기회가 될 때마다 북측 장애인들을 도왔다. 북한 IOC 위원인 장웅 ITF(국제태권도연맹) 총재와 조선 가톨릭 협회(중앙위원회) 등을 통해 장애인 휠체어(북한 명 사륜차 250대)와 설탕 가루 5톤 등 상당액의 일상용품 등을 기증했다.

이희아 북녘어린이 돕기(콩우유지원사업) 포스터
이희아 북녘어린이 돕기(콩우유지원사업) 포스터

그 후 북한 나진선봉경제특구에 피아노가 한 대도 없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내게 3천달러를 보냈다. 그 돈을 토론토 큰빛교회(목사 임현수) 전종석 장로에게 전달해 피아노 준비를 부탁했다. 함북 청진이 고향인 80대 고령의 전 장로는 은퇴 후 중국 연길과 북한 나선(나진선봉)지구에 선교사로 파견돼 있었다. 전 장로는 즉시 중국에서 피아노를 구입해 현지 한 탁아소에 전달했다.

남쪽 ITF(국제태권도연맹) 총재 겸 대북사업가인 유완영 회장 역시 이희아 양 공연을 적극 도왔다. 서울에서 이희아 특별공연을 마련해 북한 장애인들을 위해 물심양면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

희아 양은 알려진 대로, 태어날 때부터 열 손가락 중 오직 네 손가락뿐이고, 양 무릎 아래엔 다리도 없다. 희아 관련해선 과거 TV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설명을 줄인다. 다만 그녀가 늘 북한연주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점, 북녘 장애인들에게 지속적 도움을 준 사실, 그러나 끝내 북한공연이 무산된 점 등을 밝힌다.

이제는 공연 시기를 놓쳤다. 북에서 그녀를 특별초청한다고 할지라도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다. 일부 신체기능(손가락)이 전성기처럼 역할을 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만난 10대 후반의 희아는 지금 36살이 됐다. 희아 양이 한창 활동할 당시 나는 잘못 생각을 했다. 그녀를 늘 건강한 일반인으로 착각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녀 피아노 연주는 언제든 한결같으리라 오판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속말로 ‘메뚜기도 한 철’인데, 그나마 네 손가락 등 신체가 건강할 때 코디네이터 역할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다. 그녀 건강상태를 제대로 파악도 못 했고, 바깥 세계(외국)에 소개할 때 신앙적 측면만 고려해, 초청자에게 너무 적은 연주비용만 요구했던 것이다.

이희아 피아니스트 국제코디 활동
이희아 피아니스트 국제코디 활동

변명이긴 하지만 당시 희아 양 초청을 시도할 시절엔 그녀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점도 있다. 해외초청자를 모색할 때 상대방에게 보다 큰 금액을 요구할 수 없었던 점이다.

내가 장애인 이희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극히 우연한 기회였다. 2000년대 초반 어느 해인가보다. 뉴욕 연회장에서 강원도민회취재를 위해 행사장에 들렀다가 이은경 전 MBC 아나운서를 만남으로 비롯됐다. 언론 선배인 그녀는 내게 한 장의 DVD를 주었다. 이희아 첫 앨범 DVD다. “꼭 이 장애인 소녀 피아노 연주(디스크)를 보고, 해외소개에 힘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은경 전 아나운서는 강원도 출신으로 장애인 방송국(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소리) 본부장이었다.

북미주 특파원 일과 틈틈이 캐나다 민간우체국 운영에 바쁜 일상을 보내던 나는 DVD검토 건은 뒤로 미뤄두고, 잊고 있었다. 그러다 수개월 후 미 애틀랜타 행사장에서 다시 이은경 본부장과 마주쳤다. 이 본부장과는 관련 없는 자리인데, 또 만나게 된 것이다. “아, 반가워요. 지난번 준 DVD 어떻게 한번 보셨나요?”하고 묻는데 무척 미안했다. “그간 많이 바빠 아직 못 봤어요. 이번엔 꼭 보고 연락드릴게요”하고 약속했다.

토론토 집으로 돌아오자 곧 DVD 영상을 보다가 절로 무릎을 쳤다. 그녀 연주는 해외 어디에 내놓아도 우선은 좋은 교육적 소재가 된다고 판단됐다. 대한민국의 한 장애인 소녀로 국가선양은 물론 거의 불가능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표상이 아닌가. 마침 재외동포언론행사로 인해 서울방문 기회에 희아 양에게 전화했다. 희아는 나를 상일동 그녀 집으로 데려가 재능을 보였다.

나는 음악을 잘 이해 못 해도, 어려운 클래식 곡(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악보도 없이 네 손가락만으로 신들리듯 (건반을) 두들겨대는 솜씨에 할 말을 잃었다. 대한민국 이 장애인 피아니스트 소녀의 해외 코디네이터 일을 한번 해 보자고 욕심을 냈다. 전문성은 없지만, 최선을 다하면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이었다. 무조건 ‘네 손가락 장애인 피아니스트’ 해외선전에 첫발을 디뎠다. 경험도 없는 아마추어의 무모한 시도였다.

태권도(평양축전) 시범광경
태권도(평양축전) 시범광경

지난 1990년대 초반 모스크바 특파원 당시 ‘자원봉사’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특파원 활동을 하는 한편 한국학교 학생들에게 1주일 한두 차례 한글과 상식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래도 남보다 특종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또 매주 월요일은 러시아에서 신문발행이 없는 날이라 외국도서관에 잠시 들러 한국과 북한 도서 분류를 도왔다.

당시 모스크바도서관 관련 얘기를 전한다. 모스크바 외국도서관에는 1950-60년대 발행된 수십 권의 북한 서적들이 꽂혀있었다. 1950년대 박헌영 북한재판기록(미제 간첩 판결) 책자를 비롯해 리순신 전집(홍기문 역), 소설 두만강(작가 이기영), 조기천, 김소월 시집 등 북한 초창기 서적이다. 누구 한 명 빌려다 본 흔적도 없었다. 도서관과 집(아파트) 사이 거리가 멀지 않아 틈만 나면 들렀다. 관심 있던 초창기 북한 서적들을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다.

하루는 여성도서관장이 나를 불렀다. 러시아 모든 도서관 직원은 모두 100% 여성으로 구성돼 있다. 한 동양인이 나타나 자주 들락거리니 눈에 익혔나 보다. “당신은 까레이스키(고려인)인가요? 부탁이 있어요. 언제 우리 도서관 한국(북한) 책 분류 좀 도와줄 수 있나요?”하고 물었다. “월요일은 잠깐 시간 낼 수 있어요. 근데 도서 분류는 할 줄 몰라요.” “그건 방법을 가르쳐줄 테니 그대로 따라 하면 돼요. 쉬워요. 그간 한국과 북한에서 보낸 책들이 많이 있는데, 한글을 몰라 그대로 쌓여 있어 그럽니다.”

매주 월요일 내 편리한 시간에 들러 약 2시간 정도 책 분류를 도왔다. 정리 못 했던 책들을 대부분 처리했다. 약 6개월 뒤 취재 일이 바빠져 그만둘 때다. 도서관장은 고마움을 표시하며 말했다. “Mr.송 책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디에 가면, 일반에게 공개 안 된 도서관이 있어요. 거기는 국가별로 폐기할 외서들이 많아요. 혹시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세요. 장소를 알려 드릴게요”라고 내 얼굴을 본다. “그래요? 아주 좋지요. 고맙습니다. 꼭 찾아 가볼게요.”라고 답했다. “그럼 미리 연락해 놓겠어요. 그런데 단 독일 서적만은 안됩니다. 독일 책은 전부 독일에 돌려주기로 미리 약속돼 있어요”라고 일러줬다.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그 도서관은 지하에 있었다. 거기서 뜻밖의 1950년대 북한 연감, 일본 고서 등을 발견했다. 폐기 직전의 책들이라 했으나 내겐 소중한 책들이었다. 외국 서적들도 1920년부터 40년대까지 오래된 각종 책자가 많았다. 마음 같아선 몽땅 들고 오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단지 외국도서관에 들러 조금 시간을 할애해 준 것뿐인데, 큰 결실로 내게 돌아온 것이다. 극히 조그마한 봉사의 뜻하지 않은 결과는 놀라웠다. 진정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 그대로이지 않은가.

얘기를 다시 희아 양으로 돌린다. 그녀의 해외연주초청을 위해 본격적인 이희아 선전에 나셨다. 현재도 그렇지만 강원도청으로부터 국제자문관(토론토)에 임명돼 있었다. 세계 각국 10여명 강원도자문관이나 해외거주 지인들에게 초청공연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다. 지난 2004년 3월 토론토 교포사회에서도 초청연주를 마련했다. 토론토, 몬트리올에서 시범공연을 가졌다, 그때 캐나다 주류 TV(토론토, 몬트리올)에도 잠깐 출연해 현지 주민에 대한민국 장애인 소녀의 감동적 연주를 선보였다.

해외공연의 초청문제는 간단치 않다. 피초청자 왕복항공료, 체재비, 공연 수고료 등 일체 비용을 감당하며 준비해야 한다. 초청자의 경비 절감을 위해 영국 등 장거리 국가초청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도우미조차 없었지만, 희아 양 모녀 두 명만 갔다. 일본 경우는 조총련계 재일교포 2세 음악인인 이철우 선생(재일 조선예술연구소장)에게 연락해 재일본 공연 일체를 맡겼다. 매년 도쿄를 비롯해 일본 도시 순회공연으로 한민족의 능력과 끈기를 소개해 큰 효과를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이철우 선생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는 1978년 북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뿌리는 경상도 대구이지만 일본 거주 무국적자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가 안병원 선생의 방북 초청에도 역할을 했고, 가수 김연자의 평양공연도 성사시킨 유명음악인이다. 일본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 지휘자 김홍재 씨는 그의 외조카이다.

안병원 선생은 토론토 북쪽 내 집 근처 콘도에 살았다. 안 선생은 서울 경복고교 음악 교사 등을 역임해 제자들이 많았다. 평소에 그 역시 한번 방북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지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북한 문화성에서 매년 4월 평양 봄 축전에 안병원 부부를 지난 2001년 4월 초청한 것이다. 이 얘기는 잠깐 뒤로 미루자.

안병원과 북 총리
안병원과 북 총리

희아는 어느 외국에서든 연주 하나에만 신경을 쏟았다. 유명 외국 관광명소라도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항공기는 늘 이코노믹 창가 좌석을 원했고, 호텔도 특실 아닌 일반실을 택했다. 이 때문에 초청자부담이 많이 줄었다고 들었다. 희아 양의 초창기 해외연주 관련해 DVD 등 자료우송은 ‘사색의 향기’ 문화원장인 공용철 사장이 스폰서였다.

희아 공연은 세계 가는 곳마다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동남아 초청공연을 성사시켰을 때 처음으로 나도 동행했다. 현지에서 공연 장소까지 짧은 거리지만 가끔 희아를 업고 가야 할 때가 있었다. 생각보다 엄청 무거웠다. 도우미가 필요했으나 누구에게 협조를 구할 상황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경우 3번 이상 앙코르 공연을 했다. 그리고도 계속 연락이 왔다. 두 번째 자카르타에서부터 라운용 기독교청년(74년생)을 매니저로 특정해, 그때부터 본격적인 국내외 활동 연주체계를 갖추었다. 그때는 이미 희아 양이 해외에 많이 알려져 홍콩, 대만 등등 지속적으로 초청연주 신청이 들어오던 때다.

지난 2005년 겨울 한국 MBC에서 한인사회가 아닌 외국인(캐나다 주민)만을 위한 희아연주 다큐 취재를 원했다. 그 프로그램을 협조하기로 선뜻 맡았다. 토론토에서 준비를 끝내자, 한국 TV촬영팀(윤미현 PD) 4명이 희아 모녀와 함께 우리 집으로 밀어닥쳤다. 부근의 안병원 선생도 궁금해 들렀다. 내 집에서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마침 그날은 희아 엄마 생일이었다.

당시 이 촬영을 위해 나이아가라 근교에 사는 제임스 담임목사를 소개받았다. 유서 깊은 한 캐나다인 교회에서 예배연주를 계획했다. 교인들은 전부 외국인들이다. 교회연주 전날 허리까지 눈이 쏟아져 내렸다. 눈 속을 헤치고 누가 교회에 올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다음날 70명 정도 교인들이 모여 무사히 촬영이 끝났다.

이희아 금상 DVD
이희아 금상 DVD

당시 토론토 초등교 교사로 있는 내 딸도 동원했다. 딸이 근무하는 유태인 교장 양해 아래 학생들을 강단에 모아놓고 피아노연주 등 학생환경으로 기획에 보탬을 줬다. 또 혹시나 해서 강원도 밴쿠버 자문관인 현지 변상호 목사에게 연락했다. MBC 팀이 귀국 도중 밴쿠버에 지날 때 밴쿠버에서도 외국인을 위한 연주프로젝트를 준비해 제공했다.

MBC 촬영 팀이 귀국한 뒤 일이다. 다음해 2006년 1월 제48회 뉴욕 필름 페스티벌(다큐) 대회 때다. 매년 열리는 뉴욕 필름 페스티벌 세계대 회행사는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대회다. 그때 세계 각국에서 출품된 1천여 편의 경쟁 작품들 중 MBC의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필름이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했다. 한국 다큐 작품으로서는 대한민국 최초로 수상한 MBC 촬영 팀의 값진 경사였다.

당시 나는 그런 ‘최고상 수상’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알게 됐다. 나중 기사를 찾아보니 수상자인 윤미현 PD는 “입사한 지 20년 만에 자신이 인정을 받게 돼 기쁘다”는 소감인사를 읽고 좀 씁쓸한 기분이 됐다. 물론 자신 능력과 촬영 팀의 탁월한 편집수준으로 최고 금상을 타게 된 것은 사실이겠다. 하지만 그 작품 탄생을 위해 적극 도와준 주변 사람들에겐 일언반구 전혀 언급이 없었다.

뒷전에서 묵묵히 무료봉사해준 사람들이다. 왜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조차 그리 인색한 것일까. 당시 누구든 장애인 희아를 위한 일이라 아낌없이 시간을 내고 열성으로 도운 것이다. 그에 편승한 MBC로선 영광의 최고 수상을 했으면 인사 연락을 하든지, 빈말이라도 옆에서 도움 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모스크바특파원 등 지난 언론활동 중에서도 이상하게 내겐 MBC 기자들만이 오만하고 뻔뻔한 기억뿐으로 남아있다.

희아는 지난해 6.15 남북선언 20주년 기념식 때 가벼운 피아노 연주 소식을 들었다. 10대 후반 소녀가 어느새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최근 라운용 매니저는 “이제 이희아는 완전 피아노공연을 접고, 피아노 보조기구도 폐기상태”라고 밝혔다. 지난 세월이 시나브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10여 년 전 희아 뉴욕 공연이 끝났을 때, 어느 목사가 슬며시 전해준 시가 문득 생각났다.

열 손가락 없다고/ 슬퍼하지 아니하고/ 남겨진 네 손가락 감사할 때/ 별빛에 감사할 때/ 햇빛주신 하나님께서/ 열 손가락으로도 할 수 없는/ 기쁨을 나누게 하셨다.
두 다리가 없다고/ 원망하지 아니하고/ 허벅지에 신을 신고 춤을 출 때/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세계 곳곳 밟는 곳마다/ 희망을 이야기하게 하셨다.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겉 사람의 장애 때문에/ 울지 아니하고/ 속사람의 생명으로 기뻐하며/ 겉 사람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들 때문에/ 전하여 줄 말 있게 하셨다.

안병원 선생 부부(북한 꽃전시장에서)
안병원 선생 부부(북한 꽃전시장에서)

잠깐 소개한 토론토의 안병원 작곡가 부부 방북 얘기로 글을 맺는다. 안 선생에 따르면 그는 북한 문화성에서 매년 4월 평양에서 열리는 ‘봄 축전 예술제’에 부부가 초청받았다고 한다. 나는 바로 전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남북한 음악회에서 안 선생에 대한 북한초청문제가 처음 거론됐다는 얘길 들었다. 그는 평소 소망하던 북한 방문을 앞두고, 마치 첫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무척 들떠 있었다.

“내가 말이요. 북한 봄 축전 공식행사에서 지휘봉을 들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 지휘를 하게 됐어요. 어때요?”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방북이 성사돼 뜻을 이루게 됐군요.” “그럼. 그래도 아직 북한에 갈 수 없는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아마 북한에 가서도 관광도 할 수 없는 심정이 될 것 같아.” “아무튼 잘됐어요. 평양은 누구든 한 번이라도 다녀와야 서로 이해가 쉬워요.”라고 답했다.

“나는 방북 기회에 무엇보다 북한 음악 수준을 파악하려고 해.” “근데 초청경비는 어디서 대나요?” “북한에서 항공료와 호텔 등 체재비 일체를 부담한다고 들었는데.” 이 말은 나는 믿지 않았다. 내 경험으론 북한에서 일반인을 위해 초청비용을 내준 예가 없다. 아마 주선을 한 일본(조)총련 측에서 후원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점은 중요치 않다. 안 선생은 북한에서 1주일 체류 후 캐나다로 돌아왔다. 얼마 후 그를 만나 모처럼 북한 다녀온 얘기를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방북 시 북한 공식 석상에서 지휘봉을 들지 못했다. 이유는 모른다. 그래도 안 선생은 별로 실망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대체로 만족해하는 듯싶었다. 그의 방북 소감을 정리해 간략히 전한다.

안병원선생
안병원선생

-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가의 방북소감 -

이번 첫 방북에서 인상적인 것은 4월 봄 축전이라, 주민들은 모두 꽃과 노래로 밀접해 있는 생활이었다. 무슨 음악이든 김일성 부자에 대한 찬양으로 일관됐으며, 그들의 통일 열기 또한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어디를 가나 김일성 부자와 통일에 대한 주제만이 일상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 안내원은 작곡가 출신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해줬다. 숙소도 고려호텔 큰 응접실이 달린 좋은 방을 배정해 주었다. 어디서든 사진을 맘대로 찍게 했으며, 행사 일정에 맞추지 않고 내 개인 원하는 대로 안내원과 함께 움직이게끔 배려를 해줬다.

안내원은 대중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지날 때마다 나를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가라고 소개했다. 그러면 주민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올리며 인사를 해 왔다. “너무 좋은 노래를 만드셨습니다,” “심금을 울린 노래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등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의 소원’ 노래를 <민족의 노래>라고 표현했다.

어쩐 셈인지 나는 봄 축전 공식행사에서 지휘봉을 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 섭섭함이 맘속에 있었다. 대신 평양소년궁전 안에서, 주체사상탑 앞거리와 봉수교회 등지 여러 장소, 길거리에서도 군중 앞에서 즉흥적으로 지휘를 했다. 사람들은 합창이 끝나고도 흩어지지 않고, 내가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박수를 계속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하철을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반기는 시민에게 노래를 아느냐고 했더니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이런 일들이 몇 번 되풀이 됐다. 가끔 사인(sign)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물어보니, 조총련 계 일본교포였다.

주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으로 인해, 축전 행사장에서 지휘를 못 한 섭섭함이 봄눈 녹듯이 사라져갔다. 나는 봄 축전에 참여한 다른 단체일행과는 달리 따로 움직였다. 개성(판문점)에 갔을 때였다. 인민군이 나를 불러 섬찟했다. 알고 보니 사진을 함께 찍자고 한다. 윤이상 음악당(연구소) 등도 참관했다. 북한에 1주일 체류하는 동안은 축전 특별기간이라 그런지 전력 사정이 아주 좋았다. 일체 절전 없이 거리에도 등이 밝혀져 있었다.

봄 축전이 끝나기 전 먼저 평양을 떠났다. 한편 나는 원래 가리는 음식이 많아 식사 걱정을 했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고 입맛에 맞아 다행이었다. 토론토에 돌아와 몇몇 교포에게 무심히 이런 얘기를 전하자, “벌써 북한에 물드셨군요.”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평양공항에 첫발을 디뎠을 때도 나를 맞은 문화성 간부 첫 인사가 “남조선 신문에서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남조선에서 오신 것 같군요.”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여러모로 말과 행동에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생각은 토론토로 귀국 후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남과 북의 깊은 골과 장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 슬픈 생각이 든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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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권 2021-07-13 20:47:10
34회 글도 재미있게 잘 읽어습니다~ 이희아 양을 위해서도 멋진 일을 해내셨네요~ 세월이 지나서 지금은 희아양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네요~ 21년도 지금의 이희아양을 응원합니다~!

모란봉 2021-09-12 01:37:34
북한 장애인 가야금 연주가 김명숙(교수/공훈예술가)
https://www.youtube.com/watch?v=5XgETzFhFYw

김송미(가수/조선장애인협회 이사)
https://www.youtube.com/watch?v=uBOxNUHDM1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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