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⑨] H건설 입사, 사우디아라비아 현장 배치
[현봉철 회고록⑨] H건설 입사, 사우디아라비아 현장 배치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7.1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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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 붐 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가 지난 4월 개최한 평화통일 글짓기 대회 상장 전수식. 사진 왼쪽 세번째가 현봉철 회장.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가 지난 4월 개최한 평화통일 글짓기 대회 상장 전수식. 사진 왼쪽 세번째가 현봉철 회장.

다른 한 길은 정보부에 입사해 해외로 파견되는 경우였다. 남산에 있는 정보부까지 가서 별 희한한 면접을 다 보았다. 선서도 했다.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올 수 있겠냐는 식의 질문도 받았다.

양쪽 길을 두고 망설일 때 외사촌 형을 만나서 조언을 구했다. 형은 정보부 일은 수명이 길지 못하니 H건설에 갈 수 있으면 그쪽 길을 택하라고 조언해 줬다. 조언을 받아들여 H건설 입사로 마음은 기울였으나 걱정은 던만큼 덧붙여졌다.

1978년도 10월경에 특채로 H건설에 조경기사로 면접을 봤다.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면접에 응했다. 나는 조직도 사회라는 세상도 모르는데 회사 조직은 더더욱 알 턱이 없었다. 운동 후배인 장시헌 씨가 면접 대비 요령을 알려주어 그 정도만 숙지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에 응했다. 요즘 말로 스펙으로 보자면 학벌도 없고 학교성적도 뒤에서 두 번째 아닌가? 최종학력도 체육전문학교이고 공부는 거의 하지 않으면서 겨우 졸업장을 받은 사람이 나였다. 조금 가산이 되는 점이 있다면 미국 연수 1년 과정과 연장 생활 1년 정도였다.

면접 중에 미국 생활과 정착 시도를 진솔하게 얘기했던 것 같다. 참으로 아름다운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젊음이 있기에 돌아왔다고 했다.

김광명 상무와 여러 심사위원에 면접을 받은 며칠 후에, 회사에 출근하라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기쁨도 있었고 대기업에 근무하게 된다는 막연한 긍지라 할까 형언하기 힘든 벅찬 느낌이 있었다.

쿠웨이트 건설현장

출근 버스로 첫 출근을 했다. 잠바며 책상이며 가장 기본적인 것을 배정받고 여직원이 각 부서를 다니면서 인사를 시키는데 쑥스러워 얼굴을 매우 붉혔던 것 같다.

내가 속한 팀에서 하는 일은 해외 견적실에서 해외에서 들어오는 프로젝트 견적을 내는 것이었다. 근무는 복사나 하고 상사들이 시킨 심부름을 했다. 어깨너머로 어떻게 견적을 하는지 눈여겨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견적에 쓰이는 여러 가지 양식이며 용어가 낯설기만 했다.

우선 영어로 된 스펙(상세 시방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2년 생활은 했지만 건설 용어로 점철된 영문 스펙은 단 10%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은 내 영어 실력은 지금의 초등학생 실력도 안 됐을 것이다.

근무 한 달이 지나자 고통과 부담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하루하루가 고단해졌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답보상태에 놓여있는 것 같아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일부 서류를 몰래 카피해서 집에 가져와 공부도 했지만 쉽게 자신이 서지 않았다.

커다란 기계처럼 인력 망이 치밀하게 짜여 돌아가는 회사에서 내 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됐다. 하지만 결국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든 이겨내자. 최선을 다하자.

먼저 집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방을 따로 쓰자고 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서류를 몰래 복사해 집에 가지고 와서 밤마다 사전을 찾으면서 스펙에 쓰이는 용어들을 공부하며 숙지해 나갔다. 12월이 되니 겨우 기본적인 견적을 내는 것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H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젯다 공공주택 공사[사진제공=국가기록원]<br>
1970년대 H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젯다 공공주택 공사[사진제공=국가기록원]

나는 기본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가는 데마다 새로운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힘이 들고 외롭지만 지는 것은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건강은 나의 아주 큰 강점이었다. 새로운 고비가 닥치면 먼저 어려운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를 판가름하고, 불가능한 것이면 깨끗이 접고 어려운 것이면 끝까지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1979년도 2월이 되자 작은 현장은 견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적잖은 성장이었다. 일에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다.

정말 어려워서 힘들어할 때는 집사람이 곁에서 건넨 자그마한 위로가 나에게는 큰 힘이 된 것 같다. 힘들고 어려워서 회사를 그만두고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든지 함께하겠다는 이야기였다.

3월이 되니 사우디 현장으로 발령이 났다. 결혼 후 집사람과 함께 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제 겨우 가정이 자리가 잡히나 싶었는데 해외 현장에 가라고 하니 막막했다. 또 건설 현장에 대해선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시골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농사일을 조금 도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고생과 노력이 빛을 발하기도 전에 떠날 수는 없었다.

3월14일에 사우디 젯다에 도착했다. 참으로 더웠다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월남에서 2년 군 생활하면서 더위에는 도가 튼 줄 알았지만 그곳 불볕더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허허벌판 사막 한복판에 간이 사무실과 장비 몇 대가 서 있을 뿐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이 현장의 총공사비는 4억5천만불로 내 앞으로는 1천2백만불 공사가 기다리고 있고, 그 공사는 토목에 예속되어 있어서 나는 토목팀에 합류했다. 그러나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장 경험도 전무했고 관련 전공자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배경은 없는 나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주눅이 들지는 않았지만 막막하고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6.25 참전용사(영국)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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