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⑫] 아프리카 대륙과 사람들을 더 넓고 깊게 사랑하다 – 허성용 아프리카인사이트 대표
[아프로⑫] 아프리카 대륙과 사람들을 더 넓고 깊게 사랑하다 – 허성용 아프리카인사이트 대표
  • 허성용 아프리카인사이트 대표
  • 승인 2021.07.1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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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아프리카인사이트는 아프리카 국제협력 및 옹호활동을 펼치는 시민사회단체다. 국내에서 아프리카 대륙과 국가, 사람의 권리를 옹호하고 아프리카를 향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아프리카에서는 교류와 협력을 통해 현지 사람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에 기여한다. 이렇게 풀어 설명하면 제법 간단해 보이지만, 이를 구현하기 위해 아프리카인사이트는 실로 다양한 활동을 맞물려 전개한다. 작은 규모에 이렇듯 다채로운 사업을 경계 없이 실천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프리카인사이트 허성용 대표는 2008년에 탄자니아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아프리카의 현실과 마주했다. 그는 남의 감정에 곧잘 공감하고 자신에게 대입하는 능력을 발견한 사실에 깊이 감사한다.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받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더 넓고 풍요로운 마음을 갖게 해준 이웃과 친구들이 차별받는 것이 싫어서, 아프리카 국가의 사람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향한 인식을 개선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교류와 협력의 길을 모색한다.

탄자니아, 가치와 인식의 전환을 통해 내가 얻은 것

2008년 굿네이버스 봉사단원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뎠다. 탄자니아에서 컴퓨터 기술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평소에 특별히 아프리카나 자원봉사에 높은 뜻을 품은 건 아니었다. 단순히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었다. 배낭여행, 워킹홀리데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차에 해외 봉사단을 알고 호기심이 일었다.

아무래도 견문이 좁았던 20대 초반의 나는 아프리카 대륙과 자원봉사에 어쩌면 왜곡된 환상을 품고 있었던 듯싶다. 너른 초원에 지어진 엉성한 초가집에 머물며 시골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걸 보면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뽐내듯 아프리카로 봉사 활동을 떠난다고 말했고, 그들 대부분이 내게 일종의 경외심을 드러냈다. 그 순간을 내심 즐겼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읊은 ‘아프리카’라는 단어에는 도전과 모험이 가득한 미지의 세계에 간다는 모종의 흥분감과 자긍심이 심어져 있었다.

하지만 탄자니아의 첫인상은 내 기대와 무척 달랐다. 어떤 사명감에 휩싸여 밀림을 헤치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했건만, 언뜻 본 탄자니아는 밀림보다 도시에 가까웠다. 무성한 수풀과 야생 동물이 있어야 할 곳에 빌딩과 아스팔트 도로, 자동차가 즐비했다.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모습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해외봉사단 활동이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가 줄 거라는 상상을 했던 나는 나의 무지에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내가 이 땅에 기여할 활약상을 상상하자 곧 다시 가슴 한켠이 부풀어 올랐다. 다음날 지부장님을 따라 탄자니아 학생들에게 컴퓨터 기술을 전파할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곳은 허허벌판이었다. 굿네이버스가 탄자니아에 지부를 개설한 지 오래되지 않은 시기여서 학교부터 지어야 할 판이었다. 지부장님은 반년이면 학교가 완공된다고 나를 위로하며 그동안 건설 현장을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건설 현장을 관리하는 일은 내 계획에 없던 활동이며, 전문 지식이 전무한 분야여서 모든 게 낯설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는 유난히 덥고 습한데, 현장이 산속 깊이 위치해서 시원한 음료를 구할 길이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현지 인부들 눈에도 어리숙해 보였는지 그들은 가끔 내게 짓궂은 장난을 쳤다. 가뜩이나 힘든데 놀리고 괴롭히니 화가 나서 그들을 무시하는 무례하고 못난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나는 전에 몰랐던 내 모습에 흠칫 놀라곤 했다.

당혹스러운 감정은 곧 진로를 결정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오히려 시간을 낭비한다는 회의감으로 번졌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숨거나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그저 맞닥뜨려 부딪히는 수밖에. 이왕 왔으니 열심히 하다 보면 무엇이든 얻는 게 있을 거라는 마음도 들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온 단원이 있었고 지부장님이 계셨으며, 도심에 나가면 한국에서 온 또래 친구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고민을 나누고 상담 받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냈다.

반년을 용케 견디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지부장님 말씀대로 학교가 뚝딱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고된 노동으로 번 일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나는 탄자니아 사람들의 얼굴에서 명암을 동시에 발견했다. 행복하고 즐거운 밝은 기색과, 가난과 질병 등의 문제로 고통받는 어두운 기색이었다. 나는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들을 보며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여기서 태어났다면, 여태껏 당연하게 여긴 물질의 풍요와 권리를 누릴 수 있었을까. 그런 고민과 성찰을 거듭하며 머릿속에서 마치 두 세계가 충돌하는 듯 혼란스러웠다. 내 얕은 가치관은 송두리째 흔들렸고, 한 차례 성장통을 겪어낸 내게 봉사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거나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는 내 이웃이 보다 더 풍요롭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일이 바로 봉사였다.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에서 온 내가 그들을 대상으로 주고 가르치는 일만 생각했다. 그런데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오히려 내가 탄자니아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열악한 환경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서서히 내 마음을 움직였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가치와 그로 인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을 해소할 방법을 그들은 이미 알고 실천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진정으로 이웃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다.

그런 마음과 삶을 들여다 보고 실천하는 자세를 1년간 흡수하며 나는 굉장히 넓고 풍요로워진 내 자신을 발견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게 결코 돈 주고 배울 수 없는 삶의 진리를 심어준 셈이다. 하지만 막상 그들의 삶을 들춰보면 아픈 구석이 너무 많았다. 나는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좇던 가치가 덜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주어진 활동 기간인 1년이 지나면 귀국하여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계획을 미룬 채 반년을 더 머물기로 결심했다.

굿네이버스에서 일하며 많이 배웠지만, 다른 국제 개발 기구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궁금했다. 탄자니아에서 운 좋게 반기문 전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을 만난 후, 특히 UN에 많은 관심이 생겼다. 무작정 UN 산하의 기구들에 자원봉사를 지원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중 UN해비타트 탄자니아위원회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답변이 왔다. UN해비타트는 유엔인간정주기구로 도시화로 인해 발생하는 청년 및 주거 문제를 주로 다뤘다. 이미 탄자니아 수도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에는 지방에서 상경한 청년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도시에 정착하지 못한 결과, 각종 주거 문제와 범죄에 노출되고 있었다.

UN해비타트는 도시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이 언제든 들를 수 있는 원스톱유스센터(One Stop Youth Centre) 프로젝트를 통해 그곳에서 멘토링과 직업 훈련은 물론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중 나는 마을 단위의 청년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를 초청하여 대표로 교육하는 ‘트레이닝오브트레이너스(Training of Trainers)’ 프로그램에 관여했다. 무엇보다도 굿네이버스를 통해 원조금이 집행되는 가장 밑단에서 활동했는가 하면, UN해비타트를 통해서는 국제기구가 일하는 방식과 자금을 지원하는 기관의 역할을 경험할 수 있어 뜻깊었다.

세네갈, 실천하고 행동하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

1년 6개월 후 한국에 돌아오니 그전까지 우리 사회와 내 삶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요소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숱하게 내린 선택과 결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탄자니아를 떠올렸다. 특히 소비 생활에 있어 생각이 많아졌다. 이 정도 화폐 가치면 탄자니아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행복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음식을 버리는 것도 불편했다. 그렇다고 당장 낭비되는 음식을 전해줄 수 없었지만, 탄자니아에서 갓 돌아온 때라 상대적으로 죄책감과 불편함이 컸다.

친구들과 대화하는 도중에도 불편한 감정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친구들은 내게 탄자니아에서 쌓은 경험을 물어 놓고 곧 내 이야기를 지루해했고, 뒤따르는 질문도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불편한 순간이 쌓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대해 갖는 인식을 바꾸는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갓 돌아온 나는 기존의 자아와 1년 반 사이에 새롭게 바뀌고 발견된 자아가 자꾸 부딪히며 혼란을 느꼈다.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기준을 세울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곧 아프리카 국가에 있을 때의 나와 한국에 있을 때의 나를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 사람과 어울릴 때는 우리 문화와 사고, 소비 수준에 맞추어 행동했다. 그러다가 혼자가 되면 내가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자원을 아프리카로 더 많이 흘려보낼 방법을 고민했다. 그 방법은 한시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아야 하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을 통해 양측 모두 행복하고 지속가능해야 했다. 그래야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풍요롭게 나눌 수 있다고 여겼다. 꼭 물질적인 재원이 아니더라도 내가 지닌 시간, 재능, 마음, 하물며 기도라도 말이다.

나처럼 뜨거운 마음을 안고 돌아온 활동가 중 대부분이 머지않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마음이 앞서서 번아웃 된 결과였다. 나는 그 과정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보며 마음속으로 ‘지속가능성’을 곱씹었다.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나누면서도 내가 채워지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구조가 절실했다. 그 구조를 한국에 발 딛고 사는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찾고 구현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군복무였다. 원래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사 장교로 임관할 생각이었으나, 사고의 틀이 바뀐 만큼 더 이상 의미 있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것보다 군복무를 대체하여 개도국의 발전을 목적으로 해외 파견하여 봉사활동을 하는 국제협력요원제도가 훨씬 유의미해 보였다. 탄자니아에 있을 때 친해진 형들 중 국제협력요원으로 온 이들이 있어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년에 100명을 뽑는 등 경쟁률이 높았다. 열심히 공부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내게 경험과 명분이 있겠다, 지원 분야에 컴퓨터 교육이 있었으며, 형들이 알려준 노하우도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떨어졌다. 하반기에 한 번 더 기회를 노리려고 하니 더 이상 졸업도, 입대도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 제도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졸업을 하되 입대를 미룰 수 있는 방도를 찾았다. 그중 하나가 공공기관에서 인턴십을 하는 길이었다. 처음으로 외교통상부(현재의 외교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미 대부분 채용 기간이 지난 후였고, 남은 자리는 기획조정실에 귀속된 행정관리담당관실이었다.

감사하게도 굿네이버스와 UN에서 쌓은 경험을 좋게 평가받아서 하나 남은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내가 속한 부서는 외교부 산하기관을 평가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내가 지원했지만 탈락한 외교부 산하의 한국국제협력단, 즉 KOICA를 평가하는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 어떤 결정에도 관여할 수 없는 인턴이었지만, 기획조정실에서 일하며 공적개발원조금이 어디서 내려와서 어떻게 흘러가는지 구조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뜻밖에도 피와 살이 된 인턴십에 참가하며 열심히 공부한 결과, 하반기 KOICA 국제협력요원 시험에 합격했다.

KOICA에서 내게 주어진 임무는 서아프리카 세네갈의 국립기술훈련원에서 미래의 교사에게 컴퓨터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교는 있으나 학생이 없었다. 세네갈 정부가 예산 집행을 늦추다 보니 학교가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았다. 거의 8개월을 학교에서 학생 없이 보내야 했다. 게다가 3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아프리카를 돕기 위한 방법을 찾겠다는 사명감에 어려운 시험을 두 번이나 치르며 겨우 왔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답답했다. 마음이 뜨겁다 못해 들끓었다.

매일 이런 환경을 탓하며 우울한 시간을 보내던 중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경계는 없었다. 학교 밖을 보자 내가 할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많았다. 동네에는 세네갈 각지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보내져 훈련을 받는 ‘딸리베(Talibe)’ 아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아침마다 맨발로 마을을 돌며 동냥했다. 나는 그들의 몸에 난 생채기를 돌보고 먹이는 소소한 일부터 실천했다. 또 정기적으로 다른 봉사자들과 마더테레사하우스를 찾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일본인 봉사자들과 함께 협력하여 환경개선을 위해 쓰레기 줍기 캠페인도 벌였다. 소소한 봉사 활동을 조직하며 나는 시나브로 세네갈 문화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세네갈에 활짝 열릴 즈음 학생들이 들어왔다.

나는 학교가 있는 마을에서 가까우면서 전기나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오래 활동하신 미국인 선교사 가정을 통해서 많은 조언과 조사를 통해서 알아내게 된 곳이다. 그리고 무작정 그 마을로 향했다. 이방인이 갑작스럽게 등장하자 마을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방문한 목적을 물었다. 하지만 나는 구체적인 답을 피하며 할머니 곁에 앉아 땅콩을 까고 농사를 도왔다. 처음부터 도움을 주고 받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먼저 인간적으로 알아가고 삶 깊숙이 들어가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많은 것을 쉽게 주었을 때 이들은 내게 의존할 것이며, 내가 떠난 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그들의 삶에 천천히 스며들도록 노력했다. 내 노력이 빛을 본 것일까. 하루는 이장님의 아들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내게 보건 위생을 다룬 책 꾸러미를 보여주며 국제적십자사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배운 지식을 마을 사람들과 나눠야 했으나 농사를 짓느라 바빠 뒷전으로 미뤄 뒀다며, 지금이라도 이웃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때마침 마을에 작은 학교가 있었다. 나는 그분과 교장 선생님을 설득해서 아이들에게 손 씻기 교육을 시작했다. 손만 잘 씻어도 수인성 전염병의 70퍼센트를 예방할 수 있다.

내가 마을에서 손 씻기 교육을 시작하자, 나를 찾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주민들이 내가 보건 위생과 관련된 사람이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하루는 손이 세 배쯤 부풀어 오른 청년이 찾아왔다. 놀라서 살피니 손에 난 작은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않아 감염된 결과였다. 병원에 데려가 치료받는 일을 도왔다. 우리처럼 119 안전관리체계가 없을뿐더러, 신앙 등의 이유로 병원에 가는 일을 꺼렸다. 그런 상황에서 건강상 이상은 없는지 관찰하고 위급할 경우 빨리 병원에 데려가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마을에 방문할 때마다 돌아가는 길에 작은 마을을 돌며 주민들과 인사하며 별다른 일이 없는지 살폈다.

의료인이기 아니기에 직접적인 의료 행위는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멘소래담 로션을 슬쩍 발라드렸다. 근육통에 약간의 진통, 소염 효과가 있을 뿐인데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매번 로션을 더 짜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마다 나는 하나밖에 없어 안 된다며 밀고 당겼다. 그러다가 마을에서 아픈 아이 둘을 발견했다. 한 명은 날 때부터 하반신이 마비된 네 살배기였고, 또 다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발육 상태가 나쁜, 영양실조에 걸린 신생아였다.

나는 두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신생아를 병원이 있는 마을에 데리고 나와서 영양식을 먹이기도 했으나 1년 후 하늘나라로 떠났다. 또 네 살배기는 오랜 설득 끝에 수도에 있는 아동 병원에 입원을 시켰으나 다음날 새벽에 숨을 거뒀다. 일련의 죽음을 보며 나는 탄자니아 때와는 밀도가 다른 충격을 받았다. 탄자니아에서 훨씬 더 많은 아동의 죽음을 전해 들었지만, 이 아이들은 달랐다.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무고한 아이들의 생명이 이렇듯 쉽게 꺼지는 모습을 보며 더 큰 운명의 힘에 사로잡혔다.

더 오래, 더 멀리, 그리고 함께 걸어가기

2013년 초, 국제협력요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후 머지않아 생일을 맞았다. 가족과 지인에게 세네갈에서 찍은 사진을 전시할 테니 생일선물 대신 전시를 봐 달라고 부탁했다. 조그마한 카페를 빌리고 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했던 다른 단원들의 도움을 받아 세네갈의 밝고 행복한 모습, 아픈 모습, 자연과 문화를 담은 사진 수백 장을 전시했다. 그때 이미 ‘아프리카인사이트’라는 이름의 모임을 결성하며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5명과 작은 규모의 세미나, 전시를 통해 아프리카를 바로 알리는 활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전시에서 얻은 수입으로 주말에 카페에서 회의하며 강연회를 열었고, 서울시 청년허브로부터 1백만 원을 지원 받아서 현재까지 운영하는 ‘아프리카 지역전문가 양성을 위한 청년활동가 모임’을 조직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청년허브로부터 1천만 원을 지원받고, 더 규모 있는 포럼과 전시를 열었다. 하지만 생계가 보장되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1년 6개월 동안 사회적기업, 소셜벤처를 지원하는 사단법인에서 하프타임 사무국장으로 일을 병행하며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함께 하는 동료들이 모두 급여와 활동비를 받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집중하고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역할과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도 실감하였다. 결국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2015년 나는 풀타임으로 아프리카인사이트 활동을 시작하였다.

운 좋게 성수동 공유오피스에 자리를 잡았고 지인 위주이긴 하지만 후원자들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정 구조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2013년 5월부터 약 2년 반이 지난 2015년 말이 되었을 때 안타깝게도 처음 아프리카인사이트를 같이 시작했던 활동가들은 자연스레 학업이나 취업 등 각자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2016년에 큰 힘이 되는 디자이너가 합류했고, 포럼과 교육 프로그램 활동을 해온 활동가가 모여서 3인 풀타임 체제를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다. 또 그해 여름 KOICA에서 지원하는 ODA YP인턴을 통해 두 명의 동료를 만나며, 조직으로서의 모습을 조금씩 갖추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가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만나며 상호 교류하는 모든 순간에 새로운 인사이트 즉, 통찰이 필요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너무나 많았으나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재원이. 우리는 그때그때마다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아프리카클래스, 세계시민교육, 청년 기자단, 서울아프리카페스티벌, YES프로젝트 등의 활동을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해야 했다.

특히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월드투게더와 함께 2016년에 처음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 온 서울아프리카페스티벌은 4회 차를 거듭하며 점점 인지도를 쌓고 참가자 수도 증가하는 추세다. 또 아프리카 YES프로젝트는 케냐의 청년 사회적 기업가를 교육하고 지원하는 사업이다. 2015년부터 시행한 이 사업은 우리나라 사회적 기업처럼 이미 비즈니스 모델과 사회적 목표를 갖춘 청년 사업가를 발굴하여 스스로 뿌리를 단단히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청년 기자단 ‘아이네디터’는 아프리카 국가와 지역의 새로운 정보와 뉴스를 생산하고 소개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균형 있게 바라보도록 돕는다.

기자단은 아프리카와 관련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동시에 우리가 제공하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아프리카를 공부한다. 그 외에도 국제보건 옹호활동, 민간외교, 차별반대 캠페인, 각종 전시·포럼·세미나 등을 지속적으로 운영한다. 국내 인식을 개선하고 현지의 역량을 강화하고 옹호하는 일련의 사업들은 언뜻 두서없어 보이지만, 이들이 동시에 전개되어 유기성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점에 가까워질 수 있다.

지난 10년간 쉼 없이 달려오며 옆을 돌아봤을 때 정부 정책상 아쉬운 점이 많았다. 사실 우리가 아프리카에 전달하는 원조자금은 이웃나라와 비교했을 때 그리 크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자금이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아프리카에 대한 장기적 전략과 세밀한 철학이 상위 개념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에 따라 경제, 정치, 교육, 외교, 민간 교류의 전술을 설립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청사진이 없다. 더불어 원조 체계에도 문제가 있다.

무상 원조는 외교부 산하의 KOICA가, 유상 원조는 EDCF, 즉 기획재정부 산하의 대외경제협력기금이 담당한다. 하나로 통합되는 청사진이 없는 가운데 원조 체계가 나뉘어 있으니 원조 사업이 분산되고 효율이 떨어진다. 물론 최근에는 한·아프리카재단과 한·아프리카 의회외교포럼 등이 생기며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이웃나라인 일본의 오랜 세월의 노하우와 체계적인 접근, 그리고 중국의 거대한 규모와 자본력을 보면 부족함이 많이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다양한 아프리카 전문가를 초청하여 그들의 고견에 귀 기울여 우리만의 특별한 전략을 짜야 한다.

동시에 우리 같은 시민사회단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협력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정부, 기업, 민간이 아프리카와 상생·협력하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과 생태계가 잘 만들어지면 좋겠다. 한·아프리카재단도 권한과 예산을 늘리며 그 고유의 역할을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인사이트가 그동안 모아 온, 개별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돌, 나뭇가지, 흙을 바탕으로 다른 기관들과 협력하여 함께 번듯한 집을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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