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⑩] 열사의 나라 사우디에서의 조경 공사
[현봉철 회고록⑩] 열사의 나라 사우디에서의 조경 공사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7.2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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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 붐 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2020년말 현봉철 회장 회사 송년회

3개월 전에 처음 회사 입사했을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 진퇴양난이라고 할까 고립된 느낌이라고 할까. 이번에도 여기서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나를 덮쳤다. 하지만 어디 한두 번 겪은 일인가. 나의 삶이 항상 이런 식이 아니던가. 어떤 도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예측할 수 없는 삶 말이다.

다시 스스로 마음을 정리했다. 일단 부딪히고 보는 것이다. 미국에서 얻은 교훈을 떠올렸다. 먼저 생각하고 일을 하라. 우선 환경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스케일을 적지도 크지도 않게 설정했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내 나름대로 그곳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노력을 시작했다.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나의 장점을 찾았다. 나에게는 남보다 건강이 있었다. 열정도 있었다.

일을 저지르자. 먼저 내 앞으로 준비된 면적이 100x100m 정도인데 그 가운데에 자그마한 돌산이 있었다. 산을 이용해 조경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여러 차례 장소를 보고 또 봐도 그대로는 내 계획이 실현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장비 지원을 요청해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목요일 오후에 불도저 2대에 오늘과 내일 사이에 저 돌산을 헤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금요일이 지나고 토요일에 공구장이 출근해 산이 질서 없게 허물어진 것을 보고 야단을 치면서 극적인 욕을 퍼부었다. 묵묵히 욕을 다 듣고 다시 계획대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먼저 묘목 수급이 어려워서 묘목 번식장(Propagation House)을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잉여 자재를 이용하여 방풍 겸 울타리를 만들었다.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 물탱크, 파이프 배관 등 기초를 만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가든 공사

다시 묘목장은 반장에게 맡기고 조경에 사용될 삽수와 거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자재과를 통하여 구매하려고 했었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구매가 되지 않은 것이다. 시청부터 베드윈(중동 사막 유목민) 마을까지 샅샅이 누비며 거름을 찾아다녔다. 낮에는 밖으로 나와 이 지역 저 지역을 누비며 수종 등 필요한 것을 준비했고 저녁이면 현장으로 돌아와 오늘 일을 확인해보고 내일 일을 계획했다.

그러는 중에 묘목장이 윤곽이 나타나고 번식장도 모양이 서기 시작했다. 또 별도의 내 사무실도 지었다. 울타리를 짓고 정문을 철문으로 멋있게 만들고 사무실 앞에는 간판에 “먼저 생각하자. 그리고 일을 하자”라는 표어를 새겨서 달았다.

나는 영어를 참으로 못한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일수록 용기가 있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어딜 가든 원하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I am come from Hyundai. Can you help me?” 그게 전부다. 구사할 수 있는 건 짧은 몇 마디뿐이지만 내 목표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어디서 어떻게든 만들어냈다. 나한테 필요한 것은 쟁취해냈다.

서서히 자리를 잡는가 싶었는데 몸에 이상이 왔다. 원인 모를 피부병이었다. 의무실에서 약을 받아 복용해도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진다. 그렇게 건강 하나는 자신했는데 피부병은 감당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시내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며칠을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된 일은 많이 남아있는데 초조한 마음에서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입원하고 나서는 병원에서 나와 다시 업무에 충실히 임했다.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난 것은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공구장인 K 부장은 나를 늘 냉대했다. 산을 뭉갠 사건 이후로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인사를 해도 받지 않았다. 나는 대안으로 품의서를 계속 제출했다. 내 필적은 말이 아닐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래서 지방에서 면서기로 일하던 김재식이라는 분이 잡부로 자원해 왔기에 내 파트에 배치를 받아서 서류 작성을 주업무로 맡겼다.

내 일이 실제로 추진되어 결과물로 드러나자, 이것을 보고는 주변에서 여러분들이 도와주고 지혜도 주었다. 타공구의 공구장들도 열심히 도와주었다. 토목 공구장으로부터 천대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많은 분들이 찬사를 보내 힘을 보탰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정근영 기술부장(부소장)이 찾아와서는 여러 상황을 물어보더니 힘들 때는 본인을 찾아와서 직접 협조를 구하면 도와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소모적인 견제로 내 일이 방해받는 것을 부소장이 직접 막아주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토목 소속이고 토목관계자들과 협조를 구해야만 했다. 비록 협력이 잘 안되어도 그 뜰에서 노력하면서 때로는 간접적으로 부소장님에 상황을 설명하면서 협조를 구했던 것이 큰 힘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쿠웨이트인들이 젓가락을 들고 식사하는 모습

연말이 되자 날씨도 선선하니 지낼만해졌다. 나는 600%의 보너스를 받았다. 어느 분이 와서는 나더러 당신이 현대건설 전체에서 두 번째로 보너스율이 높은 사람이라고 일러줬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던 것 같았다. 남들이 내지 않은 아이디어를 내어 지원 없이 스스로 추진한 내 방식이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또 듣기로는 현대건설 중동본부에서는 나의 절약 습관이 성실한 태도를 글로 작성해서 각 현장에 회람을 돌렸다고 한다.

젯다 현장에는 현장 직원이 250명이고 근로자를 합치면 5,000여명의 인원이 있었다. 나는 관리부에 요청으로 체육관을 만들어서 직접 관리했다. 태권도, 탁구, 보디빌드 등 근로자 중에서 경험과 자격이 가진 사람들을 선발해서 분야별로 관리하도록 하고 나는 전체적인 관리로 현장에 체육관을 운영했다.

당시 현장 경비는 군부대처럼 엄격하면서 ‘갑질’도 심했다. 당시 경비대장은 유도대학을 나온 경찰 출신이었다. 경비 팀은 조경 쪽 반장 등 근로자들을 많이 괴롭히고 때로는 문서로까지 작성해서 기록을 남기곤 했다. 경비대장이 언짢은 언사를 해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들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일개 기사이고 경비대장은 부장급 같은 과장이었다. 나는 한동안 꾹 참았지만, 도저히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 하루는 조용히 경비대장에 대화를 하자고 했다. 2-3km 떨어진 쓰레기 소각장으로 함께 갔다.

내가 흥분한 나머지 한 판 붙으려는 모습을 보이자 경비대장이 한풀 꺾였다. 내 항의에 순응하는 기색을 보여서 결국 그날은 대화만으로 마무리됐다. 그 일이 있었던 후 그는 내 파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정중하게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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