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⑬] 인류학자로서 아프리카 문화를 연구하다 - 한건수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아프로⑬] 인류학자로서 아프리카 문화를 연구하다 - 한건수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한건수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승인 2021.07.2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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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여수엑스포 아프리카 문화전시

한건수 교수는 버클리대학 인류학과에서 아프리카 문화를 연구하며 나이지리아 요루바 문화를 주요 연구주제로 삼았다. 1993년 요루바어를 배우기 위해 나이지리아에 처음 발을 디딘 이래, 1996~1997년에는 아예 요루바 사람들이 사는 농촌 마을에서 1년간 현지조사를 했다. 그 결과 「‘Community of Memory’: History, Ritual and Kinship in the Construction of Yoruba Social Identity(‘기억의 공동체’: 요루바 사회정체성 구축에 있어서의 역사, 의례 그리고 친족)」이라는 논문으로 200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2002년 강원대 문화인류학과에 부임한 후, 한 교수는 인류학 분야에서 아프리카 문화교육, 아프리카인의 국제이주와 디아스포라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나이지리아, 가나, 콩고민주공화국,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국제개발협력사업과, UNESCO의 무형문화유산, 문화다양성, 세계시민교육 등에 대한 연구와 학술활동에 참여하는 등 아프리카 지역과 사회문화 분야를 종횡무진 아우르는 그는 그야말로 국내 아프리카 학계의 만능 연구활동가(Activist-Researcher)이다.

우연이 필연으로, 아프리카와 연을 맺다

아프리카는 서울대 인류학과 학부 수업에서 늘 읽어야 하는 민족지의 주무대였다. 20세기 영국과 프랑스 인류학은 아프리카 문화연구를 통해 이론을 구축해왔기 때문에 인류학의 모든 과목에서 아프리카 지역을 대상으로 한 민족지를 읽는 것은 일상이었다. 당시 아프리카는 내게 있어 늘 책에서 읽고 강의를 통해 전달받는 먼 대륙일 뿐이었다. 학부 4학년에 접어들면서 대학원 진학과 인류학을 평생 공부하며 살겠다는 결정을 하면서도 일본이나 중국을 연구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1986년 여름방학 막바지에 나는 예상치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인류학과에 재직 중이던 자크 마께(Jaques Maquet, 1919-2013) 교수가 선불교를 연구하면서 일본과는 다른 한국 선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를 방문하기 위해 입국했다. 마께 교수는 서울대 인류학과의 왕한석 교수에게 송광사까지 안내할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고, 난 우연히 학과 사무실에 게시된 공지글을 보고 자원했다.

여름방학의 마지막 주에 송광사 나들이는 꽤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광사로 내려가는 기차와 버스 안에서 마께 교수와의 대화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창밖 마을 풍경에 대한 질문들에서 인류학자의 예리한 관찰력을 보게 되었고 한국의 선불교를 어떻게 조사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송광사에 도착해서 이제 서울로 돌아가려는 나에게 “네가 가버리면 누가 이 서양 교수의 시봉을 들겠느냐?”는 주지 스님의 강권은 어찌 보면 남고 싶었던 내게 좋은 유혹이자 명분이었다.

콩고국제개발협력조사(2012)

주지 스님은 마께 교수의 옆방 하나를 내어주고 ‘시봉’을 들라 하셨고 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께 교수의 송광사 생활에 동참하게 되었다. 새벽 예불에서부터 한낮의 인터뷰 통역, 그리고 송광사 전경을 담기 위한 사진 촬영까지 온종일 같이 지내며, 인류학자의 삶과 현지조사, 완전히 낯선 문화에서의 연구가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고생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냇물에서 함께 빨래할 때, 마께 교수의 친구인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교수가 한국 방문에서 못해 본 걸 해본다고 돌아가면 자랑해야겠다는 농담과 웃음, 불일암에 올라가 법정 스님과 인터뷰하며 나눈 차 한 잔의 즐거움은 어느덧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음에도 나를 송광사에 머물게 했다.

더 이상 수업을 빠질 수 없어 서울로 돌아가는 내게 마께 교수는 인류학자로서 아프리카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진지한 제안을 하셨다. 한국 인류학의 미래를 생각하면 누군가는 아프리카를 연구해야 할 것이고 그 일을 내가 맡았으면 한다는 말씀을 귀에 담고 돌아왔다. 송광사에서 한 달을 머물며 참선과 스님들과의 인터뷰를 계속하셨던 마께 교수는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 내게 상자 가득 책을 보내왔다. 본인이 아프리카를 평생 연구하며 저술한 모든 책에 일일이 서명하시고 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써 보내셨던 것이다. 어느 책은 절판되어 새 책을 구할 수 없어 본인이 갖고 있던 마지막 책을 보낸다는 특별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철없던 시절, 마께 교수의 격려와 조언은 내가 아프리카 지역을 전공하게 된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당시 선후배나 동기들의 지역 전공 선택에 비추어 보면 내 선택은 무모해 보이기도 했고 선생님들 중에 걱정하신 분들도 여럿 있었으나, 난 그저 아프리카를 공부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것이 오늘의 내 인생을 결정했다.

현지조사, 요루바 문화 속에서 낯선 나를 발견하다

처음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것은 1993년 6월이었다. 버클리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에서 요루바어를 2학기 배우고 여름방학에 나이지리아의 일레이페(Ile-Ife)에 있는 오바페미 아올로워(Obafemi Awolowo) 대학으로 요루바어를 배우러 간 것이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바방기다(Ibrahim Babangida) 대통령의 군부 독재 체제였고 민간정부로의 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를 6월12일에 치른 상태였다. 난 선거가 끝난 다음 주에 입국했고, 민간정부로 이행하는 나이지리아 정세를 직접 관찰하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요루바 출신인 아비올라(Moshood Abiola) 후보가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바방기다 정권이 선거를 무효화시킨 것이다. 요루바 민족 지역인 남서부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대학 역시 정상적인 운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위대로 인해 라고스를 비롯한 인근 도시로의 교통이 끊겨 고립된 상태에서 나는 개인지도로 요루바어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지리아 귀환이주노동자 연구

시위가 악화되면서 라고스 공항이 폐쇄된다는 소식과 미국대사관의 소개령으로 인해 미국대학의 방문교수들마저 대학에서 철수했지만, 나는 홀로 남아 요루바어를 계속 공부해야 했다. 어느 날 철시된 시장으로 먹을거리를 구하러 나갔다가 함께 나간 요루바 교수와 함께 시위대에 체포되었고 난 바방기다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시위대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내가 탄 작은 차 앞뒤에 폐타이어로 불을 질러 차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차 위에서 점프하거나 차 문을 열며 하차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붙잡혀 그렇게 30여 분을 버텨야 했다.

오랜 시위로 시위대의 감정이 치달아 있었던 데다 진압군마저 내려오지 않은 상황에서 시위대가 드디어 찾은 외부인에게 온갖 화풀이와 분노를 표현했던 것이다.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갑작스러운 드라마 배역에 충실해야 했다. 오랜 심문과 타협 끝에 함께 있던 교수의 보호로 간신히 탈출한 후 난 이제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나이지리아를 방문한 것은 1996년, 1년간의 현지조사를 위해서였다. 나이지리아 교수들과의 오랜 상담과 연구계획서 작성을 통해 현지조사지로 결정된 일레이페 인근의 오케익보(Okeigbo)라는 농촌 마을로 현지조사를 떠났다. 꼬박 1년을 마을에서 벗어나지 않고 주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내가 조사한 마을은 1850년대 요루바 왕국 간의 알력 속에 형성된 소규모 왕국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영국식민정부의 간접통치 체제에서 실질적인 세력균형과 상관없는 지역구도의 재편이 이루어졌고, 이는 이후 100여 년 동안 마을 주민들로 하여금 집단기억, 구연문학, 축제와 의례를 통해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문화적 실천을 주도하게 했다. 나의 박사학위 논문은 이러한 현상을 분석한 것으로, 집단기억과 역사해석이 민족정체성의 형성과 유지 과정에서 서로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논한 것이었다.

일 년간 오케익보에서 살았던 내 현지조사 경험은 개인적으로도 내게 아프리카 지역의 문화를 체감하고 한국문화 속에서 형성된 나의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집집마다 내 하루의 일상이 공유되면서 오늘은 저 ‘흰둥이’가 무슨 질문을 하고 어떤 걸 관찰하는지 모두 궁금해했다. 마을 내에서 왕위 계승과 관련된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달했을 때는 마을의 역사와 추장제의 전통에 대해 늘 물어보고 기록하던 내 판단이 어디로 갈지가 화제였고, 내가 질문하고 모은 자료들이 어떻게 정리될지 다들 귀추를 주목했다. 축제 기간에 나는 늘 축제의 한 복판에서 의례 과정과 추장들의 역할을 기록했고 심층인터뷰를 통해 축제의 역사와 의미를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아프리카활동가대상 강연(2012)

결과적으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부터 우리 마을의 전통은 ‘흰둥이’ 인류학자에게 가서 물어보면 된다는 농담들도 오고 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름을 짓는 가족 단위의 행사에서부터 일요일 예배, 전통신앙 주술사들과의 심층인터뷰와 교류, 마을발전 축제에서의 활동 등 마을의 모든 일에 항상 참여하는 인류학자인 나는 현지조사 기간에 많은 노인들의 장례식에도 참여해야 했다. 함께 웃고, 키득거렸던 어르신들이 조용히 조상의 단계로 넘어가는 날에는 마을 주민과 함께 그분들의 삶을 기리고 조상으로 돌아가는 ‘귀갓길’을 축복하기 위해 북을 치고 노래를 불렀다. 말라리아도 걸려보고 요루바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깊게 편입되어 살면서 한국문화의 내면화로 갖게 된 나의 모습을 요루바 문화 속에서 낯설게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프리카 연구자로 활동하기

미국에서 귀국한 후 나는 요루바어를 기억하기 위해 나이지리아인을 찾았다. 당시 일산 외곽의 한 교회에 아프리카 국가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매주 모인다고 해서 일요일마다 일산으로 달려가 나이지리아와 가나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교류했다. 체불임금을 주라며 한국인 사장에게 대신 전화도 해주고, 한국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찾아주며 아프리카 국가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들이 다른 아시아권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노동자가 아닌 ‘무역가’ 혹은 ‘혁신적 사업가’로서의 정체성과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프리카인의 국제이주 실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체류하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연구를 마친 후에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가나와 나이지리아를 방문해서 한국에서 귀환한 이주노동자들의 재정착과 제3국으로의 재이주를 연구하면서 현대 아프리카인의 초국적 이주와 네트워크를 연구했다. 아프리카 이주민에 대한 연구 경험은 한국사회의 국제이주와 다문화사회로의 이행과 관련된 연구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연구자로서 UNESCO의 활동에 관여하게 된 것도 개인적으로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UNESCO는 창립 이후 평화의 문화를 구축하여 전쟁을 예방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다. 국가 간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추진한 국제이해교육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지속가능발전교육과 세계시민교육 등 새로운 교육의제로 제안했는데, 이러한 교육의제 모두 문화 간 이해, 문화다양성 등을 중요한 교육주제로 포함하고 있다.

아프리카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로서 UNESCO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한국의 교육의제에 포함시키기 위한 학회활동과 자문을 맡게 되었다. 또한 UNESCO가 전 사업 영역에서 ‘아프리카 최우선(Africa Priority)’ 원칙을 공표하면서 UNESCO의 문화다양성 협약, 세계문화유산 및 무형문화유산 등재, 창의도시 네트워크 등 다양한 영역에서 UNESCO 및 관련기관과의 협업 기회를 갖게 되었다.

콩고민주공화국고등교육장관 면담

국내 아프리카 연구자와 활동가 양성을 위하여

미국에서 아프리카 연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점은 다양한 장학금과 체계적인 아프리카 연구자 육성 시스템이었다. 미국 정부는 FLAS(Foreign Language and Area Studies) 장학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비록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장학금 수혜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버클리대학 아프리카 연구소에 등록된 대학원생인 내게도 꾸준히 장학금 신청서를 보내왔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의 모든 언어 학습을 지원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단순히 언어 연수를 위한 장학금뿐만 아니라 현지에 체류하며 문화를 배울 기회도 보장해 주었고, 대학원생의 경우 현지조사와 연구를 지원하는 연구비도 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미국정부는 아프리카 전역의 국가와 민족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규모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체계적인 인재 육성을 장학금을 통해 운영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매년 여름방학에 열리는 아프리카 언어 집중 강좌 교과목들이다. 미국 전역의 대학생들이 언어별로 특정 대학에서 개설되는 강좌에 참가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몰입식 언어 학습을 가능하게 해 준다. 대학별로 소수의 학생이 아프리카 언어를 배우는 상황에서 거점 대학이 집중 심화반을 운영함으로써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아프리카 언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도 아프리카 연구와 교육 수준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우수하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분류되는 대학에 아프리카 전공 학과를 개설하고 있으며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최상위권 학생들을 선발하여 교육하고 있다. 해외 대학과의 연계과정을 통해 학생들에게 최고 수준의 아프리카 연구와 교육을 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 대학은 어떠한가? 아직도 한국외대 외에는 아프리카 관련 전문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이 부재하다. 최근 일부 대학의 불어불문과가 아프리카 지역 전공을 포괄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학문적 성취나 교육의 성과를 내기에는 연륜이 짧다. 한국의 위계적 대학 서열구조는 우수한 학생들이 아프리카 대륙과 지역을 학습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필자 역시 강원대에서 학부 과정의 아프리카 관련 과목을 개설하고 있지만 대학원에서는 아직 개설하지 못하고 있다. 전공하는 학생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방송통신대 대학원에는 아프리카를 전공하겠다는 석사과정 학생들이 입학하고 있다. 서울에 소재한 대학에 다녀야 하고, 다닐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국의 대학 구조가 갖는 한계를 고려한다면,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난 아프리카 교육을 꿈꾸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인문학 교육이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다양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아프리카 교육도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을 대학 밖에서 운영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일 수 있다. 개별 대학의 경계를 넘어 국내 아프리카 전공자들이 체계적으로 아프리카를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아프리카 대륙과 국가, 지역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소속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함께 모여 공부하고 서로 격려하며 나아가는 그런 미래를 그려본다.

가나 현지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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