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5] KGB가 소개한 KAL기 격추사건과 토론토 범민련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5] KGB가 소개한 KAL기 격추사건과 토론토 범민련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7.2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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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KAL 007편 격추지점
KAL 007편 격추지점

지난 1983년 9월1일 새벽. 미 앵커리지에 잠시 기착 후 재출발한 뉴욕 발 대한항공 007 (KAL/보잉747) 여객기는 운항 중 국제항로를 이탈했다. 사할린상공에 진입한 후 얼마 안 있어 소련미사일에 의해 격추당했다. 탑승객 269명(승객 240명, 승무원 29명)이 모두 사망했다. 민간항공기가 국제항로를 벗어나 구소련영공에서 격추당한 끔찍한 대형 여객기 참사였다.

지금부터 만38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오늘까지 격추이유가 불분명한 채 영영 미궁에 빠져있다. 앞으로도 밝혀질 가망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이 참사가 발생되고 10년이 지나 당시 내용을 내게 상세히 설명해 준 러시아 거물급 인사가 있었다. 사건당시 KGB(소련비밀정보기관) 제1부의장이었던 필립 보프코브(1925년생)다. 보프코브는 1991년 12월 구소련이 붕괴된 후, 1992년 새로 러시아가 출범하자 국방부고문과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KAL 격추사건 12년이 지난 1995년 가을은 내가 모스크바 초대특파원 (춘추사/5개 지방신문연합)으로 상주해 있던 시절이다. 이때 우연히 구소련 고위간부였던 필립 보프코브 KGB (소련비밀 정보기관) 제1부의장을 소개 받았고, 그와 만남을 통해 대한항공(KAL) 격추사건 내용을 뒤늦게 들을 수 있었다. 비록 그의 개인적 견해이긴 했으나, 상당한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당시 소속사중 하나였던 부산일보는 내 추천으로 보프코브와 그의 비서 페트로브스키 씨 등 2명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부산일보 강당에서 2백 명이 모여 초청강연회를 가졌다. 그 해는 한-러수교(1990년 한-소 첫 수교가 이루어짐) 5주년기념이 되던 때였다. 마침 보프코브가 회고록 <KGB와 권력 (KGB비화)>을 펴내, 부산일보는 첫 외국출판계획을 맺고 대구 매일신문과 부산일보 등 지방지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KGB 보브코프 부의장
KGB 보브코프 부의장

보프코브는 방한 중 KAL 격추사건 관련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귀국한 후 뜻밖으로 대한항공 격추 관련내용의 장문의 타이핑한 편지(글)를 내게 보냈다. 그의 핵심주장은 “당시 대한항공 007편 항공기는 미 첩보행위에 관련됐으며, 미 인공위성의 촉매역할로 소련군사정보를 캐내려 했다.”는 점이 요점이었다.

그는 방한 중 KAL 격추 관련해 그런 내용을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파장이 커질 것을 우려했는지, 침묵으로 일관해 타이밍을 놓쳤다. 편지(글)를 접수하고 따로 인터뷰를 가졌으나, 소속사에서 KAL격추 건에 대해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모처럼의 보프코브가 주장한 KAL 격추관련내용은 사실이든 아니든 어느 인터넷상에도 단 한줄 찾아볼 수 없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옛 자료정리를 하던 중 그의 타이핑 편지(글)를 발견해, 지난해 한 문화원(사색의 향기)에 칼럼으로 내용을 한번 게재했을 뿐이다.

근 40년 전의 민간여객기 격추 건은 우리들 기억 속에 잊혀진지 오래다. 하지만 이 참사원인이 비록 증거물이 없다 해도, 세상에 드러나 있지 않은 내용 등 때문에 보프코브가 밝힌 당시 사건 관련한 그의 주장을 뒤늦게 소개한다.

보프코브는 무척 온화한 성격으로 겸손했다. 비밀정보경찰 출신의 어떤 날카로움이나 거만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남과의 불화나 갈등이란 여간해서 갖기 힘든 부드러운 성품의 인물 같았다. 그런 특유의 유연한 성격 때문인지 그는 오랜 KGB조직생활에서도 승승장구해 대장 직까지 올라갔는지 모른다.

필립 보프코브는 구소련시절 국제적으로 악명 높던 KGB 비밀정보기관의 최고 간부였으며, KGB 소련정보기관에서만 45년간 근무한 베테랑이다. 지난 1983년 대한항공 격추사건 이후 86년에는 KGB대장이 됐으나, 그는 서방세계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거물급 인사였다.

북한과 견준다면 김일성가계 3대에 걸쳐 단 한번 정치적 굴절 없이 건재했던 김영남(28년생/북 최고인민 상임위원장 21년간 역임)과 비교된다. 북한 김영남 역시 그의 주변에는 아무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늘 북한고위층 (제2인자 역할)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잠깐 4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프코브가 주장한 당시 미국-소련 두 강대국간 얽힌 역사적인 현장을 한번 들여다보자.

지난 83년 KAL격추사건 당시 나는 토론토 교포기자였다. 그때 발생한 그 비극적 참사는 소련의 무자비한 민항기 격추사건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보프코브 주장처럼 사고현장의 국제항로 주변에 비슷한 보잉기종류 2대가 더 존재하고 우주에 미 인공위성이 존재했다는 등의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KAL 격추사건 후 곧 한국 KAL 본사로부터 해외기자의 일원으로 당시 새로 건립된 롯데호텔(시청 앞)에 며칠간 초청받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한국 대기업으로부터 처음 초청받은 해외기자 케이스였다. 만38년 전 일이다.

KAL격추당시 소련 최고 권력자는 안드로포프 (서기장 및 주석/84년 사망)였고,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대통령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격추사건 전인 83년 3월, 공산주의 종주국이던 소련을 ‘악의 제국(The Evil Empire)'이라는 호칭으로 맹비난했다. 당시 시대상황은 미-소 양국 간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심리전과 첩보전 등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였다.

이후 다른 얘기지만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 역시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불렀다. 미국 대통령이 특정 국가를 ’악‘으로 지칭하는 것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다. 자국에 반하는 상대국을 <악>으로 규정하면 이 후 <악> 국가에 대해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등 보복조치가 합리화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보프코브가 방한 후 내게 타이핑 해 보낸 일부 편지(글)내용이다. 중복돼 있고재차 설명된 부분에 대해선 양해를 구한다.

-- 당시 구소련과 미국 간에는 냉전이 첨예화되고 있던 시절이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군수업체는 소련 위협을 명분 삼아 최신형 군사무기제작 예산증강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련군사기지와 전략부대가 배치된 극동지역은 특히 미군의 주요 관심지역이 돼 왔다. 극동지역 정찰을 통해 소련의 미사일 방어체계를 비롯한 주요 군사무기소재를 파악하게 될 경우, 군사적 위협대비와 함께 선제공격도 가능하다.

이라크 걸프전의 ‘사막의 폭풍’ 작전이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걸프전에서 이라크는 혹독하게 이 일을 경험했다. 미사일 방어체제에 대한 지식은 ‘사막의 폭풍작전’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실질적으로 이라크를 공격한 미군의 손실을 크게 줄였다.

미-소 첩보전은 양국 진영 팽팽한 긴장감아래 모두 적극적으로 전개됐다. 1983년 9월14일 일본 타임지에는 이 분야 전문가인 데이비드 킨(David Keane)이 밝힌 “인공위성과 정찰항공기가 전자전쟁에선 무기역할을 한다.”며 “소련의 레이더기지 확보에 대한 필요성”을 지적한 내용이 있다. 이 정보가 확보되면 소련 레이다망을 벗어나 무선간섭의 ‘벽’을 통과할 수 있다고 밝혔다.

KGB 보스코브 부의장의 편지
KGB 보스코브 부의장의 편지

이러한 맥락에서 보잉 747 격추사견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자.

당시 항공기 보잉747기는 앵커리지를 이륙해 경로를 벗어난 후 소련 영공에 두 차례 진입했다. 처음에는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포함해 주요 군 시설물이 집중돼 있는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 (러시아 캄차카반도 남동부도시) 북쪽에 위치한 캄차카상공에 진입했고, 다음은 군사적 정보에서 중요 지점인 사할린 남부지역 상공을 통과했다.

당시 상황배경을 보면 9월1일로 넘어가는 새벽, 앵커리지 공항에서 007편 여객기는 국제항로(R-20)를 따라 이륙했다. 6분 뒤 LA발 서울 행 015편도 뒤따라 이륙했다. 015편은 뒤쪽에서 경로를 벗어나지 않은 채 지상 관제탑과 통신을 유지했다. 그때 보잉747기 007 항공편이 원래 일정보다 40분 늦게 앵커리지 공항에서 출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3년 9월20일 소련 키르사노프 공군 사령관은 “KAL 007편이 40분 늦게 출발한 시점(상황)이, 캄차카반도와 사할린 지역에 미 인공위성과 보잉747 여객기가 동시에 ‘출현’하게 된, 절묘한 ‘타이밍’을 연출했다.”고 지적했다.

첫 번째 교차비행은 여객기가 캄차카 상공 진입직전에, 두 번째는 캄차카 영공 진입 뒤 오호츠크 해 상공을 통과할 때였다. 세 번째는 사할린 상공을 통과할 때다. 이때 미 인공위성 전자시스템은 소련 미사일 방어시스템 움직임과 여객기 관제탑 전체를 촬영할 수 있었다. 즉 보잉747기가 촉매역할을 한 것이다.

한 가지 더 배경이 있다. 캄차트카 공항으로 한국여객기가 접근할 때 보잉기와 비슷한 형태의 미 정찰기(RC-135)가 소련 군 레이더망에 포착된 것이다. RC-135기는 최첨단 통신시스템이 장착돼 있어 정찰데이터를 즉석에서 작전본부로 전송할 수 있다.

이 정찰기는 보잉747 비행노선 근처에 위치해 의문이 제기됐다. 동시에 한국여객기 선실에 불이 꺼져 있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했다. 여객기 자체 식별도 안됐다. 지상 관제탑에 답하지 않았고, 소련 요격기 경고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당시 천병인 KAL기장은 어떤 이유에선지 내장된 3중 복제 레이더망을 설정하지 않았다. 비행자체가 정찰목적을 띠고 있었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객기 승무원과 지상관제소간 대화내용 녹음파일이 ‘없다’는 정황으로 볼 때, 운항관련 ‘데이터’ 노출이 통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격추사건당시 일본주재 미 첩보국이 접수한 관제탑과 승무원사이 마지막 오갔던 대화내용이 무척 궁금한 이유다. -- (글 축소)

소련붕괴 후 드러난 사실은, 보리스 옐친 러 대통령이 방한 시 전달한 KAL 블랙박스에도 격추사건 실마리를 풀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천병인 KAL기장(38년생)이 관성항법장치(IHS)가 아닌 수동으로 나침방위보드로 비행한 것이 재확인됐을 뿐이다.

관성항법(유도)장치로 가면 항로이탈이 결코 없는데, 원시적인 수동비행을 택해 정상항로를 수백km이상 이탈한 것이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KAL기장이 관성유도항법 아닌 상식에 벗어난 수동방법을 택했는지 영원한 수수께끼다. 기내엔 기장 외에 부기장과 항공기관사도 있었다.

천병인 기장은 엘리트조종사들 중 최고 엘리트로 인정받았고, 공군조종 간부후보생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했다. 곡예비행단 블루세이버 팀원과 공군예편 후 대통령전용기기장까지 한 베테랑 조종사다. 그가 손쉬운 항법장치가 아닌 나침반 수동비행을 한 미스터리로 인해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다시 말해 사건당일 국제항로(R-20)에는 3대의 항공기가 주변에 존재했으며, 그중 한 대가 KAL기와 유사한 형태의 보잉기로 신형무선연락 체제를 갖춘 정찰기였다고 보프코브는 주장했다.

또 하나는 ‘우주에 미 인공위성이 있었다.’고 강조한 점이다. 보프코브는 우주에서도 같은 위치의 미 인공위성이 소련 방공체계의 레이더 반응을 조사하는 행위를 했다고 단정했다. 미 정찰목표가 바로 소련 군사기지의 전파탐지기(레이더 망)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은 <KAL 007기는 소련 전파탐지기망의 촉매제 역할을 위한 미국 측 첩보이용에 희생됐다>라는 점이 주요 팩트였다.

보프코브는 부연해 “KAL 007편이 이유 없이 앵커리지 공항에서 40분이나 이륙시간을 늦춘 것이, 단지 미 인공위성의 비행궤도 시간대를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풀이했다. 그는 “실지로 미 인공위성 비행궤도가 3번이나 KAL 비행지구를 지나갔다.”고 내게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구체적인 설명으로 “미 위성의 첫 번째 비행은 KAL이 캄차카 반도에 채 닫기 전이었고, 2번째는 소련영공에 진입해 캄차카와 오호츠크 해 상공을 날고 있을 때, 3번째는 사할린 상공을 날고 있을 때.”라며 “KAL이 소련영공통과 시 소련 레이더가 갑자기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 미 위성에 노출됐다.”고 주장했다.

당시는 미소 첩보전이 한창 치열할 때라, 연일 미 정찰기들이 캄차카 반도와 사할린 부근지역에 출몰했던 시기였다. 전자전 관련전문가에 따르면 “레이더 전자 전쟁에는 인공위성과 정찰기가 그 도구로 되어있다.”며 “좋은 본보기가 실지로 이라크 전쟁 시 사막의 폭풍전이 그러했다.”는 주장이었다.

KGB 보브코프 부의장의 대한항공 007기 격추지점 메모
KGB 보브코프 부의장의 대한항공 007기 격추지점 메모

캐나다온타리오 주 수도 토론토 얘기로 잠깐 얘기를 돌린다.

소련의 KAL격추사건이 발생하던 1983년경은 토론토 한인교포사회가 서서히 안정과 성장을 이루던 해였다. 캐나다는 미국과 달라 한인이민역사가 무척 짧다. 토론토 중심가 서쪽거리( Bloor St.)에 코리아 타운도 형성되고, 한인 의사나 변호사 등 2세들의 고급인력 또한 한두 명씩 증가하던 시기였다.

특히 토론토는 지난19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10여 년간 북미 주 북한방문자의 ‘메카’로 소문났다. 미주지역은 물론 남미에서까지 이산가족 찾기 신청으로 밀려들었다. 그 중심에는 친북계 주간지(뉴 코리아 타임스)를 운영하는 전충림 사장(23년생/ 전 조선일보 업무국장 역임)이 있었다. 교포사회에서는 속칭 ‘빨갱이 왕초’라고 악명이 높았지만, 내 시각으론 그는 단지 북을 일찍 다녀온 단순한 이산가족에 불과한 인텔리에 속했다. 당시 경직된 교포사회 분위기로 인해 친북으로 오해받는 측면이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전충림은 지난1962년 캐나다로 일찍 이민(62년)온 초창기 캐나다한인교포 중 한명이었다. 토론토 이민 후 70년대 중반 친형제(누님) 만남을 위해 북을 다녀온 것이 문제 발단이 됐다. 또 독실한 개신교 장로였다. 그러나 방북으로 인해 교회에서 장로 직까지 박탈당하자 ‘아예 남은 인생은 이산가족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고, 그 때문에 ‘해외이산가족 찾기 회’를 만들게 됐다고 내게 말했다.

그때는 내가 30대 초반으로 한창 젊었을 때였지만, 이민교포사회가 결코 간단치 않다고 새삼 느꼈다. 전충림 사장(장로)이 창립멤버인 교회에서 장로 직을 박탈한 장본인이 담당목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목사는 늘 정의와 사랑을 외치는 이름난 성직자였다. 이민생활 가운데 그렇게 위선적인 이중인격자(two faces)들이 도처에 있었다. 그들은 교포사회에서 명사취급으로 대우받는 경우도 자주 목격됐다. 이민초창기에는 학교 가짜동창들도 꽤 많이 발견됐다. 1970년대 시대라 그들은 거짓 학력을 내세워도 학교조회가 가능치 못할 것으로 오판했던 것 같다.

나는 1981년 신문기자(광고국장 겸임)로 일하면서 기사, 광고를 통해 교포모임을 하나씩 만들었다. 캐나다 한인탁구협회, 온타리오 주 강원도민회, 고교 및 대학동문회 등이다. 과거 운동을 좋아하다보니 고교동문야구대회, 배구대회 등도 만든 주역 중 한명이었다. 다만 시간이 소요되는 골프는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골프비용이 적으니 너도나도 즐겼지만, 골프는 무엇보다 시간부담이 컸다. 골프, 낚시 등은 내게는 여유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필자 송광호씨가 토론토 고교동문 배구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면서 기념촬영한 사진
필자 송광호씨가 토론토 고교동문 배구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면서 기념촬영한 사진

이민 초창기 시절이라 외로움에 젖어있는 교포들이 상당수였다. 무슨 모임이다 하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사실 시골이라곤 한번 가본 적도 없는 내가 강원도민회를 앞장서 창립했으니 웃기는 일이었다. 순수하게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정말 찾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내 부모고향이 북 강원도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는가. 성이 ‘은진 송’이니 아마 뿌리는 충청도 은진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강원모임 때마다 내 고향을 묻는데 난감했다. 대지주였던 선친 북고향주소를 대고 적당히 넘겼다. 주소는 ‘북강원도 회양군 회양면 읍내리 198번지’이다. 아무도 회양군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끔 이해 안 되는 일도 있었다. 말투도 그렇고, 고향이 분명 시골인데 고향이 서울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향이 시골이면 아름다운 풍경, 추억하며 얼마나 좋은가. 위대한 인물들 전부 시골출신이 아니던가.

전충림 사장은 1995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내가 러시아에서 특파원으로 상주할 때다. 타계 전까지 그는 북미이산가족을 1천 명 이상 찾아 줘 ‘해외이산가족의 아버지’로 불리던 선구자였다. 토론토 다운타운 스파다이나(spadina) 길가 건물 한 조그만 사무실에서 늘 이산가족서류를 들추고 정리하던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으니 가슴이 먹먹해 졌다.

전 사장 별세 후 그 부인이 이산가족 바통을 이었다. 그러나 이산가족문제 등 북한관련 일은 부인에겐 맞지 않는다고 평소 생각했다. 그녀는 성격상으로나 여러모로 적합한 분이 아니었다. 사람생각은 대동소이한가보다. 실제로 한 토론토 이산가족 부부가 부인 집을 찾아가, “북한 관련 일을 타인에게 양보하라”고 권했다가 노발대발해 혼이 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필자 송광호씨와 전충림사장(고려호텔 앞)
필자 송광호씨와 전충림사장(고려호텔 앞)

교포들 방북신청 경우는 은근히 돈 문제가 개입돼 있었다. 미주 경우는 금액이 많았다. 이산가족이든 사업, 선교사 활동이든 방북요청이 들어오면 일정금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이런 폐단이 없어졌다고 들었다. 일부에서는 대북창구 담당자들이 남의 아픈 이산가족문제를 자신들의 가벼운 소일꺼리처럼 취급한다는 불평도 나왔다.

오래전 얘기지만 언젠가 토론토에 친북 4인방이 생겼다. 방북취재신청을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한때 전 사장 부인을 포함해 그들 4명 멤버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아야 방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중 한명이 토론토 범민련회장이라는 J씨였다. 그는 80년대부터 오늘까지 30년간 늘 혼자 범민련 회장이다. 북에서만 인정해 주는 캐나다 범민련 조직이다. 토론토에서 누가 범민련회원이라고 단 한명 들어본 적이 없다.

예전 평양에 갔을 때 안내원에게 한번 물었다. “안내원동무! 토론토에 J선생이라고 알지요? 범민련 회장.” “예. 잘 알지요. 왜 그럽네까.” “그 선생, 조국(북한)에 가족이 있습니까? 함경도 같은데, 궁금해서요.” “아니야요. 없을 겁니다. 가족 요구하는 얘길 한 번도 못 들어 봤어요.”

전충림 사장부인(27년생) 역시 친척이 없다. 이런 분들이 이산가족문제를 쥐고 있으니 과연 자신 일처럼 애써줬는지 의심스러웠다. 한번은 전사장 부인인솔로 10명 남짓 캐나다교포목사들이 단체로 평양을 방문한다고 들었다. 그때 뉴욕의 절친한 선배인 Y목사가 소식을 듣고 내게 연락이 왔다. 자신도 꼭 동참시켜 달라는 것이다.

“송 기자! 아주 좋은 기회 같은데 나도 함께 갔으면 좋겠네. 북한은 처음이니, 꼭 한번은 다녀왔으면 해.” “그럼 부인 전화번호를 줄 테니 직접 상의해 보세요. 나는 내용을 몰라요.”하고 말했다. “아니야. 토론토에서 서로 잘 아는 사이들 아닌가. 내대신 잘 좀 얘기해 줘요.” “저야 전 사장과 가까웠지, 부인과는 안 친해요. 또 소문이지만 그간 교포들 방북하는데 1천 달러 수수료 얘기도 있습디다. 이번 목사들 경우야 다르겠지만.” “따로 1천 달러를 내고라도 꼭 가고 싶으니, 잘 좀 소개를 부탁해.”하고 끝내 고집했다.

이미 인원이 결정돼 곤란하다는 부인을 설득해 동참을 성사시켰다. 사실 뉴욕 Y목사는 북방선교에 무척 관심 있는 목사였다. 그에게 전화했다. “잘 얘기됐어요. 합류하기로 됐으니 부인에게 전화해서 일정 등을 알아보세요. 그런데 1천 달러는 꼭 기부금으로 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전했어요.” “그럼 당연하지. 고마워요.”하고 좋아했다.

그러나 나중 1천 달러 때문에 좀 옥신각신했다. 부인은 미화1천 달러를 예상했고, 뉴욕 Y목사는 캐나다 1천 달러로 생각해 환율차액 150달러 정도가 차이 났다. 달러구분을 명확히 못 전달한 내 실수도 있지만 보기 딱했다. 그게 무슨 꼭 정해진 금액인가. 두 사람 전부 똑같이 생각됐다. 그런데 방북 중에 큰 사고가 Y목사에게 발생됐다. 나중 캐나다목사 일행이 귀환 후 알게 된 사실이다.

목사들 팀이 평북 구성 시(옛 구성군)를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시기였다. 도처에 아사자와 극빈자 주민들이 쉽게 발견되던 때였다. 어느 장소를 방문했다가 갑자기 Y목사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남을 돕겠다고 시찰 갔다가 쓰러졌으니, 오히려 민폐를 끼치게 된 상황이 된 것이다. 긴급조처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반신불수가 돼 겨우 뉴욕으로 돌아왔다. 정말 살아 돌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지금까지 한쪽 발을 못 쓰는 절음발이 신세가 됐다.

후에 Y목사와 전 사장부인 각각 두 사람으로부터 당시 얘길 들었다. Y 목사에게 “어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어요? 평소 혈압 등 건강체크를 게을리 했던 모양이네요.”했다. 그는 “그때 북 주민들 실태를 보고 쇼크를 받았네. 북한에선 내 진료(병원)비를 내라고 하는데 없어 못 주고 그냥 왔네. 비행기도 안내원 등에 업혀 겨우 올랐어.”라고 한다. 전 사장부인은 내게 무척 못 마땅해 했다. “왜 Y목사 같은 사람을 소개해 골치 아프게 해? 그럼 그가 쇼크 받아 쓰러졌다라고 밖에 뭐라고 말하겠어?”하고 투덜댔다. 어쨌든 북에 함께 간 일행인데, 뜻밖의 사고를 당한 Y목사에 대한 건강상태는 아예 묻지도 않았다.

이후 전 사장 부인과는 오랫동안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토론토 임현수 목사가 평양에 한동안 구금됐을 때 한번 통화를 했다. 임 목사도 당초 (지난97년)부터 전 사장부인을 통해 북을 지속적으로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북한 돕기에 열성을 쏟던 임 목사가 갑작스레 북한에 잡혔으니, 북미주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주목받고 있었다.

“전 사모님! 북한에 있는 임 목사에 대해 무슨 소식이 없나요?” “내가 북에서 어찌 돌아가는지, 거기 형편을 어떻게 알겠어?” “하도 보기 답답해 그래요. 아니 처음부터 임 목사를 평양에 소개하고 함께 계속 다니셨잖아요. 그나마 사모님 외 누가 임목사 소식을 알 수 있겠어요? 그냥 가만히 계시지 말고 좀 움직이세요. 사모님이야 평양에 언제든 갈 수 있고, 거기 고위층도 많이 알고 계시잖아요? 임 목사교회는 토론토에서 가장 큰 대형교회이니 여비라도 받아서 시도해 보세요.”라고 촉구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전 사장 부인이 캐나다를 대표하게 된 건 본인 자의에 의해서 만이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일을 맡은 전경남 (54년생/본명 정영근) 부위원장 때문이었다. 전 부위원장은 해외동포조직을 완전 개인조직으로 여겨 쥐락펴락했다. 캐나다 경우 뉴욕에 나왔다가 직접 전 사장부인에게 캐나다 대표직을 맡도록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지난2001년인가 전경남은 결국 ‘분파주의’로 몰려, 일단 해외조직에선 손을 완전 뗀 것으로 전해 들었다. 그때 북한정부에 대해 놀란 점은 전경남은 정말 분파주의였기 때문이었다. 해외동포들을 차별하고 자기사람 만들기에만 급급해 보였다. 이산가족들 사이에 금세 소문이 났다. 그런 식이면 해외교포 뿐 아니라 북한내부에서조차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순간이 지나면 진실은 언제든 밝혀지게 돼 있다. 시간문제 일뿐이다. 하여튼 한동안 북한은 김용순-전경남-최승철 3인의 막강한 해외체제로 구축된 라인아래 있었다. 내가 아는 한 그들 공통점은 호주가였다는 점이다. 앉은 자리에서 각자 양주 한 병 정도는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애주가요, 폭주가로 이름났던 것이 뇌리에 남아있다.

왼쪽에서부터 전경남(영근), 최홍희, 최승철씨
왼쪽에서부터 전경남(영근), 최홍희, 최승철씨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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