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⑫] S건설입사, 퇴사, 다시 중동으로
[현봉철 회고록⑫] S건설입사, 퇴사, 다시 중동으로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8.02 1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복 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 붐 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사우디아라비아에 심어진 야자수

하루는 소장이 호출을 했다. 나는 감은 잡고 소장실로 들어갔다. 소장은 뭔가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이것 뭐야” 하고 짧게 물었다. 공문이었다. 간단하게 설명을 했는데 답은 없고 보수를 받느냐고 다시 묻기에 약간 받는다고 대답했다. 소장은 “젊은 친구가 돈은…” 하는 말만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공무부장인 김희선 부장과 안효신 과장 등은 소장이 어떻게 나올지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해주니 그러면 승인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 후 프랑스 대사관에서 태권도를 주 3회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 달 두 달 지나니 인원들이 너무 많이 몰려 왔다. 나는 한국식으로 태권도를 가르치지 않고 개개인 눈높이에 맞춰 가르쳤다.

회원 구성은 가족 단위와 여자들이 많았다. 운동이 끝나면 집으로 초대해서 환대를 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현장으로 돌아오면 때로는 자정이 되기도 했다.

내가 당시 현대건설에서 받은 월급이 7십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 3회 태권도 교습을 해서 들어오는 돈은 250~300만원 정도가 됐던 것 같다. 넉 달이 지나니 인원이 태권도 쪽으로 흡수되는 바람에 다른 운동부 팀에서 인원들이 없다고 컴플레인을 걸었다. 그래서 더 이상 대사관을 사용하기가 어렵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논의한 끝에 개인집 옥상에서 하는 걸로 했다. 그러나 환경이 좋지 않아 질서나 집중력이 떨어졌다. 나는 여건이 말할 수 없이 어려지면서 운동을 종료시켰다.

암맘 소망의 집 태권도 심사

그렇게 교육을 해서 몇 개월간 번 수입이 1천2백만원 정도로 불었다. 나는 주변에서 물심양면으로 협력해준 분들에게 롤렉스 시계를 하나씩 선물했다.

그때 그렇게 2년 동안 모은 월급과 태권도로 번 1천만원을 합쳐서 1982년 지금 살고 있는 염창동 집을 2,700만 원에 구입했다. 그 당시 돈이 약간 모자라서 은행에서 융자받은 기억이 난다.

한국으로 귀국하여 본사에 근무하던 중, S사로 스카우트 되어 가는 사람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나도 몇 달 후 회사에 사표를 내고 S종합건설로 이동했다. 사표가 수리되지 않아서, 두 달 동안은 양쪽에서 월급을 받았던 것 같다.

실은 사우디에서 좋은 조건으로 취업하기로 하여 오랫동안 준비하며 기다리다가 비자 발급이 늦어져서 포기했고, 그 후 S종합건설에 스카우트 됐던 것이다. S사 입사 당시에는 리비아 현장에 투입되는 조건이었다. 투입 전까지 본사에 있는 기간 동안 나는 프로젝트 시방서도 살펴보고 스케줄도 짜고 투입자재도 검토하고 인원 투입 계획도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현장 준비를 하는 중 해외 현지 공사가 취소됐다. 열 달째 협상을 질질 끌더니 S종합건설이 실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공사가 취소됐던 것이다.

그때 마침 사우디에서 비자가 나왔으니 빨리 준비해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조금은 망설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다리던 일이라 희망과 포부를 간직하고 떠나기로 했다. 어딘지 무언의 대망이 찾아온 것도 같았다

1983년 11월 S종합건설에 사표를 냈다. 토목부서에서는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금반지도 해 주는 등 많은 환대를 받으며 헤어져야 했다. S종합건설은 근무환경이 너무 좋은 것 같아서 떠날 때 아쉬움도 많았다.

열심히 준비해 열사의 나라 사우디에 도착한 것은 12월이었다. 나는 도착하여 Green Landscaping이라는 회사에서 기술 부장 관리직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이제 큰 포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시작했다.

쿠웨이트 건설현장

계약조건은 월급 약 250만원에 이익금 15%를 받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 돈은 당시 현대건설 이사 월급보다 많은 액수였다. 열심히 일을 해나가자 회사는 조금씩 나아져갔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니 월급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인건비가 일부만 지불되고, 장비 비용 등 기타 사항들이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다. 간접적으로 경영 내부를 들여다보니 분수에 맞게 작은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해야 하는데, 자본 회전이 늦은 큰 프로젝트에 투자하면서 헤매고 있었다. 그동안 얻은 이익금은 장기적인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있었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승산이 없는 곳에 투입이 되고 있었고, 자금회전도 되지 않고 있었다. 회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프로젝트에 투자하며 허황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뜬구름 같은 기대에 부풀어서 계속 투자하고 있는 것이었다. 투입과 산출이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데 투입만을 계속하다 보니 재정 적자가 생기면서 직원 월급이 지연돼 나중에는 직원들의 식생활까지도 위협을 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어려움이 더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 오랜 망설임 끝에 회의에 직접 참석해 협의했다. 나는 협의 끝에 개발과 운영에 직접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위임장(Power of Attorney)을 받았다.

그 후 여러 곳의 개발을 시작했다. 먼저 현금을 회전시킬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동안 친분을 쌓아뒀던 곳을 찾아가서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협력을 구했다. 자본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현지 업체에서 자재를 공급받고 한국건설사에 공급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 자재 일부터 시작했다. 이익은 적었지만, 현금 회전이 빨랐다. 그렇게 여섯 달이 지나면서 밀렸던 월급이 정리가 되고 회사 자산도 많이 확보됐다. 연말에는 총수입에서 지출을 빼고 남은 이익분도 15% 적용하여 받았고 회사도 어려움에서 많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시장도 많이 점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1년이 되어 휴가를 다녀오니 이익금 15%를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개발에 같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현지 마케팅이나 고객 확보는 내가 현대건설에서 쌓았던 신뢰와 각 사와의 관계를 형성해뒀기에 해결할 수 있었고 이로써 회사의 어려움을 극복했던 것이다.

쿠웨이트에서 열린 코리안 스트리트 푸드 페스티벌에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 (한신잠실코아)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1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