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6] “이승만은 망명이 아닌 추방이다” 주장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6] “이승만은 망명이 아닌 추방이다” 주장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8.1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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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이승만 망명설 (동아일보)
이승만 망명설(동아일보)

세상에는 사실 아닌 허구가 정설처럼 알려져 있는 사건들이 있다. 비록 악의 없는 유언비어지만 왜곡돼 인구에게 회자되는 경우다. 이러한 일은 세상사에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리고 일반은 그런 오해와 거짓이 사실처럼 둔갑돼 있는 내용을 알던 모르던 그냥 흘려보낸다. 대개는 사안을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이유가 클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경우는 다르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진실이 드러난다면 바로 잡고, 규명해야 옳다. 나는 해외 현장에서 근 40년을 뛰어다니며 우연찮게 여러 사건과 부딪쳤다. 지난 1981년에 비롯된 해외기자 생활이, 1992년 지방지 모스크바특파원을 거쳐, 북미특파원 이름으로 미국, 캐나다를 넘나들며 접했던 내용이다.

오랜 기간 기자생활이니 아마 남들 같으면 대기자이니, 무슨 특별기자니 영예로운 수식어가 붙었을 것이다. 능력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내 경우는 조그만 지방신문기자로서 내 취재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기사가 적지 않았다. 아무리 특종 거리라도 미약한 지방신문소속 기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그런데 미궁 사건은 내게만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것처럼 자주 일어났다. 정말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운이 좋아 남다른 특별취재를 했다 해도 그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기가 막힌 일은 심지어 지방 소속사 편집 간부들조차 아예 특종의식이란 상실한 듯했다. 중요한 건 어떤 직속상관을 만났느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특종이란 게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로 지방지 간부는 해외 건 관련해선 아예 관심도 없었고, 부정적 시각이 많았다. 관할지역 사회에만 치중돼 있는 탓이다.

명성황후, 고종, 대원군 원본 1894년 석판화(살아생전/ 1895년 시해됨)
명성황후, 고종, 대원군 원본 1894년 석판화(살아생전/ 1895년 시해됨)

대표적인 예가 오랫동안 세간에 뒷말이 많던 민비(명성황후)사진 발굴 건이다. 조선역사에 명성황후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나는 지난 2006년 명성왕후 생전 초상화 (오리지널 석판화/1894년/일본 신양당 발행/오카무라 마사코 화가) 원본을 우연히 토론토에서 입수했다. 그러나 빛을 못 보고 묻혀버렸다. 당시 강원도민일보 편집국장은 초상화발견 자체를 무시했다.

새삼 ‘월간 중앙’에 초상화발굴 건을 게재했지만 이미 김이 빠진 뒤였다. 마침 동시에 LA에서도 한 중앙지 특파원이 어떤 조선시대 궁정여인사진을 명성황후라고 떠들썩하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어느 미 박물관에서 보유 중인 궁녀 사진으로 판명돼 허사로 돌아갔지만, 내가 입수한 명성황후사진 역시 흐지부지 묻혀버렸다.

고종 당시 1894년 을미사변(1895년) 한해 이전에 찍힌 도쿄인쇄소(신양당) 발행의 초상화 진본은 결국 하나의 설에 묶여 있는 셈이다. 그 당시 도쿄 신양당에선 명성황후 초상화제작 6개월 이전 메이지(명치) 천황부처(소현황후)도 찍어냈다. 초상화 크기하고, 비슷한 문양으로 당시 일본 황실소속의 유일한 궁중화가인 오까무라 마사코 (신양당 발행인)의 석판화였다.

그나마 1990년대 초반 모스크바특파원 시절에는 내 지방지 소속사는 5개 신문사로, 부산일보, 대구매일신문, 대전일보 등이 포함돼 있었다. 대구매일신문(한국신문상)과 부산일보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추천으로 비중 있는 기자상을 수상했다. 역시 지방지라도 보다 규모가 큰 신문은 기자 수준이 달랐다. 지금 그 기자 상금(한국신문상/관훈클럽상)은 각 1천만 원이 넘는다.

글 초점이 다소 엉뚱하게 빗나갔다. 이번엔 북한 관련 글 대신 여태껏 항간에 잘못 알려진 사건 하나를 밝히려 한다. <1960년 5월29일 발생한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설>의 오류 지적이다. 과거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망명보도는 결코 진실이 아닌 ‘언론이 정설로 만들어진 허구’였다는 사실이 팩트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 서거 46주년 추도식 (도쿄)
이승만 대통령 서거 46주년 추도식 (도쿄)

그러한 오판역사를 세상에 정설로 부각시킨 사람이 다름 아닌 신문기자였다. 당시 취재보도를 한 20대 후반 Y라는 사회부기자는 한밤중에 회사로 걸려온 익명의 전화제보로 일약 대단한 특종을 한다. 그는 그 제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밤새 이화장(이승만 사저)을 지켜보며 아예 <망명>으로 단정 지은 것이다. 당시 그의 판단이 그렇게 기울게 된 것은 이승만 하야 후 사회 분위기하며, 언론에도 자주 이승만망명설이 대두됐었기 때문이다.

그런 참에 일요일 새벽녘 김포공항까지 이승만 부처 차를 미행하면서, 몰래 전세기편으로 하와이로 떠나는 이승만 부처와 한두 마디 단독 대화를 게재했던 것이다. 그것이 일약 세기의 특종으로 둔갑돼 오늘까지 가짜 대한민국 역사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무한한 언론책임의 두려움을 새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Y기자는 그때 공항에 배웅 나온 허정 수석국무위원(외무부 장관 겸임)으로부터 ‘휴양 차 떠났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호외까지 발행하며 전격 ‘망명’으로 보도했다. 아무도 몰래 일요일 새벽 출국하는 모양새이니 틀림없는 망명으로 오인한 것이다. 그 이승만 망명보도가 곧 우리 역사가 됐고, 언론은 세기의 특종이라고 선전했다. 결국 이승만의 한 달 남짓일시 휴양형식 ‘추방’이 해외임시체류 휴양목적 출국이 ‘망명’으로 둔갑된 이래 오늘까지 그대로 굳어져 있는 셈이다.

어쨌든 추방이든, 또는 망명이든 분명한 팩트는 늦더라도 밝혀져야 한다. 이 진실폭로는 이승만대통령 하야 후에도 끝까지 이승만 곁을 떠나지 않았던 한 경찰관 부부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처음 흘러나왔다. 이박사부처의 하와이출국 직전까지 이화동 사저에서 집안일(집사)을 돌본 한 우석근(29년생) 경찰 간부의 당시 경험담을 통해서다.

한참 세월 후인 ‘2016년 이승만의 망명은 허구’라고 강연한 L기자의 이승만 포럼내용에서 역시 ‘이승만 망명은 오해와 거짓의 역사’로 설명하고 있다. 진실이 아닌 역사는 마냥 숨겨져 있을 수만은 없다. 이승만 망명 관련 내용을 당시 우석근 경무대(현 청와대)경호실 간부를 통해 전한다.

이승만 망명보도 (경향신문)
이승만 망명보도 (경향신문)

나는 지난 2000년대 초반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거주하는 우석근 사장을 만났다. 당시 그는 사우디 수도 리야드 한인회장이며 사업가였다. 또 강원도 국제자문관(강릉출신)이기도 했다. 사실 강원도청 자문관회의에서 처음 그를 알게 됐다. 두세 번 행사에서 그를 마주치자, 그는 내가 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자꾸 이승만대통령 얘기를 꺼냈다. “이승만대통령은 망명이 결코 아니고 추방당했다”는 주장이다. 그의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지난 2005년 강원도민일보에 그의 주장을 첫 기사화했다. 그러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일체 반응도 없었다. 당시 나는 ‘지구촌 강원인’이란 기획기사로 미주지역 강원인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때 우석근 씨를 포함시켰다. 이제 그의 스토리로 통해, 이승만 망명에 대해 ‘추방이냐, 망명이냐’는 그의 견해를 들여다보자.

<우석근 전 경무대경호실 요원(경사)>

1929년생.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30여년 이상 거주하는 한국동포이다. 처음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곳 중동지역의 터줏대감으로 많은 사회적 직함을 갖고 있었다. 리야드 한인회장뿐 아니라 중부지역 한인회장도 겸직했다. 그뿐이 아니다. 중동-아프리카지역 한인회 연합회장, 민주평통 구주 남부, 아프리카, 중동지구 협의회 지회장,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 재단 중동주재위원 등 열거하기에도 바빴다.

강원도 고향에서도 도청 국제자문관과 강릉시 명예협력관으로 임명돼 있고, 재력가 해외동포로 은밀히 구성된 ‘한반도통일연구회(본부 독일)’에도 가입돼 있었다. 해외교포사회의 크고 작은 감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는 내게 해외교포생활, 통일문제 등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건국대통령 이승만 얘기로 화제가 바뀌면서 금세 편치 않은 얼굴이 됐다. “아, 세상에는 이승만대통령이 하와이 망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절대로 그게 아니에요. 당시 민주당에서 추방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씀하세요? 당시 관련해 무슨 증거자료가 있나요?”

그는 자유당정부 출범 후 이승만 부처와 함께 얽힌 자신의 얘길 풀어나갔다. 그는 강릉 기업가의 한 유복한 집안 환경에서 태어나, 해방 다음 해 46년부터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경비대에 편입하면서 간부후보생으로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경무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는 대한민국 건국 초창기부터 정보전문가로서 이승만 정부와 함께 운명을 같이했어요. 1951년부터 경무대에 들어가 24세 때 2살 아래인 경무대 내부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부인 방재옥 씨와 중매로 맺어졌지요.”

송광호와 우석근(오른쪽)
송광호와 우석근(오른쪽)

부인 방씨는 오래전부터 대통령 사가인 이화장 뒷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때의 인연으로 경무대와 이화장 양쪽에서 이승만정권의 마감 순간까지 10여년 세월을 같은 배에서 보내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이승만정부 실각 후에도 아내(방재옥)와 같이 이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당시는 한 달 후엔 미 대통령(아이젠하워)의 한국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민주당 정부가 이 대통령을 속이고, 급히 마련해준 전세 비행기를 마련해 결국 추방한 결과가 됐다는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은 늦어도 한 달 내에 귀국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요. 그래서 대통령부처 짐도 간편히 트렁크 2개와 약품 가방 1개, 타자기 1대가 등 4개가 전부였어요. 이화장 집안에 있는 금붙이 등 귀중품은 전부 두고 떠났습니다.” 그는 ‘망명’이 결코 아니라고 열을 올렸다. “제가 산 증인이에요. 우리 부부가 끝까지 대통령부처를 모셨으니까요.”라며 “만약 진정 망명자 입장이라면 누가 그렇게 귀중품을 전부 두고 그냥 떠나겠습니까?”하고 반문했다.

그러다 4.19가 터지고 곧 5.16군사정부시기인 1966년까지 15년간을 중앙공무원(정보요원)으로 근무했다고 밝혔다. 그는 중앙정보부 초창기 멤버(요원)였다. 박정희 군사정부 때는 중앙정보부 창설을 위해 제1기 중앙정보부요원으로 뛰어다녔다.

우석근 요원은 66년 베트남으로 갔다. 월남전이 한창인 시절이다.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7년간을 베트남에서 활동했다. 그가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고개를 저으니 알 수 없다. 아마 정보전문가이니 그 계통에 종사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73년에는 라오스로 갔다. “그때 나이가 이미 44살이었지요. 라오스에 한국대사관이 처음 세워져 창설요원으로 선발됐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라오스에서 일하던 중 75년 4월30일 월남이 패망하면서 그해 7월 라오스대사관도 곧 철수했지요.”

이승만 대통령 글씨(북진통일)
이승만 대통령 글씨(북진통일)

그것은 당시 동남아 지역이 공산화로 급변화에 따른 조치였다.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베트남과 더불어 공산화되고 있었다. 그때를 마지막으로 그는 9년여 기간 해외공관생활을 완전 청산하게 됐다고 한다. 이승만대통령 사저(이화장)를 지키며, 측근자였던 우씨 부부와 이 대통령 관련해선 더 이상 얘깃거리가 없다.

해외공관 청산 후 우석근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약 5년간 이란, 튀지니와 리비아 등지를 전전하며 해외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다가 50이 넘는 나이에 정착한 땅이 회교국 사우디아라비아. 80년에 사우디에 닿아 30여 년간 상주하며 그 땅에 굳건한 사업뿌리를 내렸다. 동원개발주식회사라는 현지법인체를 설립하고 대표직함으로 비즈니스를 일궜다. 가족도 사우디로 데려왔다. 그러나 사우디는 영주권을 허용 않는 나라다. 이 때문에 2년마다 체류비자를 연장해 가며 계속 살았다.

사우디는 개인사업은 못하나, 그는 노동허가가 있어 회사성장이 빨랐다. 주로 토목공사와 발전소, 변전소, 고압송전선로 등 전기공사 등을 맡았다. 사우디는 ‘라마단’이라는 10월부터 한 달간은 금식기간이 있다. 이때는 다른 나라에 머물며 그도 역시 안식을 취한다. 사우디의 까다로운 환경 때문에 미국 필라델피아에도 거주지를 마련해 놓았다. 미국 영주권도 갖고 있어, 세계가 좁다고 누빈다.

한편 오래전 일이지만 이승만대통령은 살아생전 하와이에서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거부 때문이었다. 결국 1965년 7월19일 90세로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고국으로 운구돼 국민장으로 서울 현충원에 묻혔다. 2년 뒤 부인 프란체스카 역시 그의 곁에 묻혔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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