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칼럼] 해방타운
[대림칼럼] 해방타운
  • 정련 재한동포문학연구회 이사
  • 승인 2021.09.1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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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에서 방영하고 있는 ‘해방타운’이라는 예능프로그램이 있다. 자체 설명으로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절실한 기혼 셀러브리티들이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결혼 전의 ‘나’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관찰 예능프로그램”이라고 하고 있다. 시작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TV를 잘 보지 않기도 하고 언뜻 봤을 때에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인가 싶은 마음에 주의 깊게 보지 않다. 그러다가 최근에 최영재라는 특전사 출신의 대통령경호원의 스토리가 나오면서 처음으로 보게 됐다. 주요 스토리는 이렇다. 가정을 꾸려서 살고 있던 연예인들에게 살림을 모두 구비한 오피스텔을 구해서 일정 기간 독립하도록 하고 그들의 독립생활을 관찰해 방송한다.

최영재가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나는 보기 시작했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는 들어가자마자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그리고 본인의 취미인 ‘총 닦기(진짜 총과 거의 똑같이 만든 모형 총, 총 애호가로서 총 만지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만, 아이와 수시로 놀아줘야 하는 가정에서는 할 수 없는 일)’를 했다. 그러고 나서는 음악을 틀고, 마음껏 긴 시간 운동을 했다. 방송 속 최영재의 모습은, 스무 살 때의 첫사랑인 아내와 결혼하고 두 딸을 낳게 됐는데 아직도 아내 바보에 딸 바보라고 할 만큼 가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직업군인의 정리벽이 있는 그에게 가족과의 생활에는 그만의 고단한 구석이 있다. 집이 정리된 시간이 10분을 넘기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방송을 보면서 격한 공감을 했다.

성격이 급하고 정리벽이 있는 나는 늘 있던 물건은 그곳에 있어야 하고 정리정돈이 돼 있어야 스트레스를 덜 받는 사람이었다. 물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이 모든 것은 엉망진창이 됐고 나의 끝없는 정리와 청소는 늘 단 10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 가족들은 옷은 벗은 곳에, 물컵은 먹은 곳에 놓는 성향이었고 책가방과 소품 등이 바닥에 널려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밟고 다니는 그런 성향이었다. 나는 쫓아다니면서 정리하고 방치했다가 화내고 다시 정리하는 생활을 십수년 간 반복해 왔다. 이런 불편함은 가족 때문에 손이 많이 가거나 피곤해서 오는 피로감이 전혀 아니다. 그냥 정리돼 있는 흐뭇한 그 상태로 음악을 들으며 차 한잔을 하고, 내가 마신 찻잔을 씻고, 누워서 책을 읽고, 다시 보아도 정리된 그런 정서적인 상태에 대한 그리움이다.

나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희망하는가? 책임으로부터라고 하면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도피이다. 나는 나의 배려로 내가 원하지만 누리지 않고 있었던 것들을 잠깐 탐닉하고 싶을 뿐이다. 마치 다이어트를 일상적으로 하다가 어느 날 나에게 치즈케익을 유유히 맛있게 먹을 기회가 언뜻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2017년에 나 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이탈리아의 많은 것이 나를 매료하였고 나는 마음껏 그것들에 빠졌다. 그러면서 느꼈다. 여행지의 아침은, 내가 혼자 일어나서 씻고, 조금 흐트러트린 짐을 다시 들고 길에 오르면 되는 그런 단출한 아침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의 보통의 여행지의 아침은, 깨우고, 씻으라고 윽박지르고 아침에 뭘 입냐며 줄 선 세 식구의 옷을 하나씩 챙겨주고, 마음껏 흐트러진 짐을 다시 정리하는 것, 그런 분주한 것들이었다. 단지 정리정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우리의 짐에 무엇이 있고 그대를 위한 오늘 필요한 짐은 무엇인지에 대한 계획을 공유하는 것이 포함된다. 내 가족의 모든 짐과 모든 일과에 내 손길이 묻어나는 것은, 그렇게 피곤하거나 나쁜 일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탈리아에서의 여유로운 아침은 분주한 직장인의 아침이 아니라, 10분 미리 일어나서 뉴스를 뒤적이며 커피 한잔을 하는 직장인이 된 듯한 느낌을 줄 뿐이다. 이렇게 나는 나의 ‘해방’을 느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 우리는 24시간 영화를 보지는 않고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 24시간 아이에게 봉사만 하고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 있고 원칙이 있으며, 그것을 깨는 지점도 그렇지 않고 이겨가는 지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혼조정 기간 같은 심각한 시간이 아니라 그냥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일상에서의 일탈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 이런 해방타운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비워 둔 집에서 정리정돈 없이 마음껏 벌려놓고 살 수 있는 것이 우리 가족들의 해방타운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누린 해방타운을 되짚어 생각해봤다. 나는 매년 혼자 가는 1박2일 한라산여행을 즐겨왔다. 부작용은 귀가했을 때 폭탄 맞은 집을 수습해야 한다는 점이 있지만, 나에게 제주도 땅을 밟고, 한라산을 꾸역꾸역 등반하며 혼자서 조용히 우럭조림에 먹는 소주 한병이 해방타운이었다.

숨 막힐 정도는 아니어도 내가 조금 힘들다고 느끼는 것, 불행하지 않아도 내가 조금 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우리는 너무 간과하고 살지 않았던가. 본의 아니게 주변에게 연애, 결혼, 육아, 직장생활에 대한 고민상담을 많이 해주는 역할이 돼 버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너무 ‘모 아니면 도’의 사고방식과 선택에 얽매여 있는 것 같다. 직장에 견디기 어려운 이유가 있으나 떠나기는 아쉬울 때, 나는 그냥 새 직장을 알아보면서 새 월급이 꽂히기 전까지만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며 지내보는 것을 권한다. 판을 뒤집지 않아도, 판을 뒤집지 못하더라도 지금보다 조금 나아질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판’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나아지지 못하도록 옥죄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상 대부분 일은 가치관과 인생관에 어긋나지 않으며 사소하고 또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견딜 것과 괜찮은 것들이 만들어진다. 마치 오랫동안 갈망하던 여행일정을 잡아 두면 그 일정을 생각하면서 고단했던 일과 사람이 한결 나아진 것으로 느껴지는 것과도 같다. 나는 두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모두 예정일의 전날까지 근무를 했고, 본의 아니게 임신하는 동안 야근을 매일같이 해야만 하는 바쁜 시간들을 보냈다. 첫 아이 때는 나를 믿어주고 의지해주는 동료들 덕분에 주말 포함 야근을 해도 늘 즐거웠지만 둘째 아이 때는 임산부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을 한껏 받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늘 힘들었던 일도, 그 사람이 말 한마디만 해도 내가 삐딱하게 생각할 만큼 내가 좋아하지 않던 사람도, 나는 뱃속의 그 아이의 엄마가 돼 있다는 마음 때문에 “하하하하 괜찮아”하면서 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손에 박힌 가시 하나가 남 몸에 생긴 암 덩어리보다 아프다고 한다. 하지만 가시는 가시일 뿐 암 덩어리는 아니다. 새로 한 매니큐어가 맘에 들어 누가 내 자리에 커피를 엎어도 괜찮은 그런 날들이 우리에게 수많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세 시간 앉아 고생하면서 한 헤어스타일이나 전전긍긍하다가 새로 사 온 양복 한 벌이나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나의 해방타운이 돼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닌 그렇게 살아지는 것들을 만들어 주지 않았나 싶다.

해방을 원한다면 꿈은 아닌 것이다. 흔히 가지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을 ‘꿈’이라고 표현하지만, 내가 그것을 위해 오늘을 견뎌내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다면 나는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중학교 때부터 나는 가족을 떠나 생활을 하게 됐고 아무도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내가 공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학교생활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2살인 그때 이런 고민이 들었다. 지금의 내가 너무나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그 하루하루로 모여진 나의 미래는 과연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때부터 나는 소설을 읽고 친구와 놀고 가끔 몰래 술도 마셨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나의 일탈들이 결국 나에게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학교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돼 주었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는 나에게 성실한 학교생활은 좋은 학력과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포기는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수많은 갈림길 속에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길일 수 있기에 그 또한 꼭 필요한 것이다. 포기와 일탈은 어느 정도 구분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해방타운’은 꼭 풀 세팅된 오피스텔을 얻어서 나가지 않더라도 군데군데 순간순간 있을 수 있고, 그리고 그런 순간순간을 즐길 준비를 늘 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진정한 나의 ‘해방타운’인 것 같다.

필자소개
북경대학 경제학원 국제경제무역학과 졸업. 동북아신문 칼럼니스트, 재한동포문학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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