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7] 토론토 중심가 영어학원에 북한유학생 출현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7] 토론토 중심가 영어학원에 북한유학생 출현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9.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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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탈북여성의 일명 파이어 족 스토리

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두만강 국경

얼마 전 일이다. 토론토 한복판 캐나다 영어학원에 ‘북한유학생(남)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학원은 토론토에 많이 알려진 유명 캐나다영어학원(한인운영의 영어학원이 아님)이다. 다른 주 밴쿠버, 빅토리아 대도시에도 같은 학원이 있는 전문 어학원이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수업은 잠정 중단된 상태이나, 학원재개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나는 처음 북한유학생의 토론토 출현소식을 전해 듣고 “설마”하고 한 귀로 흘렸다. 하지만 제보자의 경험담을 들으니 꽤 믿음이 갔다. 북한유학생 문제를 두고, 가까운 한 해외교포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북한유학생 건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 교포는 오랫동안 평양을 자주 왕래하는 이산가족이요, 전문학자여서, 평소 북한 실정을 잘 꿰뚫고 있는 편이다. 그는 “특히 북한유학생은 최신 선진과학기술 도입을 위해서는 예전부터 세계 어느 서방국가에도 진출해 있다”고 주장했다. 요즘은 코로나19 발생 이후 방북길이 막혀, 재개통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한다.

나도 그간 북한 주민이 자녀를 중국, 러시아 등 공산국가로 유학시킨다는 얘기를 진작 듣고 있었다. 수년 전 코로나19 발생 전에도 한 해외주재 외화벌이 평양주민이 자녀 2명을 중국 북경대학에 유학시킨 내용을 알고 있다. 북경대학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유명대학이다. 올해(2021) 세계대학순위평가에서 18위를 차지했다. 매년 한국 서울대학교(36위)보다 늘 상위권이다.

내게 이 북한유학생 정보를 준 사람은 같은 토론토학원에서 공부하던 한 탈북 여성이었다. Y라는 40대 초반인 그녀는 여느 탈북자와는 달리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탈북 후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한국에서 외국어대학을 졸업했다. 함경도 고향에선 꿈도 못 꾸던 4년제 정규대학을 서울에서 나와, 제2의 새 인생설계로 출범한 것이다. 먼저 Y 탈북여성이 토론토학원에서 북한유학생을 만난 얘기부터 들어보자. 다음은 북한유학생 관련해 Y와의 일문일답 내용.

두만강 얕은 곳
두만강 얕은 곳

- 토론토에서 언제 어떻게 북한학생을 만나게 됐나.

“지난 2018년 나는 한국에서 고교생 외아들(당시 16세)과 함께 토론토에 왔다. 아들을 유학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학생비자를 얻어 토론토 고교(11학년)에 입학했고, 나는 영어공부를 위해 토론토 중심지에 있는 캐나다 어학원을 다니다 우연히 북한유학생을 만난 것이다.”

- 어떻게 북한학생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나.

“영어학원수업은 오전과 오후에 진행하다. 오후 시간에 나는 회화반을 선택했는데 북한학생과 함께 공부하게 됐다. 한번 그와 대화를 나누니 말씨가 나와 꼭 같은 북한 말투였다. 북한 말은 금세 드러난다. 더구나 반에 학생이라곤 그와 단 둘뿐이었고, 자연히 대화하는 기회가 생겨 관심을 갖고, 눈여겨봤다. 그러나 그 학생도 내 북한 말투를 인식했는지, 가능한 나와 대화를 꺼렸다. 사소한 일을 물어도 대답을 안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어교사의 질문조차 회피하는 경우가 잦았다. 아예 답변하지 않고 묵묵히 있는 것이다. 선생은 그가 없을 때 내게 ‘조이(학생이름)가 좀 이상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그 학생이 북한에서 왔기에 그런 것 같다’는 얘기를 해줄 수 없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아무 말도 안 했다. 그가 북한 청년임을 결정적으로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입은 티셔츠 때문이다. 북한국기가 그려진 내의를 보여 주며 싱끗 웃었다. 그래서 그가 북한에서 온 학생임을 확신했다. 평소 그의 옷차림은 비싼 명품(고급)이 많고, 1천 달러(1백만원) 이상 되는 캐나다 구스(Canada Goose) 로고가 있는 브랜드 패딩을 입고 다녔다. 북한 상류층 자녀라고 생각했다.”

- 그의 나이나 환경은 어떻게 보였나. 얼마 동안 함께 공부했나?

“20세가량으로 보이는 보통 키의 청년이었다. 매달 학원비는 1,800달러이다. 약 3-4개월 공부하다 코로나19로 인해 수업이 중단됐다. 그 학생과 3개월 동안 매일 만난 셈이다. 나는 이제 이민 관련 등 다른 일에 바빠 다시 영어학원에 다닐 생각이 없다.”

- 북한유학생의 환경 등 더 알려 줄 사항은?

“이미 설명했듯 그는 내 북한 말투 때문인지, 또 나이도 많이 차이가 지니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얘기든 사적 대화는 일체 꺼려해, 교류나 소통이 쉽지 않았다. 아마 그의 부모와는 따로 사는 듯싶었으나, 확실히 모르겠다. 그는 혼자 생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튼 남과 대화를 원치 않는 학생에게 자꾸 말을 시킬 수 없지 않나. 특별한 일 없으면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북한 가정집(밀가루 배급)
북한 가정집(밀가루 배급)

북한유학생 관련 내용이나 움직임은 좀 더 코로나19 사태추이를 보며 살펴 나가야 할 것 같다. 다음은 Y가 한국에서 토론토에 온 사연을 소개한다. Y는 서울 어느 큰 회사에 근무하다 자립해, 개인회사를 운영해 꽤 재산을 모았다 한다.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액수는 모르지만, 최소 수십억 이상으로 추정한다. 그녀가 자신의 자산규모에 넌지시 운을 뗐기 때문이다.

“외대 무역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 할 때예요. 회사에서 정밀기계를 수입해 조립 후 재수출했는데, 3억을 투자해 12억을 벌었어요. 내가 조금 외국어(영어, 중국, 러시아)가 가능하니 도움이 됐고, 바이어(구입자)들과 거래를 잘했어요. 당시 내 봉급이 연봉 2,800만원이었지요. 회사에 월급인상을 요구했으나 안 올려줘 그만뒀지요. 후에 내가 농산물(포장, 유통)회사를 개업해 돈을 상당히 벌었어요. 지난번 회사(기계조립수출판매) 때보다 훨씬 더 돈을 벌었지요.”

Y는 토론토에 오자마자 자동차를 구입하고, 한인 타운의 고급 콘도아파트를 렌트해 산다. 아들도 일반교가 아닌 사립고교에 입학시켰다. 한인들보다 캐나다인을 더 많이 알고, 만나고 알고 있다. 한인교포들을 거의 모른다고 한다. 그녀는 요즘 일컫는 일종의 파이어(FIRE) 족에 속하는지 모르겠다. 이는 내 단순한 개인적 추측이다.(FIRE 약자는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파이어 족’이란 ‘40세를 기준해 이전에 부를 이루어 조기 은퇴한 젊은 층을 지칭하는 신조어다. 어쨌든 Y는 사업을 일단 멈추고, 캐나다로 와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있었다. 중국에서 낳은 아들이 한국에 사는 어머니인 Y를 찾아왔고, 결국 외국행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외아들은 중국에서 중학을 마치고, 마침내 서울의 그녀(엄마)와 합류했으나, 한국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들은 우울증에 걸리다시피 했다. 아들은 다른 나라 이주를 원했다. 특히 중국인들이 밀집해 거주하는 토론토를 선호했다. 캐나다는 소수민족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사는 복합민족국가라, 한국보다 캐나다가 더욱 편안한 삶의 터가 될 것 같았다.

캐나다 구스(캐나다 명품 고가 옷)

Y는 내가 예전 접했던 탈북자들과는 특이한 경우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한국에 오자 한국 정부 배려를 활용해 자신의 입지를 차곡차곡 쌓았다. 어떠한 환경 아래에도 이를 이겨냈다. 함경도의 억척스러운 기질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부를 쌓은 대표적인 성공한 탈북자의 표상으로 보인다. 그녀는 3년 전(코로나19 발생 전) 한국에서 고교생 외아들(16세)과 함께 토론토로 왔다.

현재 Y의 궁극적인 캐나다 목적은 무엇보다 캐나다 영주권을 따는 것이다. 투자이민이든, 무슨 조건의 이민이든 영주권 취득이 최우선이다.

당초 Y는 관광비자로 입국했기에 6개월마다 경신해야 하는 비자연장도 간단치 않다. 캐나다는 인구가 혼잡한 온타리오주(토론토 등)보다, 타 주가 비교적 영주권을 따기 쉽다고 평이 나 있다. 이 때문에 Y는 상세한 이민 관련 정보를 위해 앨버타주 캘거리시까지 다녀왔다.

직접 자신의 일제 닛산자동차로 4박 5일간 쉬지 않고 운전했다고 한다. 엄청나게 그 먼 도시(비행기로 4시간 거리)를 밤낮으로 달렸다. 며칠 동안 운전을 하며, 캐나다의 광활한 대륙을 몸소 체험했다. 웬만한 남자들도 꺼리는 장거리 여행을 홀로 극복했다. 대자연 속의 호수들, 태양과 저녁노을을 벗 삼아 로키산맥 국립공원(밴프)까지 관광했다. 일단 자신의 목표를 정하면, 지칠 줄 모르고 부딪치고 행하는, 대담한 40세의 함경도 또순이였다.

한편 Y는 어느 캐나다 촬영 팀을 소개받아 자신의 탈북 발자취를 다큐멘터리로 찍고 있다. 이 다큐 촬영 역시 목적이 있다. 캐나다 이민을 위한 전초작업이며, 비즈니스(판권)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제 힘든 촬영이 거의 끝났다고 전한다. 조만간 작품이 나온다며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북한 첫 수소탄 발명 김정은 서명
북한 첫 수소탄 발명 김정은 서명

나는 지난 8월 이 탈북여성 Y를 처음 만났다. 그러나 진행이 순조롭지 않았다. Y는 지난날 겪은 자신 얘기를 진지하게, 상세히 말하려 들지 않았다. 대충대충 건성으로 건너뛰었다. 그녀가 왜 내 인터뷰 요구에 응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오히려 나를 떠보는 느낌이어서 답답했다. 어쨌든 개성이 강한 똑똑한 여성임에는 틀림 없었다.

Y는 중국에서 아기를 낳고 수년 뒤 중국집 양해 아래 풀려나, 험로를 통해 구사일생 한국을 찾아 들어왔다. 그래선지 세상사에 대해 웬만한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한창때 청춘 시절부터 온갖 세상 풍상을 겪은 탓이리라. 자그마한 키, 연약해 보이는 가냘픈 체구 어디서 그러한 배짱과 강인함, 자신감이 배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탈북여성 Y 관련 얘기가 뒤바뀌었다. 이를 축소시킨다. 그녀는 대부분 탈북여성 경우처럼 1990년대 후반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국경지대에 잠복, 대기 중인 인신매매단을 통해 팔려가 수년간 중국에서 생활하게 된다. 당시 거의 모든 탈북여성이 이 비참한 같은 경로를 거쳤다.

당시 Y는 20대 초반으로 고향 청진을 등졌다. 당시 탈북자들 환경은 대동소이했다. 그녀는 흑룡강 지역 중국인에게 팔려간 후 수년간 하얼빈에서 생활해야 했다. Y는 22세 때 그곳에서 원치 않은 중국인 아들을 낳았다. 그 중국 집안의 4대 독자였다.

Y는 폐결핵 환자로 고생이 많았다. 그 집 중국 할머니가 1년 이상 정성을 다해 약으로 치료해줘 병이 완치됐다고 한다. 사실 탈북자 중에는 결핵 환자가 많다, 토론토 난민신청 탈북자 중에도 결핵 환자로 밝혀져 당분간 병원에 격리된 경우를 목격했다. 한국도 1950-60년대에는 결핵 환자가 많았다. 후진국 시절 유행하던 전염병이다.

북한 우표(50년-광복 5주년기념)

이 인신매매 얘기는 지난 편 이미 언급했다. 마치 18세기 미 남북전쟁 시기나 노예제도가 성행할 때의 현대판 판박이 같았다. 붙잡힌 여성의 나이, 용모, 건강상태 등에 따라 사람가격이 정해져 은밀하게 거래되는 것이다. 탈북자들은 그러한 현실임을 알게 모르게 인지했음에도 사시사철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넜다.

이 때문에 중국 북방지역에서 조선족을 통역으로 낀 인신매매단이 조직, 전문화됐다. 일부 중국인들은 자본금 일체 필요 없는 빈손 투자의 탈북자 사냥사업으로 큰 재미를 봤던 것이다. 탈북자들은 중국말을 모르고 옷차림 또한 남루하니 금세 조선인 신분이 탄로가 났다.

일단 탈북자는 중국 공안이나 끄나풀에게 걸리면 골치 아프다. 거액의 몸값을 치러야 풀려나기 때문이다. 그들 조직세계에선 탈북자 환경을 고려해 그에 해당하는 단가가 아예 정해져 있다. 당시는 에누리 일절 없는 7백만 원(미화 약 6천불) 선이었다. 이도 한때의 지난날 얘기로,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다.

Y 역시 여느 탈북자와 같은 경로를 거쳤다. 중국 도문과 접경한 두만강을 건너자 곧 팔려갔다. 하얼빈과 청도 등지에서 살다가 후에 타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선 북에서 상상 못 하던 4년제 대학공부까지 서울에서 마쳤다. 호주에도 워킹 홀리데이를 이용해 2년간 공부와 일도 하며 돈을 모았다. 이후 자신이 직접 농산물 유통회사를 만들어 수십억 이상 돈을 번 억척같은 ‘함경도 또순이’였다.

그녀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이다. 청진은 이제 북한에서 손꼽힐 정도로 대도시가 됐다. 북한 제2 도시인 함흥이나 (진)남포를 능가할 정도다. 그녀는 청진에서 태어나 청진 밖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사는 이원(함남)지역을 한번 다녀온 적밖에 없다. 청진에서 성장해 학교에 다녔고, 고교 후에는 청진직장(우체국)에서 한 2년 일했다. 청진 우체국에서 모스 부호를 취급했다. 그녀는 3남매이다. 언니 또한 탈북해 서울에서 산다. 남동생은 철저한 김일성 주의자다. 탈북을 종용해도 “아무리 못 살아도 조상 산소가 있는 고향을 등질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고집이 세다고 전한다.

북한 김치공장

중국 생활 수년 후 중국집에서는 “네가 원하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중국에서 애를 낳았다고 중국 공민이 되는 게 아니다. 다만 중국을 떠날 때는 아들은 꼭 두고 가야 한다는 절대조건이 붙었다.

일단 아들을 남겨두고 몽골 등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왔다. 아들은 중국에서 중학생으로 성장했다. 아들은 늘 엄마를 잊지 못하고 찾았다고 한다. 중국집에서도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집과 약속을 굳게 했어요. 1년에 한 번은 꼭 아들을 중국에 보낸다는 조건으로 한국으로 데려왔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아들이 미성년이라 법적으로 나이가 성년(18세)이 될 때까지는 혼자 외국 여행을 할 수 없었다. 또 아들을 한국학교에 보냈는데, 문제가 생겼다. 아들이 한국말을 잘 모르니, 학교에서 ‘떼 놈(되놈)’이라고 놀려대니, 스트레스가 생기고 우울증 증세가 온 것이다. “서울 고층아파트에 사는데, 겁이 덜컥 났어요, 우울증이 심해져 혹시 자살하면 어쩌나 하고요.”

Y는 집에 어느 정도 재력이 있으니, 서방국가 어디이든 이주해 살고 싶었다. 역시 미국, 캐나다가 목표가 됐다. “아들도 외국이주를 혼자 알아봤나 봐요. 아들이 결국 생각한 도시가 토론토였어요, 토론토는 수십만 명 중국인이 거주하고 차이나타운이 엄청 나잖아요. 그래서 캐나다로 오게 됐지요.” 또 Y는 “마침 아들이 2003년생이라 금년 만18세가 됐으니, 어디든 맘대로 갈 수 있는 나이라 중국에도 혼자 갈 수 있어 다행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금년은 캐나다에 첫 탈북자로 리성대(66년생) 북한 베이징 서기관(외화벌이)이 등장한 지 만 20년이 되는 해다. 앞 편에 이미 언급했듯, 그는 지난 2001년 8월 11살 연상인 부인 오순애(55년 생)씨와 아들 창일(당시 만4세) 어린이와 함께 토론토에 불쑥 모습을 나타내, 한때 교포사회가 시끄럽던 기억이 새롭다.

재일교포 출신인 그들 부부는, 그러나 부인만이 토론토에 남편과 아들을 남겨둔 채 다시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탈북자 출신으로는 그 리창일 어린이가 캐나다 첫 영주권을 받았다. 금년 만 25살 청년이 됐겠다. 캐나다 어디에서, 어떻게 성장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실로 궁금하다. 당시 리성대는 캐나다 정부에 거짓 해명 등으로 영주권 발급이 계속 거부되고 있었다.

부인은 북한귀국 후 평양 한 아파트에 거주하게 좼는데, 하필이면 내가 잘 아는 해외이산가족이 사는 같은 아파트였다. 나는 내심 그녀의 안전이 궁금했는데, 무난히 평양에 거처하게 돼 다행으로 생각하던 터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무리 세상이 좁다고는 하지만 어찌 그런 공교로운 일을 내가 경험하게 되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아들 리창일군이 북한 어머니(오성애)를 만나 오랜 회포를 풀 날이 있으리라. 지금도 탈북자로 인해 현대판 이산가족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토론토 교회에서 리성대 부자를 만난 것이 바로 어제 일 같은데, 아! 어느새 20년 세월이 한순간에 흘러갔구나.

평양 추석 보름달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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