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68] 10월의 총성과 동양평화
[유주열의 동북아談說-68] 10월의 총성과 동양평화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1.10.1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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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전국의 서원이 조명을 받았다. 그 무렵 한국 최초의 서원이었다는 영주시 순흥면 백운동 서원을 찾았다. 조선조 중기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때 성리학을 소개한 유학자 안향을 기려 그의 고향 순흥에 사당 겸 서원을 세운 것이 시초였다. 8년 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조정에 요청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기도 했다.

국립공원 소백산(1439m) 기슭에 있는 순흥은 안향의 26대손 안중근 의사의 본관이기도 하다. 안중근의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식솔들을 데리고 멀리 황해도 해주 수양산(946m) 기슭으로 이주했다. 안중근의 증조부는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었으나 조부 안인수는 미곡상을 경영해 부를 축적한 지방호족이었다. 안인수는 당시 평안도 및 황해도에 밀려든 서양문화를 받아들인 계몽인사로 영재(仙童)로 소문난 아들 안태훈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박영효에 의해 해외파견 유학생으로 선발돼 선진문물을 흡수하고 입신출세의 기회를 갖게 됐으나 갑신정변(1884년)에서 개화파가 3일천하로 몰락하자 입신의 길이 닫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수구파조정에 쫓기는 몸이 된다. 안인수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해주에서 다시 북쪽으로 신천군 천봉산(586m) 기슭의 인적이 드문 청계동으로 피신하고 태어날 때 등에 북두칠성처럼 7개의 검은점이 있어 응칠이란 이름을 가진 손자 안중근을 위해 이름난 한학 선생을 초빙 유학을 공부시킨다.

조선이 1886년 프랑스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자 천주교 포교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다. 프랑스 신부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안태훈 안중근 부자는 천주교에 입교하고 조제프 빌렘 신부로부터 베드로와 토마스의 세례명을 받는다. 안태훈은 선조 안향의 유학과 천주교는 서로 적이 아니고 함께 가야할 벗으로 생각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빌렘 신부는 조선의 지정학적 처지와 비슷한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으로 조선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아들뻘인 안중근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빌렘 신부는 당시 유럽 정세와 함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속성에 대해 서로 이야기 하는 등 안중근의 세계관 구축과 동양평화에 대한 신념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준 영적인 아버지요 멘토였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갑신정변 10년 후 동학란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청일전쟁이 발발, 예상을 깨고 일본이 승리해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동 조약에서 패전국 청국은 속국이었던 조선의 독립을 인정했고 조선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로 청국과 대등한 칭제건원의 독립국 지위에 오른다. 다시 10년 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흔든다고 생각한 러시아에 대해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의 독립을 공고히 하겠다’는 명분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를 대한제국에서 손을 떼게 했다.

2차에 걸친 전쟁을 통해 일본이 천명한 ‘대한독립’이라는 국제약속은 전쟁이 끝나자 지켜지기는커녕 반대로 가고 있었다. 일본은 을사늑약(1905년)으로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어서 병합통치하려는 야욕을 감추지 않았다.

일제강점의 먹잇감이 된 대한제국은 빌렘 신부의 고향인 알자스-로렌의 상황과 유사했다. 알자스-로렌은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보불전쟁(1870-71)에서 승리한 독일(프로이센)이 전리품으로 병탄하자 주민들은 국적을 바꾸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국어인 프랑스어 사용이 금지되고 새롭게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가슴 아픈 이야기는 일본어를 새롭게 배워야 할지 모르는 대한제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다.

안중근은 메이지(明治)천황이 세계를 향해 선언한 ‘동양평화와 대한독립’의 약속을 깨뜨려 일본과 세계를 속인 원흉은 일본 총리를 4번 지내고 대한제국의 초대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고 생각했다. 일본 열도의 서쪽 동해안의 외진 지역 하기(萩)의 하급무사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집권세력인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새 정부를 구성한 도막파(倒幕派)의 일원으로 15세의 어린 메이지를 천황으로 옹립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 고메이(孝明)를 독살했고 조선에 와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뿐 아니라 헤이그 특사파견을 핑계로 고종황제를 폐위시켰다. 한일 양국에서 저지른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1909년 10월 소네 부통감에게 통감자리를 물려주고 천황의 자문기구인 추밀원 의장이 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한반도 및 만주지역 문제에 대한 회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은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독립지사 최재형을 찾아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자청했다. 어릴 때 고아로 러시아 선장의 가정에 입양돼 군수업으로 거부가 된 최재형은 안중근을 크게 환영하고 총기 구입 등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사건 후 재판관할권을 고려 러시아 소유 동청철도의 하얼빈역 구내에서 의거가 이루어지도록 주선하고 러시아 변호사까지 선임해 두었다.

오래전 우수리스크에서 추운 겨울 난로처럼 동포들에게 따뜻하게 베푼다고 ‘페치카 최’로 알려졌던 최재형 지사가 살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하얼빈 의거를 앞두고 안 의사가 사격 연습을 했다는 곳을 보고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1909년 10월26일 이른 아침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는 동청철도의 기점이 창춘을 출발했다. 열차가 지나는 역에는 러시아 군인들의 경비가 삼엄했으나 도착지인 하얼빈역의 경우 오히려 허술했다.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가 많은 거류 일본인이 환영할 수 있도록 러시아 측에 특별히 요청한 결과였다.

특별열차는 예정대로 오전 9시 하얼빈역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열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코콥쵸프는 이토 히로부미의 열차로 건너가서 인사를 나누고 20분간 환담을 한 후 그를 안내해 자신의 열차로 옮겨 연회와 회담을 이어갈 예정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코콥초프의 러시아 군대 사열 요청을 받고 복장 문제로 거절했다가 거듭된 요구로 승낙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요인과 악수하는 순간 군중 속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르는 안중근은 브라우닝 권총으로 백발의 키 작은 노인에게 4발을 쐈다. 그중 3발이 이토 히로부미 복부를 타격했다. 안중근은 혹시 해 이토 히로부미 뒤에서 따라오는 일행에게도 3발을 쏘았으나 총소리를 들은 러시아 군인의 제지로 모두 빗나가 주변의 수행원을 부상시켰다. 거사가 성공한 듯 하자 안중근은 전 세계를 향해 “코레야 우라(대한만세)”라고 부르짖고 준비된 태극기를 흔들었다. 하얼빈에서 울린 10월의 총성은 세계를 뒤흔들었고 대한국인의 기백을 만방에 떨쳤다.

이토 히로부미는 급히 부축을 받아 자신의 열차로 옮겨지고 수행 주치의와 하얼빈 거주 일본 의사들이 달려들었으나 이미 과다 출혈로 살릴 수 없었다.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이 확인되자 거사의 성공을 신에게 감사하면서 부상 입은 수행원에게는 미안함을 표시했다고 한다. 하얼빈역에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점과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지점이 표시돼 있고 역사 내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조성돼 있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러시아는 안중근의 신병을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인도했고 고무라 일본 외상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하도록 지시했다. 관동도독부는 러일전쟁 결과 일본이 할양받은 다롄과 뤼순을 중심으로 하는 랴오둥 반도의 일부를 통치하는 일본 관청으로 당시 도독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외증조부 오시마 요시마사 육군대장이었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 유지라는 대의 속에 거사에 성공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유학의 가르침을 받은 천주교 신앙인으로서 안중근의 당당한 모습은 뤼순감옥의 형무관 사이에 존경심을 일으켜 논어 등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한 많은 유묵을 그들에게 남겼다. 안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 유묵을 쓴 감옥의 독방에 놓여 있는 서예 도구와 책상, 의자 그리고 침구 등은 지금도 안 의사의 숨결을 느끼게 했다.

옥중미사를 원하는 안중근의 요청을 받은 빌렘 신부는 일본의 눈치를 보는 뮈텔 주교의 불허지시를 어기고 뤼순을 찾아왔다. 안중근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하듯 큰절을 올렸다. 빌렘 신부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일본 정부의 채근으로 예상보다 빨리 1910년 3월26일 사형이 집행돼 안중근은 계획한 동양평화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서론만 남겼다. 한중일 동북아 3국의 공동은행설립과 공동평화군 창설 그리고 상설 기구인 동양평화회의 조직 등 한중일 평화체제에 대한 안중근의 구체적 구상이 서술될 본론은 미완으로 남게 됐다.

안중근은 유묵을 통해 “일본이 동양의 평화를 보존하기 바란다면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라는 예언적 경고와 함께 순국직전 최후진술로 한일 양국 인사가 서로 협력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바란다는 당부를 했음에도 제국주의 일본은 침략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해 8월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그 후 일본의 군국주의는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더불어 세계 침략에 앞장서서 동양평화뿐만 아니라 세계평화까지 짓밟고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하다가 미국이 투하한 2개의 원폭에 의해 극히 비극적으로 멈춰 섰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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