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③] 신흥무관학교 터: 만주 벌판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떠올리다
[아! 만주③] 신흥무관학교 터: 만주 벌판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떠올리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10.1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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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길림성 통화현 광화진 고려촌 전경
길림성 통화현 광화진 고려촌 전경

대한제국이 멸망할 무렵, 사회 지도층 인사들 가운데는 기존의 영예를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신민회(新民會) 인사들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진정한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신민회 인사들은 대한제국의 명운이 다했음을 느끼고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안창호, 신채호, 유동열 등이 중국 청도에서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한 회담을 가졌고, 이회영, 이동녕 등은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독립운동기지를 물색했다. 드디어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를 최적의 장소로 삼아 이주를 시작했다. 선두에 선 것은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일가였다.

이회영은 가족회의를 열고 가산을 처분하여 가족 전체가 서간도로 이주할 것을 결정했다. 1910년 12월30일, 이회영은 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 등 6형제와 그 가족 50여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의 혁신 유림들도 서간도로 향했다.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을 중심으로 100여 가구가 선후로 나뉘어 서간도로 향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삼원포의 추가가(鄒家街)였다. 추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사용하던 우물(비정)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사용하던 우물(비정)

1911년 4월 추가가 마을 뒤편에 있는 대고산에 300여 명이 모였다. 이는 ‘군중대회’ 또는 ‘노천대회’라고 불렸다. 이 대회에서 향후 실행할 방침 5개 항이 결의되었다. 핵심은 ‘민단적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할 것’과 ‘기성 군인을 재훈련시켜 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인재로 육성할 것’에 대한 문제였다. 경학사는 누구나 농사를 지으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정신을 기반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1911년 5월14일, 추가가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설립 당시에는 교명을 ‘신흥강습소’라고 했다. 일제 관헌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무관학교’라는 명칭 대신 ‘강습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년 후 합니하(哈泥河)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했다. 1912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강당과 교무실을 비롯하여 내무반, 사무실, 숙직실, 식당 등을 갖춘 대규모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새로운 교사가 마련된 합니하로 이전했다.

신흥무관학교를 다닌 김산(본명 장지락)의 구술 기록을 토대로 님웨일즈가 저술한 『아리랑』에는 합니하로 이전한 신흥무관학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다.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산허리를 따라 줄지어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의 학생들이 100명 가까이 입학했다. (중략) 우리는 군대 전술을 공부했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게릴라 전술, (중략) 한국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아주 주의 깊게 연구했다. 그날을 위해 나는 방과 후에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중략) 얼마간의 훈련을 받고나자 나도 힘든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러자 훈련이 즐거워졌다. (중략) 새벽 6시 기상 나팔소리에 전교생이 연병장에 나가 체조를 하고 아침식사 후 조례에 나가 애국가, 독립군 용진가 등을 불렀다.”

추가가 내 경학사 및 신흥강습소 터(비정)
경학사 및 신흥강습소 터(비정)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일환으로 설립됐기 때문에 학비를 받지 않았다. 식사 및 숙식은 공동으로 해결했다. 졸업생들은 ‘신흥학우단’이라는 동창회 형식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군사 실력을 고양했다. 각종 학교 및 노동강습소도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성과가 알려지자 “일제에 불만을 품은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압록강을 건너는 목표가 모두 신흥무관학교를 지원하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합니하에는 중국인이 거의 살지 않아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을 고려촌(高麗村)으로 부르고 있다. 더군다나 산과 강이 둘러 있는 천혜의 요새로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기에도 더없이 좋았다. 신흥무관학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졸업생들은 통화현 쏘배차(백두산의 서편)에 백서농장을 지었다. 1914년 가을부터 밀림을 벌목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수천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군영을 완성했다. 백서농장은 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 군사기지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혹독한 군사훈련은 이후 항일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었다. 1920년 5월부터 중·일 합동수색을 시작으로 삼원포에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했다. 게다가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양민 학살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강화했다. 더 이상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결국 1920년 8월에 폐교되었다. 추가가에서 배출한 제1회 졸업생부터 폐교에 이르기까지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은 본교, 지교, 분교를 합해 3,5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 전경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 전경

이들 졸업생들이 청산리대첩을 이끌었으며, 1920년대 서간도의 서로군정서, 북간도의 북로군정서를 결성하는 데 주역을 맡았다. 1930년대에는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한·중 항일연합투쟁을 전개했으며, 194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창설한 한국광복군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며 국내진공작전을 주도했다. 신흥무관학교로부터 비롯한 독립전쟁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경학사도, 신흥무관학교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곳에는 황량한 벌판만이 펼쳐져 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김일성과 함께 북한의 군사를 주도한 것도 사실이기에 중국 정부에서는 남·북한의 입장을 공히 고려하여 기념비조차 세우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한중교류문화원이 조선족 향토사학자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100년 된 우물을 발견한 것을 당장에 위안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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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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