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8] 북한이 한국보다 앞선 것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8] 북한이 한국보다 앞선 것들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10.22 09:0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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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평양 지하철

북한에 최초 지하철이 개통된 것은 지난 1973년 9월이다. 평양 도시남북을 뚫고 천리마 선(봉화역-붉은별역)이 먼저 생겼다. 수년 뒤 동서로 혁신선(혁신역-락원역)이 연결됐고, 나중 광복역까지 이어졌다. 1987년에는 연장선인 만경대선에서 부흥역이 개통됐다. 교차되는 2개 노선인 전우역과 전승역에서 환승이 가능하며, 총 지하철거리는 35km이다.

대한민국은 1974년 8월15일 서울지하철이 1호선 청량리역에서 서울역으로 첫 개통됐다. 평양지하철이 서울보다 1년 빨리 개통됐지만, 실상 한국국민들은 북한지하철 관련해 아무 정보도 없었고, 관심사도 아니었다.

평양인구는 서울인구의 절반도 안 된다. 서울지하철이 평양보다 늦은 사실은 대한민국 자존심의 문제였다. 일부 주민이라도 서울지하철 개통이 북한보다 늦었다는 사실을 알고 발설하는 경우, 국가보안법에 저촉됐다. 적대세력에 대한 ‘고무찬양’ 죄목에 속했다. 1980년대 초까지는 그런 식이었다.

나는 지난 1989년 1월 처음 평양지하철을 경험했다. 평양지하철은 전쟁(핵) 대피소를 겸해 건설된 때문인지, 지하철 탑승까지의 거리가 길었다. 보통 100m 이상 되는 까마득한 깊이까지 한없이 내려 가야 했다. 하지만 지하철역 내부 건축양식은 웅장했다. 천장과 기둥, 벽은 고급스러운 모자이크 장식이나 대형 벽화, 대리석, 샹들리에 등으로 화려했다. 단순한 대중교통수단만이 아닌 미술박물관처럼 꾸며졌다. 역들 중 영광역이 가장 인상적인 역으로 기억된다.

평양 지하철

약 3년 뒤 92년 러시아 초대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상주하면서, 평양지하철이 모스크바 지하철과 완전 닮은꼴임을 그때 알게 됐다. 모스크바 곳곳의 지하철역시 웅장하고 화려했다. 일종의 미술관, 박물관처럼 건축됐기 때문이다, 평양은 지하철 구조양식뿐이 아니다. 평양 도시전체가 거의 모스크바 축소판이었다. 모스크바는 지난 1935년부터 일찍 지하철이 건설된 이를 모체로 평양지하철은 당시 소련(소비에트 연방)기술원조로 세워졌다고 밝혀졌다.

북한 컬러TV 역시 방영시기가 한국보다 빠르다. 그러나 한국 컬러TV방영이 늦은 것은 순전히 박대통령 고집 때문이었다. 당시 박통은 “아직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컬러TV는 시기상조다”하여 방영을 늦추었기 때문이다. 그때 금성사 등 한국기업에서는 이미 컬러TV를 생산, 수출하고 있었다. 지난 1960-7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한국주민들은 흑백TV나 냉장고도 갖추지 못한 가정이 태반이었다. 한국컬러TV는 결국 박정희 사후 80년대 초부터 비로소 국내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됐다.

나는 북한취재를 하면서 북한이 한국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했던 부문이 있었다. 한의학분야다. 지금은 세월이 한참 지났으니 어떤지 모르지만, 2010년대 전만 해도 북한 한의학(동의학)은 한국보다 앞섰다. 북한 동의학의 세계적인 명망 또한 높았다. 90년대 북한 한의들은 러시아와 스위스 나라에 국외 상주해 있었고, 러시아와 쿠바 등지 국가에서는 북한 동의학을 배우기 위해 유학 온다고 들었다.

나는 모스크바 거주할 때 북한의사에게 서너 번 진찰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당장 담배를 끊어라”며 “심장에 좀 문제(부정맥)가 있다”고 충고를 했다. 방북 때는 갑자기 위장이 탈이 나, 평양 서산호텔에서 한의사에게 직접 대나무 장침을 통해 효과를 본 적이 있다.

평양 지하철

이번에는 북한 고려의학 과학원에서 북 최고 전문의 중 한명인 이도건 부원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그가 상세히 밝혀준 북한 동의학 관련 내용이 좀 길어 요약해 줄였다. 또 서울에서 만난 유명 한의사 탈북자인 정일훈(27년생)선생의 얘길 역시 참고 바란다.

한국에서 한의학이라 부르는 명칭이, 북한에선 오랫동안 동의학이라 불리었다. 그 후 ‘고려의학’으로 바뀐 것처럼 북에선 ‘고려’라는 표현이 많다. 고려연방제를 비롯해, 고려호텔, 고려항공 등등이다. 고려차점(찻집), 고려택시라는 이름도 등장했다. 북한에서 고려의학은 단순히 한의학만을 지칭할 뿐이다. 따로 양의학까지 배합한 학문은 ‘주체의학’이라고 부른다. 한국, 중국과 일본은 한의학으로, 베트남에선 동의학으로 호칭한다.

북한의 동(한)의학은 지난 1888년 8월 세계보건기구에서 처음 비준됐다. 북한 동의학이 국제적으로 정식 세계무대에 등장된 셈이다. 무엇보다 북한 동의학 부문에서 괄목할 점은 ‘침’술이었다. 북한에서는 수술도 침으로 마취시킨다. 침을 통해 마취 수술하는 경지는 1970년대 이전부터 발달됐다고 한다. 한국보다 한수 높은 경지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탈북 유명 한의사인 정일훈 노인도 인정하는 말이다.

평양 과학원을 대표하는 당시 이도건 부원장은 “침 마취수술의 경우 1958년 편도수술에 적용해 효과를 보았고, 산부인과에서 성공적인 침 마취로 비롯됐다”고 말했다. “이어서 침을 통해 맹장염, 팔다리 마취수술과 현재는 복부수술 등 대수술까지 가능해졌다”고 자신했다. 특히 혈압이 많이 떨어졌거나, 급한 수술을 할 때 이 마취법을 사용한다고 설명. 또 귀에 침을 놓으면 유행성 감기도 안 걸린다고 주장했다.

모스크바 지하철 1992년

북한에선 동의학 병원이 대장염 등 소화기계통 질병 치료가 양약보다 훨씬 효과를 얻고 있다. 또 호흡기 질병과 염증성 질환, 안과질환에도 약재로 치료기간을 단축시키며 낫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북한이 국가의료정책 중심을 양의학보다 한의학에 둔 까닭이다, 북한당국은 당초 정책이 1백% 무상치료임을 표방해, 돈이 안 드는 동(한)의학을 중점적으로 연구,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은 매년 4-5월과 9-10월을 약초채취 기간으로 정해 의대생들과 보건 일꾼들을 총동원시켜 산과 들에서 대대적인 약초채취 작업을 벌인다.

이때 약초를 캐러 다니다 숙청된 최승희 무용가를 목격한 탈북자 의사 얘기다. 시베리아 벌목공 의사로 일하다 모스크바에서 한국에 온 최훈철 씨는 “나는 신의주 의대 다닐 때 70년대 함경남도 허천에 가서 약초를 구하다 우연히 수용소 생활하는 최승희 모녀(딸 안성희)를 본적이 있다”고 전했다. 당시 의대생인 최씨는 “그때 정치범수용소가 있는 줄도 모르다가 산속을 헤매다가 수용소경비에 붙잡혀 신분조회를 위해 한나절을 그곳에 억류돼 있었다고 한다. 그때 경비원이 갑자기 “아, 저기 최승희(무용가)와 딸이 나왔네” 해서 보니, 아래 개울가에 완전 거지차림의 여자 2명이 뭔지 빨래하는 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최승희는 세계적 유명인물이니 조금 더 언급하자. 최승희 사망일에 대해 후에 황장엽(1997년 2월 한국망명) 선생과 캐나다에서 전화인터뷰 중 물었다. “북에서 숙청됐다 복권돼 평양애국열사릉에 묻힌 최승희 사망일이 1969년 2월로 돼 있어요. 실상 70년대 최승희를 함경도수용소에서 본 탈북자가 있는데요”하니 “아마 그건 최승희가 숙청된 해를 적용해 사망 날짜를 적었을 거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최승희와  딸 안성희

탈북여성 김영순(무용/37년생)씨는, 자신이 최승희의 생존한 유일한 제자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2003년 탈북 후 곧 나를 만났다. 최승희 고향이 강원도 홍천인 이유도 있다. 탈북자들과는 마주치는 기회를 종종 가졌다. 김진이라는 젊은 탈북여성은 조선 문학 동맹소속 회원으로 월북 작가 이태준과 딸 등 북한가족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탈북무용가 김영순씨는 김정일 부인 성혜림(영화영극)과 학교동기동창이라고 발설했다는 이유로 즉시 잡혀갔다. 죄목 <1호 가계 (김일성가문) 권위와 위신 훼손>이다. 가족들과 함께 악명 높은 요덕정치수용소에 끌려가 9년을 살다 식구들은 다 죽고, 홀로 탈북했다고 한다. 김씨는 “나는 최승희 스승으로부터 직접 민족무용을 배웠고, 조선인민군 협주단 무용배우로 13년간 활동하다가 은퇴했다”며 “당시 최승희는 조선무용가동맹 위원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1967년 체포돼 평남 북창 정치범수용소(북한 명은 북창관리소)에 잡혀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때는 김정일 시대였다.

김씨는 탈북 후 북한 분위기를 묻는 내게 “남한은 북한을 너무 모른다”고 운을 뗐다. 이어 “요즘 김정일은 남한이 너무 자기 뜻대로 잘 이루어지니, 신이 나서 춤을 추고 살 것”이라며 “김일성 유훈이 무엇인가. ‘정치-군사만 틀어쥐고 경제는 관여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남한에서 하루속히 미군을 내보내고, 우리끼리 평화공존을 하자는 것인데, 그런 겉발림 속에 한국정부가 속고 있는 듯하다”고 개탄했다. 또 그녀는 “남한에서 통일에 대한 혼란을 조성해 궁극적으로 적화통일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한국 은인인 맥아더 동상을 철거 시도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전했다.

재미없지만 다시 북한 동의학 얘기를 계속하자.

북한에서 약초 구하는 문제는 만만치 않다, 한 고려의학 과학원 의사는 “약재는 보통 6백여 종이 쓰이나, 일반적으로 2백여 종 약초로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과학원에 따르면 “부족한 약초는 주로 남방(열대) 약초 및 동물성 약재(사향) 등이며 예를 들어 소뿔은 혈액병(백혈병)에 해당하나, 국제적으로 보호 돼 있고, 사향도 뇌졸중이나 풍에 특효이나 많이 얻을 수 없는 단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부족한 약재는 다른 것으로 대체해 대체 효과를 본다는 것이다. 우황청심환을 인조우황으로 대신하거나, 사향(노루배꼽) 대신 함경도 온성이나 함흥에서 나오는 사향 쥐를 이용해 성공적인 실험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또 북한 전역에 약초전문 농장과 작업반을 구성해 약초생산을 전문화, 집약화하고 있다. 보건기관은 물론 학교, 기관, 일반가정에 까지 약초를 심고 재배하도록 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1962년 허준의 동의보감(전25권)을 번역, 임상치료 등에 귀중한 참고서로 널리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의보감은 당시 시대적 배경과 저자의 계급적 제한성으로 인해 일부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치료법들이 쓰인다는 비판도 한다. 어쨌든 북한에서는 주민들의 인식이 양의학보다 동의학을 선호하며 특히 만성병 경우 자신의 병에 맞게 동의과가 낫다고 강조했다. 북한 어디에도 인민병원이나 종합 진료소에 내과, 소아과와 같이 동의과가 있어 자주 그곳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북한에서는 의사들이 한국, 일본과는 달리 현대의학과 동의학을 병행해서 배운다는 점이 특색이다. 평양 고려의학 과학원 부원장은 “현재 북한만이 동의학에 대해 과학적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토론토 이산가족 서예

북한에서 의사가 되려면 7년 과정 중 2년간 예과 및 기초학부(이때 양의학과 동의학을 동시에 배운다.)를 거쳐 3학년부터 본 과정으로 전문과정을 밟는다. 의사가 되고 난 후에도 3년에 한 번씩 재교육을 받으며, 의사에 따라 1년 동안 재교육을 밟는 경우가 있다. 의사라도 시간이 흐르면 잊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양의학 전문의는 동의학 재교육을, 반대로 동의학 전문의는 양의학 교육을 받게 돼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의사들은 누구나 침을 놓을 줄 알고, 뜸과 부황도 부칠 줄 안다.

또 의사들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3년마다 급수시험을 친다. 첫 6급에서 1급까지 있다. 이는 신문기자들도 마찬가지다. 등급이 있다. 한편 고려의학 과학원 내에는 수기치료연구실이 있어 안마, 지압 등으로 약을 안 쓰고 자극을 주어 치료케 한다.

구체적으로는 고려의학 과학원 내에는 5개의 연구소가 있다. 내과연구소, 임상과, 외과연구소, 침구연구소 및 체질연구소 등이다. 침구연구소에는 침, 부황, 뜸, 수기치료가 속한다. 침에는 손침, 전기침, 자석침, 레이저침이 있고, 침이 유기체에 까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또 침구연구소는 경락연구실, 뜸 치료연구실, 부황치료연구실로 구분한다.

이 고려의학 과학원은 보건성 산하로 그동안 이름도 서너 번 바뀌었다. 지난 83년에 조선 동의 과학원 승격됐고, 환자들이 계속 몰려들자 1994년에는 과학원내 동평양 구역에 4만5천평 크기의 동의센터(병원)를 건립했다. 하루 1천명이상 환자를 소화하고 있다고 한다. 이 부원장과의 인터뷰도 아주 오래전 일이니, 지금 얼마나 더 변화되고 발전했는지는 모른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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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21-11-23 17:23:22
또 북한이 우리나라보다 더 우수한건 너무많아서 쓰기어렵겠지만 인심이 좋다는거~!!!!

박혜연 2021-10-25 17:33:10
북한이 우리나라보다 잘살았던건 일본에서 지어준 공장들이 있었고 그리고 1970년대까지는 1인당 국민소득이 740달러~750달러정도로 당시 우리나라는 252달러~286달러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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