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④] 이홍광 흉상: 개 잡이 대원에서 만주 항일 게릴라의 창시자가 되다
[아! 만주④] 이홍광 흉상: 개 잡이 대원에서 만주 항일 게릴라의 창시자가 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10.26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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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이홍광 기념비(흉상)
이홍광 기념비(흉상)

역사적 진실은 쉽게 다가오지 않지만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연계하여 역사적 평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상적 이데올로기로 함구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이 그렇다.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투사로서 대표적으로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을 꼽을 수 있다. 이홍광은 북한이나 중국, 심지어 소련에서조차 ‘만주지역 항일 게릴라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는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홍광이 매우 낯설다.

이홍광은 1910년 경기도 용인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늘 어려웠다. 그래도 10세 되던 해에 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손자의 재능과 의기를 키우고자 했던 조부의 의지였다. 그러나 이홍광은 1년여 만에 퇴학을 당한다. 일본 군관의 자제가 한국인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에 격분하여 폭행을 하고 만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부친 이보경이 1주일 가량 구류를 당했다. 이후에는 일경의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더구나 소작으로 근근이 먹고살던 것이 어렵게 되었다.

1925년, 이홍광은 집안 어른들을 따라 중국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으로 이주했다. 이주 후에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중국인 지주에게 땅을 빌려 소작했지만, 고국에서나 타국에서나 착취는 다르지 않았다. 이듬해에 이통현(伊通縣)으로 다시 거주를 옮겼다. 그러나 이곳에서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이렇게 이홍광은, 어린 시절부터 일제의 탄압과 지주의 수탈을 몸소 겪었다. 어떻게든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이러한 울분이 이홍광의 사상을 지배한 듯하다.

이홍광(李紅光, 1910~1935)
이홍광(李紅光, 1910~1935)

이홍광은 1927년에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中國共産黨滿洲省委員會) 산하의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에 자청하여 가입했다. 그리고 이통현 일대에서 5,000여 명의 조직원이 벌인 농민운동에 동참했다. 이때 이홍광은 중국 군벌 정권의 부패, 일제의 침략, 지주의 수탈 등에 반대하는 군중의 피 맺힌 외침을 들었다. 한국 농민이나 중국 농민이나 오직 원하는 것은 부패와 수탈 없는 세상에서 배불리 먹는 것이었다.

이홍광은 1930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10여 명의 또래들을 모아 인근 쌍양현(雙陽縣) 일대에서 악행을 저지르던 친일분자이자 지주인 장구진(長久振)을 처단했다. 불과 20세에 불과한 이홍광을, 대중은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일제에 의해 만주사변이 벌어지자,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는 일제에 맞설 무장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홍광이 한인 청년 7명과 함께 일종의 적위대(赤衛隊)를 구성했다.

이홍광의 적위대에게 주어진 무기는 소총 1자루, 권총 5정, 수류탄 2발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한인 밀정을 비롯한 일제의 하수인, 만주국 관헌, 일본 군경, 악덕 지주들을 서서히 처단해나갔다. 특히 친일 주구배(走拘輩)를 가혹하게 때려죽였기에 대중들은 이홍광의 적위대를 일러 “타구대(打狗隊: 개잡이대)”라고 했다. 이홍광은 적위대를 통해 농민운동과 항일운동을 동시에 전개했다. 이홍광은 갈수록 저명한 투사가 되어 갔다. 이홍광의 적위대에 투신하겠다는 청년들도 갈수록 늘어 갔다.

홍석랍자(紅石拉子) 항일 근거지 구축 기념비
홍석랍자(紅石拉子) 항일 근거지 구축 기념비

이에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는 1932년 6월에 반석현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이홍광의 적위대를 주축으로 반석의용군을 창건했다. 반석의용군은 한인 청년을 중심으로 일부 만주국 병사를 수용하여 4개 분대 5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를 방관할 리 없었다. 지주들도 개인적으로 자위대를 만들어 반석의용군을 공격했다. 이홍광은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마적 항일부대와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유격대가 마적의 신세로 전락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자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가 반석의용군을 중국 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로 개편했다. 이때 이홍광은 참모장으로서 1933년 1월부터 5월까지 60여 차례의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 전공으로 홍석랍자(紅石拉子)에 새로운 항일 근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이후 이홍광은 남만유격대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던 중국 공산당 계열의 항일부대를 설득하여 연합투쟁을 벌이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마적대를 연합투쟁에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3,000여 명에 달하는 대단위 한·중 항일연합투쟁부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한·중 항일연합부대는 일제와 만주국, 그리고 악덕 지주와 투쟁을 이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남만유격대의 자체 병력도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는 항일투쟁이 점차 격화되고 남만유격대의 역량도 성숙하자, 남만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로 승격시켰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가장 먼저 창군한 중국 공산당 계열의 정규군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1933년부터 일제의 대규모 토벌에 직면해야 했다. 공세를 견디지 못한 여느 항일부대는 투항하거나 세력이 쇠퇴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동북인민혁명군은 꾸준히 그 세력을 신장시켜나갔다.

동흥습격 사건 『조선중앙일보』 신문 기사
동흥습격 사건 『조선중앙일보』 신문 기사

그런데 세력이 커지는 만큼 군수품이 더 필요했다. 이홍광은 군수품을 해결하는 동시에 점차 시들해져가는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1935년 2월에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했다. 대상지로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을 선정했다. 압록강변에 일제의 국경 초소가 밀집해 있는 만주 침략의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홍광은 200여 명의 병력을 두 조로 나누었다. 한 조는 일제 경찰서를 습격하게 했고, 한 조는 일제의 주구배를 습격하게 했다. 이 전투로 일경 6명을 사살하고 밀정 10명을 생포했다. 또 일제 주구배 16호의 집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했다.

물론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국내 진입작전이 꽤 많이 벌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홍광의 동흥습격 사건은 대규모 정규 병력이 국내로 진공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동흥습격 사건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물론 중국 동북에서 발간하는 『대동보(大同報)』에서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일제의 추격이 뒤따랐다. 당시 이홍광은 본계(本溪), 환인(桓仁) 등지에서 기병대를 조직하여 일제 관공서를 타격하고 있었다. 그러다 1935년 3월 15일, 환인 경계 지역에서 일만군(日滿軍) 연합부대와 맞닥뜨려 전사하고 만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이홍광 사후, 그의 동료이자 상관이었던 동북항일연군 총사령관 양징위(楊靖宇)는 그를 “이 세상에서 다시 얻기 어려운 장군의 재목”이라고 했고, 『구국민보(救國民報)』20호(1937년 7월 10일자)는 그를 “동북의 항일 전선에서 가장 존망이 높은 영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라고 했다. 모택동도 1938년 2월에 이홍광의 업적을 찬양했으며, 소련에서도 이홍광의 정신과 활동을 공산주의 체제의 영속성과 관련하여 연구했다. 물론 북한에서는 말할 것도 없겠다.

독립유공자 후손 기념비 답사(한중교류문화원 주최, 2018년 10월)
독립유공자 후손 기념비 답사(한중교류문화원 주최, 2018년 10월)

현재 이홍광의 기리는 기념비가, 당시 함께 활동하던 중국 열사들과 나란히, 이통현(伊通縣) 유사저자둔(留沙咀子屯)에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근간에 이르러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남한 출신 항일 게릴라 지도자였다는 점, 만주사변 후 한·중 항일연합투쟁의 기초를 닦음으로써 오늘날 한·중 관계사에서 주요한 의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항일투쟁이 침체에 빠져 있었을 때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일제에 타격을 주었다는 점 등을 부각시켜 이홍광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어찌 보면 앳된 청년 투사일 수 있지만, 그가 그어놓은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의 한 획은 가히 위대하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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