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⑤] 7인열사능원: 청산리대첩의 보복, 그 학살의 현장에 마주 서다
[아! 만주⑤] 7인열사능원: 청산리대첩의 보복, 그 학살의 현장에 마주 서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11.0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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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일본군 토벌대의 한인 학살
일본군 토벌대의 한인 학살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그리고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 전투 끝에 대파했다. 이에 일본군 토벌대는 도처에서 반인륜적 범죄 행위를 자행했다. 민간인을 상대로 보복성 만행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독립군의 위대한 승리였던 청산리대첩은, 반면 만주지역의 한인들에게는 큰 재앙이기도 했다.

일본군 토벌대는 청산리에서 대패한 직후인 10월26일, 연길현의 23개 마을과 18개 학교, 화룡현의 12개 마을과 19개 학교, 왕청현의 11개 마을과 5개 학교에서 학살을 감행했다. 『연변조사실록』에는 그때의 참혹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 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족 촌락에 대하여 위협, 공갈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그리고 무릇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자가 있으면 즉시 총칼로 찔러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했다.” 바로 경신참변(달리 간도참변이라고도 함)의 서막이었다.

경신참변 당시 일본군 토벌대의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 중 관련한 기념비가 남아 있는 곳은 단 두 곳뿐이다. 길림성 용정시 동성용진 인화촌의 ‘경신참변 장암동 참변 기념비’와 길림성 통화시 통화읍 부강촌의 ‘7인열사능원’이다. 먼저 장암동 참변의 정황이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다. 용정 영국더기(영국의 조계지, 즉 용정 안의 작은 영국 땅) 제창병원의 원장이었던 마틴 박사가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견문기를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장암동 참변 기념비(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동성용진 인화촌)
장암동 참변 기념비(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동성용진 인화촌)

“날이 밝아오자 무장한 일본 보병들은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짜기에 높이 쌓아놓은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이후 모든 촌민들을 밖으로 나오게 호령하고는 나오는 사람마다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마구 사격을 가했다. 아직 숨이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모두 마른 짚을 덮어 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 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했다. 가옥은 전부 불에 타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는데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보였다. … (중략) …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나서도 계속 타고 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도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 (중략) …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 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 (중략) … 큰 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 보니 31개였다.”

장암동 참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튿날 일본군 토벌대 17명은 다시 장암동에 들어와 유가족을 협박하여 무덤을 파헤쳤다. 그리고는 채 타지 않은 시체를 꺼내 뼛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소각했다. 마틴 박사가 목격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혹여 자신들의 만행이 외국의 귀에 미칠까 염려하여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한 것이다.

7인열사능원 전경(길림성 통화시 통화읍 부강촌)
7인열사능원 전경(길림성 통화시 통화읍 부강촌)

한편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던 독립군 간부들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군 토벌대는 신흥무관학교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는 이미 봉오동전투를 계기로 폐교된 터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토벌대는 멈추지 않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지원으로 운영하던 통화현의 배달학교(배달학교)를 핍박했다. 배달학교는 민족주의 교육의 본산으로 신흥무관학교 교과 과정에 준하는 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 청년을 양성하고 있었다.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 토벌대는 배달학교를 습격하여 교장 조용석(趙庸錫, 1861∼1920)을 비롯하여 김기선(金基善), 조동호(趙東鎬), 승대언(承大彦), 승병균(承昞均), 최찬화(崔贊化), 김기준(金基畯) 등 교직원 7명을 포박했다. 원래는 통화현 일본군 주둔지로 압송하여 고문할 예정이었지만, 마침 폭설이 내려 이동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마을 언저리 고갯마루에서 7명의 교직원을 총살했다. 마을 사람들과 학생들은 널브러진 시체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1996년에 김기선 후손의 제안을 중국 길림성 통화현 정부가 받아들여 7인의 능원을 배달학교 터 인근에 조성했다.

7인열사능원 벌초 작업(2020년 추석, 한중교류문화원)
7인열사능원 벌초 작업(2020년 추석, 한중교류문화원)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능원을 관리할 후손들도 스러졌다. 능원은 을씨년스러운 흉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현장을 2018년에 한중교류문화원 관계자들이 확인했다. 송구한 마음에 한식과 추석을 기해 벌초라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 국가보훈처의 중국 동북삼성 항일유적지 개보수 사업의 일환으로 2021년에 7인열사능원이 새 단장을 했다. 진입로를 가설하고, 제단을 넓히고, 울타리를 설치하고, 허물어진 봉분을 세웠다. 선열에게 진 빚을 다소나마 갚은 셈이 되었다.

중국은 만주사변 후 일제의 만행에 대해 “물망국치(勿亡國恥)”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어쩌면, “우리가 당했으니 언젠가는 보복하자!”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치욕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20년 10월9일부터 11월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확인된 학살 피해자만 해도 3,469명이다. 그렇다면 3~4개월에 걸쳐 학살당한 한인들은 대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이런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역사적 의무일 것이다.

“勿亡國恥”(요녕성 선양시 9.18역사박물관 내)
“勿亡國恥”(요녕성 선양시 9.18역사박물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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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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