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9] 탈북민 김련희의 평양 송환 희망 11년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9] 탈북민 김련희의 평양 송환 희망 11년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11.22 07:5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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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김련희 1인 시위. 헌법재판소 앞.

지난 10월 하순 한국방문 시 다큐멘터리 (탈북민) 영화 ‘그림자 꽃’ 시사회에 초대됐다. 그때 다큐 주인공 김련희씨(52세)를 극장 현장에서 만났다. 나는 다른 사람이 그녀 배역으로 출연한 줄로 착각했다. 김 씨 모습이 영화 속 인물과 너무 달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와 달리 안경을 쓰고 있고, 몸도 꽤 수척해 보인 탓이다. 김씨는 지난 2011년 9월 한국에 왔다. 입국한 지 어느새 만10년이 지났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녀는 탈북민(북한이탈주민)이라 할 수 없다. 잘못 입국했기 때문이다. 그녀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다. 

1969년생 김련희는 어릴 때부터 만성간염이란 지병이 있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성인이 됐어도 이 질병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고교졸업 후는 평양 양복공장에서 근무했다. 직장에서도 발병으로 인해 6개월간 평양 병원에 입원했었다. 간에 복수가 자주 찼다. 
그녀는 학창시절 그다지 머리가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원래 희망은 자신 어머니처럼 의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꿈을 접어야 했다. 고교 때 성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양복점 공장기술자다.

북한에선 공장노동자라 해서 의사보다 봉급이 적은 게 아니다. “남편이 의사인데, 제가 월급이 더 많아요. 북한에선 의사라고 돈을 더 버는 직업이 아니에요. 그냥 같은 공무원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녀 말이 맞다. 공산 세계는 직업 구분에 국가봉급 차이가 별로 없다. 이 사실은 예전 내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나를 돕던 통역도우미가 러시아 의사였기에 공산사회 구조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나는 김련희씨를 서울에서 두 번 만났다. 극장 시사회 조우까지 세 번째다. 그녀는 수더분한 평양아줌마에 불과했다. 한국 정부는 이 지극히 평범한 직장(김책 공업종합대학 양복점) 가정주부를 어떻게 간첩으로 단정했는지 알 수 없다. 처음부터 그녀는 중국 땅에서 브로커 꼬임에 잘못 들어온 경우였다. 김련희 자신의 판단 미스로 발생한 사고였다. 

김련희는 한국입국 시부터 평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했다. 그녀의 북한송환 요구는 정치성을 띤 게 아니었다. 한국이 싫고, 북한이 좋아서가 아니다. 평양 가족과 안 떨어지겠다는 게 단 하나 이유다. 평양에 생존해 있는 부모님과 남편, 외동딸이 사무치게 그립다. 혈육과 함께 있겠다는 일편단심이 그녀에게 전부다. 

김련희 강연

한국기관에서 송환 의사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 국가 제도적 규정 등으로 쉽게 가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런 아줌마를 10년 이상 붙잡고 있으니 안타깝다. 그녀는 늘 해외출금조치 상태에 있다. 언제까지 그녀를 남한 땅에 억류시킬 것인가. 새나 짐승도 그들 모성애는 뼈저리게 눈물겹다. 미물이라도 가족보호에 온 목숨을 건다. 

한국에 들어와 그녀는 평양귀환을 위해 나름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로지 혈육이 있는 고향으로 가고픈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해악을 끼친 일도 없다. 그런데도 입국 후 5년간 김씨는 ‘신원 특이자’로서, 한국여권 발급이 안 됐다. 이 때문에 밀항을 꿈꾸고 위조여권을 알아보고, 자진 간첩(셀프간첩)신고까지 했다.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간첩 관련해 기본적인 판별력도 없나. 어쨌든 김련희는 간첩으로 판정 나 감옥(교도소)생활을 했다. 국선 변호사 덕에 2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북녘 가족에 가고픈 고의적 일탈이 그렇게 큰 잘못이고, 범죄행위인가. 그녀가 줄곧 되뇌는 말이 있다. “여기서 억만금을 준다 해도 내 가족에게 달려갈 것이에요.” 그녀에겐 핏줄이 확실히 이념보다 강했다.     

김련희씨를 한국으로 유혹한 브로커(조선족)를 한번 살펴보자. 탈북브로커는 북한 고난의 행군 시 중국에서 처음 생겼다. 그들은 1990년대 말까지 굶주림 때문에 중국 땅에 건너온 북한 여성들을 ‘인신매매’하는 데 일조를 했다. 조선족은 통역역할로 중국 공안 등과 팀을 이루었다. 당시 나이, 신체 조건에 따라 중국 2만위안(약 4백만원)이었다. 일부 조선족에겐 이런 탈북 관련 일이 그때부터 전문직업이 됐다. 

얘기를 줄이자. 그 후 브로커들은 시간 흐름에 양상이 달라졌다. 탈북자들의 한국행 안내에는 조선족만 아니라 한국여권을 지닌 탈북자까지 끼어들었다. 이들은 인도적 측면에서 탈북자를 한국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엄연한 ‘돈벌이’ 작업이다. 그나마 목돈을 챙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시사회
다큐멘터리 시사회

브로커는 탈북민 한 명당 탈북민이 제공받는 총 6백만원 정착금 중 250만원을 받는다. 정부는 탈북민에게 처음 3백은 일시에 주고, 나머지 3백은 3개월마다 1백만 원씩 통장에 넣어준다고 한다. 9개월이 돼야 전액 6백이 끝나는 셈이다.(탈북민은 첫 3백만원 수령 시 250만을 브로커에게 떼어준다)

김련희씨는 “브로커는 중국 내에선 조선족이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큰손은 한국 내 기독교인들과 탈북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또 탈북자 경우를 3가지로 분류했다. 생계곤란 해 북한을 이탈한 주민과 각종 범죄자, 브로커에게 속임을 당해 남쪽에 온 경우 등 셋이다. 특히 탈북자 가운데에는 의외로 범죄자들이 많다. 토론토동포 이민사회 내에 발생했던 2번의 대형 범죄사건도 남녀 탈북자가 각각 일으킨 사기범죄였다.
         
처음 김련희는 자포자기 끝에 두 번 극단선택을 시도했다. 다량의 수면제 복용과 두 번째는 손목동맥을 끊었다. 두 번 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발견돼 목숨을 구했다. 탈북민 김련희 스토리는 입국 4년 뒤 지난 2015년부터 국내외 언론보도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밝혀졌다. 해외에서도 미 CNN, 뉴욕 타임스, 독일 등 김련희 사연을 보도했다. 그때 인권문제가 거론됐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 환기에 그칠 뿐 해결책이 간단치 않다.
          
김씨는 평양에서 병이 회복되자 모처럼 북한당국 허가를 받고, 2011년 5월 중국 큰 삼촌 집에 휴가를 계획한다. 북한여권을 만들어 생애 처음 해외여행이라 들뜬 마음이었다. 평양에서 기차로 신의주를 거쳐 단동에 갔다. 산동성에 사는 친척과는 겨우 연락이 닿았다.(북한-중국 간 우편배달이 보통 20일-1달, 왕복우편이면 2달 걸린다고 함)

문제는 중국 친척집 체류 한 달 후 그녀 간이 다시 나빠진 것이다. 중국에선 외국인 병원비가 비싸다. 북한공민이니까. 친척집을 나와 중국 심양식당에서 치료비를 벌려고 했다. 그때 탈북브로커(조선족)를 만나 귀담아들은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브로커는 “한국에 가면 두 달 만에 큰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여기서 무슨 돈을 벌 수 있느냐. 한국에 가서 돈 만들어 곧 북으로 되돌아가면 된다”는 말을 믿었다. 그때 브로커에게 쉽게 자신의 여권을 내준 것이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곧 실수를 깨닫고 여권회수를 원했으나, 브로커는 “이미 내 손에 여권이 없고 다른 데로 갔다”고 돌려주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시사회
다큐멘터리 시사회

그로부터 4개월 뒤인 그해 9월. 결국 김 씨는 다른 탈북자 7명과 함께 한국에 닿자마자, 즉각 북한송환을 요구했다. 한국정부는 갓 입국한 탈북자를 그대로 놓아줄 리가 없다. 그녀는 조사와 심문을 거듭 당하며 고통의 시간이 쌓여갔다. ‘보호관찰 대상자’로 찍혔다. 경북 경산에 거처가 마련됐다. 처음 경북 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직장근무가 순탄치 않았다. 작업하는 중 경찰 등 정보기관에서 김련희를 찾고, 전화가 계속 오니 어느 직장에서 그녀를 좋아하겠는가.

우여곡절을 겪는 시간 속에서도 남쪽 친구들이 생겼다. 실상 그녀를 지탱케 해 준 것은 따뜻한 남쪽 사람들이었다 한다. 언제인지 북한에 대해 궁금증을 지닌 시민단체와 아파트공동체 등지에서 그녀에게 평양강연 초청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로나19가 발생 전까지 약 5년간 전국에서 강연생활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강연료는 한 번에 20-30만원. 그는 내게 “초청강연은 보통 하루에 2번, 밀려들 때는 한 달에 30번을 할 때도 있었어요”라고 전했다. 

남한 땅을 밟은 한 어수룩한 평양아줌마가 어느 날 하루 대한민국 북한강연 전문가로 변신된 것이다. 사실 한국에는 3만 명 정도 탈북민들이 있지만, 거의 함경도 등 지방에만 살던 주민들이 전부다. 평양 구경 한 번도 못 한 탈북민이 대부분이다. 평양시민 김련희씨 강연에 관심을 가진 남쪽 주민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간 나도 많은 탈북자들을 접해봤지만, 평양 토박이 이탈주민은 처음이었다.(그녀는 ‘평양’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쏟았다. 평양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절로 난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른 얘기부터 꺼냈다. 지난 1960년대 말 KAL(YS-11)기 납북사건이다. 그녀도 과거의 명백한 역사적 팩트를 알고 있는 게 좋을 둣 싶었다. 그녀가 태어난 해인 1969년 12월, 간첩 조 모에 의해 자행된 ‘강릉에서 김포행 항공기(KAL) 납북’사건이다. 당시 승객으로 가장한 간첩이 조종사를 위협해 납북 KAL기를 함경남도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시켰다. 

김련희와 송광호

그때 북측은 남쪽 주민 50명 중 나중 39명을 풀어주고, 11명은 끝내 돌려보내지 않았다. 반세기도 더 지난 옛 사건이지만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일부 송환된 승객들이 가진 기자회견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북녘이 고향인 외할머니와 둘이서 생활해 누구보다 이산가족 슬픔을 이해한다. 해방 직후 태어난 나를 돌보러 38선을 넘은 외할머니는 평생 북녘 고향을 그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KAL 납북사건 당시 항공기 납치로만 그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죄 없는 남녘 주민 11명은 영영 돌려보내지 않았는가.

당시 혈육의 정이 강제로 끊긴 남쪽 가족들은 오늘날까지 한을 안고 피눈물을 쏟고 있다. 너무 잔인한 북측행위였다. 이것은 단지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김련희씨는 그러한 사건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 리가 없다. 내 말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김련희씨와 짧은 대화를 문답형식으로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 평양 어디에 사셨나요? 평양도 서울 강남처럼 중산층 이상 거주지로 알려진 동네가 따로 있는지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중구역에서 태어나, 나중 중구역 다른 동네(교구동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지만, 특권층 동네는 따로 없습니다. 다만 직업별 아파트 구분이나, 평양아파트 입주 순위는 있어요. 첫째가 항일유가족의 4대 자손까지, 둘째 영예군인 가족, 셋째가 당시 철거민들, 넷째가 건설참가자 노동자들과 일반 사람들입니다.(김련희씨 남편은 의사이며, 영예군인이다). 특권층을 말한다면 항일유가족이 되겠지요. 내가 살던 아파트는 20층짜리인데 몇 층에 누가 사는지 전부 알아요. 온 아파트가 한 집처럼 친구처럼 지내요. 또 아파트 배정은 주택배정과에서 하는데 입사증이 꼭 있어야 해요. 부동산업자는 없어요, 개인으로 집을 사고팔수 없습니다.”

- 한국에 오신지도 10년이 지났는데, 평양생활과 차이점은 어때요?
“한국은 막살기는 좋은 것 같아요. 생의 가치나 무게라 할까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살아요. 저는 정치를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평양생활은 사는 느낌이 단단해요. 북 주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 자주권을 지키는 거예요. 자주권은 인생의 가치관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한국은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북에서는 남쪽을 같은 동포로 영리한 민족으로 평을 하는데, 한국은 북이 잘하는 점이 있어도 인정 안 해요. 마치 절대 악같이 생각해요.”

김련희 책
김련희 책

- 김련희씨는 (노동) 당원입니까. 당원과 일반 주민은 많이 다릅니까?
“저는 당원이 아니에요. 당원이 되면 명예와 긍지를 갖습니다. 1995년부터 98년까지 (고난의 행군시기) 많이들 굶어 죽을 때 당원들이 가장 많이 죽었어요. 남부터 위하다가 먼저 죽었지요. 당원이 되기 위해 군대에 많이 갑니다. 제 남편도 군의관으로 지방에서 10년간 가족과 함께 근무했지요. 나중 차량사고로 제대해 영예군인칭호를 받고 평양에 돌아왔어요. 영예군인은 당의 배려와 국가적 혜택을 많이 받아요. 북 관광, 문화시설 등지 어디를 가나 ‘의사, 교원, 영예군인은 우선 봉사합니다’라는 글이 붙어 있지요. 영예군인을 우대하는 기풍이 서 있습니다. 제겐 가족만이 힘이에요, 함께만 있으면 돼요. 억만금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게 가족이에요.”

- 과거 평양에는 늘 전기가 부족했던 걸로 알아요. 지금도 그렇습니까?
“예전엔 그랬지요. 전기는 지난 2008년부터 향상되기 시작했어요. 아침저녁 1시간씩 절전되는 등 매년 좋아지다가, 2012년부터 경제가 안정되면서 완전히 좋아졌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평양에 전기가 남아돌아 중국에 수출한다고 해요.”

- 남북한이 특히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한국은 어디에나 간판이 많고 도로가 아주 좋잖아요. 사회구조는 완전히 다르지요. 북에선 모든 공민(주민)이 한명도 빠짐없이 조직생활을 합니다. 대개 모든 조직에서 주 1회 생활총화를 해요. 총화방식은 보통 12명 남짓 모여서 자아비판이나 상호비판을 하지요. 서로 부족한 점을 조언해 주지요. 비판은 직위 상관없이 하고, 실생활에 반영해요. 그래야 발전할 수 있지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자신이 제일 모르잖아요. 제가 남쪽에 와서 이질적인 것이 일상생활에서 총화나 교육, 학습 등이 전혀 없는 게 달랐어요. 상대에게 잘못을 전달 안 해 주니, 남쪽 사람들 행동 요소요소에서 개인주의, 공명주의가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아마 생활 ‘총화’가 없으니 그런가보다 싶기도 했어요.”

그녀는 40년 평양생전 공산국가에서 획일적으로만 살아왔으니, 삶의 방식이나 세상시각이 자유로운 자본국가와 다를 수 있다. ‘우물 안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지난 2017년에는 그녀를 돕는 남쪽의 ‘평양주민 김련희 송환준비모임’에서 그녀 책을 엮어냈다. 김련희 저서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최근 어디선지 내년 3월 대선 즈음해 문재인 정부가 박근헤, 이명박 전직 대통령을 사면할 것이라는 소문이 귀를 스쳤다. 김련희씨도 제발 고향가족 품에 안겼으면 좋겠다. 대통령 사면 여부와는 별도로. 하루속히 그런 기회가 오길 학수고대한다

김련희와 임수경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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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21-11-26 12:37:57
저도 김련희님 잘알아서요.

박혜연 2021-11-23 16:28:29
다음에는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이곳 대한민국으로 납치된류경식당 종업원 12명 집단납치사건(?)에 대해 올려주세요~!!!!!

박혜연 2021-11-23 16:14:20
송광호 기자님~!!!! 김련희님에 대해 글을 남기셨네요? 잘하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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