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⑦] 양세봉 흉상: 조선혁명군의 위대한 사령관, “軍神”으로 숭앙받다 
[아! 만주⑦] 양세봉 흉상: 조선혁명군의 위대한 사령관, “軍神”으로 숭앙받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11.2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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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1896~1934)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무장투쟁은 193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 한·중 연합작전을 통해 적지 않은 승전을 올리며 대륙의 식민통치를 교란함으로써 일제의 활동을 위축시켰다. 그 중심에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이 있었다. 그는 조선혁명군의 사령관으로 일제 및 만주 군경과 80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이 중 1929년 유하현 추가보전투, 1932년 흥경현 영릉가전투는 정규전을 통해 일본 군대를 격퇴시킨 대첩이었다. 

양세봉은 부하들의 잘못을 따뜻하게 감쌌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나무라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병사들에게는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잎담배를 피운 지휘관이었다. 일제와 가장 오래도록 항전함으로써 일본군 최대의 표적이 된 독립군이었다. 각 단체들이 좌우로 갈려 좌익은 중국 공산당 휘하로 들어가고, 우익은 중국 본토로 옮겨갔을 때에도, 만주지역에 끝까지 남아 일제와 싸운 독립군은 그의 휘하 조선혁명군 500명뿐이었다.

그러다 양세봉이 밀정에 의해 순국했다. 향년 38세. 약관의 나이에 무장투쟁을 시작한 이래 단 한 순간도 총을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 양세봉은 허망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일제가 그의 무덤을 파헤쳐 작두로 목을 잘라 갔다. 목 없는 양세봉은 지금 평양 애국열사릉에 잠들어 있다.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49번 허묘(虛墓)에도 양세봉이 잠들어 있다. 사상이나 이념 또는 권력 투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항일무장투쟁만 전개했던 진짜 독립군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부의 관동군 토벌 결의 기사(왼쪽, 동아일보 1933년 1월 26일자)와 양세봉 사령관 순국 기사(매일신보 1934년 9월 21일자)

양세봉은 1896년에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11살 나던 해에 서당의 머슴이 되었다. 다행히 서당 선생이 양세봉의 재능을 알아보고 2년에 걸쳐 천자문을 비롯한 한학의 기본 지식을 알려주었다. 그러다 1912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양세봉은 17살 나이에 맏이로서 가장이 되었다. 만주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무작정 이민청구서에 도장을 찍었다. 

양세봉은 1917년에 흥경현(興京縣, 지금 신빈현) 사도구(四道溝)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년여 간 소작농을 하고, 1919년에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홍묘자(紅廟子) 사도구(四道溝)로 거주를 옮겼다. 그런데 즈음해서 3.1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만주에서 번졌다. 양세봉은 동생들과 함께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나 평화적인 시위로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오직 무장투쟁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천마산대(天馬山隊)에 가입했다.

이후 천마산대가 광복군총영과 통합했다. 양세봉은 광복군총영을 발판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9년에 삼부(三府)가 해체되고 국민부로 통합되면서 조선혁명군의 부사령이 되었다. 양세봉은 제일 먼저 친일단체인 선민부를 척결했다. 이로써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얻었다. 1931년에 총사령관이 되어서는 만주는 물론 국내 침투작전도 수시로 벌였다. 1932년 한 해에만 16차례에 걸쳐 부대원 101명이 압록강을 건너 군자금 모집과 기관 습격, 친일파 처벌을 주도했다. 

북한 평양 애국열사릉의 양세봉 묘소
북한 평양 애국열사릉의 양세봉 묘소

즉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가 벌인 대토벌작전으로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거나 대부분 연해주로 넘어갔을 때,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양세봉을 군신(軍神)으로 숭앙했다. 그러나 양세봉은 자만하지 않았다. 언제나 온유했다. 한족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산당 계열인 동북항일연군과도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사상이나 이념, 심지어 민족 따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양세봉이 기억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중국 심양의 한중교류문화원은 2018년에 ‘한민족의 독립정신 함양과 새로운 보훈문화 정착’을 목적으로 현충일을 기해 ‘중국 동북삼성 항일독립운동가 후손 초청 좌담회’를 개최했다. 그때 조선혁명군의 지하통신원으로 활동했던 김도선의 손자 김용걸이 참석하여 그의 가족사를 술회했다. 이 과정에서 양세봉의 허망한 죽음과 남겨진 대원들의 비극적인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저는 우리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어요. 그저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내가 듣기로 양세봉 장군이 1934년도 9월16일에 일제 앞잡이 야동양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밀수입한 무기가 있는데, 싸게 내줄 테니까 몰래 보러 가자고 해서 밤에 따라 나섰던 것이랍니다. 그리고는 야동양이 등 뒤에서 총을 쏴서 양세봉 장군이 암살당하셨습니다. 이튿날 독립군들이 양세봉 장군의 시체를 저희 할아버지 집 뒷산에 있는 고구려산성 인근에 묻었습니다. 

한국 서울 국립현충원의 양세봉 묘소

며칠 후에 일본경찰과 일본군대가 양세봉 장군의 시체를 내놓으라고 하면서 저희 할아버지 집을 포위한 채 무덤의 지점을 알아내고는 양세봉 장군의 시체를 파헤쳐서 저희 할아버지 앞에다 갖다 놓고 작두로 양세봉 장군의 목을 자르라고 그랬답니다. 그때 저희 할아버지는 “내가 어찌 우리 사령의 목을 자르겠는가? 이 개놈들아!” 그러니까 일본군 대장이 “너도 양세봉과 똑같은 놈이구나!” 그래서 총을 탕탕 쐈습니다. 이렇게 우리 할아버지가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를 죽인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어요. 우리 아버지를 잡아다가 못 박힌 나무통에 집어넣고 그 통을 굴렸다고 합니다. 그런 과거를 말하면 비참하고 화가 나고 그렇습니다. 당시에 아버지가 받은 고통은 말도 못하지요. 그걸 어떻게 말로 하겠어요? 아버지께서는 원래 술도 못 하셨는데, 너무 괴로우니까 정신도 그렇고 몸도 그렇고. 그래서 술을 마시면 좀 고통을 잊어버리니까, 아버지가 술로 많이 세월을 이겨왔습니다. 이제 지난 이야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요. 

북한은 1960년에 양세봉의 유해를 평양으로 이장했고, 1986년에 애국열사릉에 재안장했다. 사실 양세봉과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의형제 사이였다고 한다. 한국은 1962년에 양세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74년에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허묘(墟墓)이지만 양세봉을 안장했다. 그리고 중국은 1995년에 국민부 본부이자 화흥중학교 터에 양세봉의 흉상을 세웠다. 그러나 2008년에 그 터를 중국인이 매입하면서 현재는 양세봉의 흉상이 강남촌 협피구의 한 골짜기에 서 있다.

양세봉 장군 기념비 탐방(2019.11.2)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에서 양세봉을 기리고 있다. 이례적이며 특별하다. 우리는 독립투사를 ‘선구자’로 우러르고 있지만, 이념이나 사상의 차이는 늘 걸림돌이 되어 왔다. 그러나 양세봉이 실천한 포용은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마저도 어울러 놀라운 역사를 개척했다. 그의 포용은 일종의 초월이었던 것이다.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를 바라고 있는 이때, 우리 모두가 양세봉의 초월을 수용한다면, 그때처럼 새로운 역사적 지평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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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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