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⑧] 항일명장 양기하 기념비: 조선혁명당의 조력자를 수풀에서 만나다
[아! 만주⑧] 항일명장 양기하 기념비: 조선혁명당의 조력자를 수풀에서 만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11.29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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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중국 요녕성 관전현 연강촌 주변의 혼강
중국 요녕성 관전현 연강촌 주변의 혼강

요녕성(辽宁省) 관전현(宽甸县) 연강촌(沿江村), 한쪽으로는 압록강과 합류하는 혼강의 큰 물줄기가 흐르고, 다른 한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저 멀리 강기슭에는 유채꽃이 활짝 피어 장관이다. 어느덧 외길의 비포장도로를 한참 동안 달리고 있다. 이런 외진 곳에도 드문드문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외진 곳에서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하나둘씩 스러져 갔다. 나는 지금 이미 잊힌 어느 독립투사의 흔적을 찾으러 가는 길이다.

마을 앞에 당도했다. 마을이래야 서너 채 외딴집이 고작이다. 산기슭의 남모를 집에 들어가 기념비 위치를 물었다. 어디서 왔느니, 왜 왔느니, 이런저런 것들을 궁금해하더니 저 멀리 산속을 가리키며 가보라 한다. 발걸음은 옮겼으나 어쩐지 불안하다. 과연 찾을 수 있을까. 1시간여, 길도 없는 산속을 헤매다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 모습이 딱했는지 그제야 노파의 아들이 낫을 들고 앞장선다. 수풀 길을 새로이 내가며 산 중턱에 다다르자 기념비가 서 있다. 항일명장 양기하 기념비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항일명장 하산 양기하 기념비(2018년 개보수 이전의 형태)
항일명장 하산 양기하 기념비(2018년 개보수 이전의 형태)

존왕주의적 유교사관을 버리고 공화주의적 인민 주권을 선택

양기하(梁基瑕, 1878~1932)는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 광복군사령부, 임시정부, 참의부, 국민부, 조선혁명당 등을 거치며 20여 년간 독립활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양기하는 그 흔한 회고록 하나 남기지 않았다. 자신의 사상이나 행적을 공표한 적도 없다. 투옥되어 재판을 받은 적도 없기에 취조나 재판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접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양기하가 속했던 단체의 활동 기록 및 일제의 첩보 문서 등에서 산견되는 편린의 자료뿐이다. 

양기하는 1878년에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豆磨面)에서 태어났다. 호는 하산(荷山)이며, 대한제국 말기에 공주군수를 역임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양반가의 자제로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성장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양기하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리고 1919년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유인석의 문인들 및 신민회 계열의 인사들과 협력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했다. 그곳은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할 만큼 한인들이 대거 집거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항일에 대한 의지도 높았다.

양기하(梁基瑕, 1878~1932)
양기하(梁基瑕, 1878~1932)

대한독립단은 남만주 일대에 지단(支團)을 두고 자치행정을 실시하며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대한독립단이 복벽주의 계열의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공화주의 계열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열되었다. 양기하는 민국독립단에 가담하여 선전부장을 맡았다. 대한제국이 배출한 관료였지만, 존왕주의적 유교사관을 버리고 공화주의적 인민 주권을 선택한 것이었다. 민국독립단은 이후 한족회, 대한청년단연합회와 통합하여 대한광복군사령부(大韓光復軍司令部)로 몸집을 키웠다. 이때 양기하는 정보국장으로 일본군의 동태 및 친일분자 색출에 전념했다. 

상해의 외교활동보다 만주의 무장투쟁이 독립으로 향하는 길

망명 후 줄곧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양기하가 느닷없이 상해로 향했다. 상해로 간 이유와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정황상으로 미루어, 안창호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승학을 상해로 불러들였는데, 그때 김승학과 함께 임시정부로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닌가 싶다. 양기하는 1921년 4월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경험을 살려 군무와 교통 분과 상임위원회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혁명군의 참호 및 양기하 순국 추정지(연강촌 뒷산 중턱)
조선혁명군의 참호 및 양기하 순국 추정지(연강촌 뒷산 중턱)

그즈음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세계열강이 1921년 11월에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파리강화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의 꿈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때 양기하는 대표단의 외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후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태평양회의는 한국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도 없이 일본의 국제적 위상만 높여 준 채 끝나고 말았다.

양기하는 무장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하며 싸우는 노병일치(勞兵一致) 단체를 결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1922년 10월에 ‘십 년 내 만 명의 노병을 양성한다’는 목표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했다. 또한 한국 청년들의 중국 군사 교육기관 입학을 지원하며 무장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임시정부는 분열되어 갔다. 양기하는 임시정부의 난맥상에 상심했다. 결국 상해에서 활동을 청산하고 다시 만주로 향했다. 

양기하 묘소(2018년 개보수 이전의 형태)
양기하 묘소(2018년 개보수 이전의 형태)

국민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을 재건하려다 관전현에서 전사

만주로 돌아왔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정립하여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삼부(三府)의 통합이 절실했다. 더구나 1925년 6월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이 비밀리에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가 와해 위기에 직면했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은 일제와 만주 군벌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을 도모했다.

이때 양기하는 참의부 소속으로 삼부의 통합에 전력했다. 그리고 1929년 4월 1일, 국민부(國民府)를 설립했다. 국민부는 양기하를 교육부집행위원, 지방부집행위원, 중앙사판소장으로 임명했다. 양기하는 재만 한인들의 교육, 자치행정, 사법을 책임지며 국민부의 기반을 닦아 나갔다. 또한 국민부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하에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결성했다. 이때 양기하는 조선혁명당의 정치부장으로 활약하며, 때로는 국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때로는 조선혁명군의 고문으로 주변의 신망을 쌓아 나갔다. 

항일명장 하산 양기하 기념비 (2018년 개보수 이후의 형태)
항일명장 하산 양기하 기념비 (2018년 개보수 이후의 형태)

그러다 다시 위기가 닥쳤다. 1931년 9월에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조선혁명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국민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 간부 30여 명이 신빈현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그런데 밀정의 밀고로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양기하는 이제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여 자신이 국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당, 정, 군의 조직 재건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32년 2월, 관전현에 머물다 일제와 만주 군벌의 협공을 받았다. 거친 산야에서 밀고 밀리는 접전을 펼쳤지만, 끝내 부하 장병 10여 명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향년 55세였다. 

한중교류문화원의 양기하 기념비 개보수 사업과 개인적 위로

한국 정부는 양기하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후손들이 어렵사리 건립한 기념비는 그가 전사한 그곳, 그 거친 산야에 외로이 서 있었다. 어느 누구 찾는 이 없었다. 그의 무덤도 수십 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이에 한중교류문화원이 국가보훈처와 협력하여 2018년에 개보수 사업을 펼쳤다. 진입로를 확보했으며 기단을 세워 기념비를 정비했다. 무덤도 정비했다. 한편 그와 함께 전사한 이름 모를 장병들의 유해를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양기하 묘소(2018년 개보수 이후의 형태)
양기하 묘소(2018년 개보수 이후의 형태)

그런데 이 무렵, 내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스텐트 시술을 해야 했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순간이었다. 며칠간 병실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살아난 이유가 있을까? 퇴원 후 출국하여 연구소로 향했다. 어느 직원이 울상으로 내 걱정을 한다. 그래서 웃으며 말했다. “아직 안 죽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거든. 아마도 만주의 항일투사들이 나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아.” 잠시 그렇게 우리는 실없이 웃어댔다.

필자소개
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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