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0] 정해수 사진기자의 북한태권도 취재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0] 정해수 사진기자의 북한태권도 취재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12.09 09: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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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정해수씨는 캐나다 해밀턴(온타리오 주)에 사는 이산가족 노인이다. 지난 1972년 캐나다에 이민 왔다. 근 반세기전이다. 금년 그의 나이 89세. 내년이면 구순이 다가온다. 그가 고향 황해도를 떠난 지 어언 70년 타향살이다.

내가 처음 정 노인을 알게 된 것은 1980년대였다. 30여년 만에 정 노인을 만났다. 같은 토론토 인근에 살아도 교류가 없으면 서로 타국거주나 다름없다. 나는 그로부터 오래전 서예글씨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집 정리 중 그의 선물 글씨를 발견해 문득 그의 근황을 알고 싶었다. 나이가 높으니 생존여부가 궁금했으나 건강하셨다. 노인은 무척 반가워하며 한번 만남을 기대했다. 그는 만 41년 전 최홍희 총재가 북한에 사상 처음 태권도를 소개했을 때 함께 참여했던 유일한 사진기자였다. 당시 찍은 옛 바래 진 사진들은 북한태권도 역사에 기원이 되는 증거자료라 볼 수 있었다.

해밀턴 노인 집을 방문하자 그는 두터운 사진첩 두 권을 꺼냈다. 그는 태권도 내용보다 그때 만난 ‘북한 가족’ 얘기부터 꺼냈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내가 가장 잘한 점이 있다면, 일찌감치 방북해 어머니를 만나고 온 일이요”라며 운을 뗐다.

북한 태권도 평양 공항 어린이 환영

정 노인은 지난날의 방북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 1980년 9월, 그해 정 노인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캐나다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 총재) 장군이 처음으로 북한에 태권도를 소개할 때다.

그가 북한태권도 시범단에 끼게 된 것은 극히 우연이었다. 순전히 최홍희 장군(국제태권도연맹 총재) 덕분이었다. “당시 방북 일은 생각도 못 했어요. 내가 태권도팀에 끼게 된 것은 어느 날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나는 최 장군을 알지도 못했어요. 다만 그때 태권도 시범단으로 가게 된 해밀턴의 한 사범에게 고향 어머니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게 인연이 될 줄 정말 몰랐지요”라고 말했다.

편지 건으로 갑자기 최 총재에게서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 총재는 “당신이 엑스레이 기사로 사진에 조예가 깊다는 말을 전해 들었소”라며 “마침 사진기자도 필요한데 함께 갈 수 있겠냐”고 물어 온 것이다. 그래서 막판에 극적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씨는 특별취재를 위해 새로 일제 아사히 펜택스(Asahi Pentax) 사진기를 구입했다. 정 씨(사진기자)에 대한 항공료 등 모든 경비는 최 총재가 부담했다고 한다. 그 태권도 시범단에 동참케 된 것이 가슴 벅찬 고향 어머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해외태권도(ITF) 시범단원은 최 총재(단장)를 비롯해 총 16명이었다. 정 씨만이 사진사로 유일한 비 태권도인이었다.

북한 태권도 시범단및 북한 관계자와 기념사진

실상 그에겐 태권도 행사보다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 가족 만남이 목적이었다. 나중 고향마을을 찾아 아버지 산소도 다녀와 회포를 풀었다. 태권도 시범 직후 출국 3일을 앞두고서다. 당시 옛 고향산천은 변함이 없었고, 혈육을 만나서는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는 당시 캐나다 이산가족만남의 선봉장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북녘 가족과 만나고 돌아온 후의 동포사회 분위기는 무겁고 차가왔다. 그 이유는 먼저 태권도 북한시범경기로 인해서였지만, 그에게도 오해의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더욱이 어처구니없는 구설수에 휘말렸다.

당시 그는 해밀턴 한 병원의 엑스레이 주임기사였다. 평소 병원에는 엑스레이 검사를 위해 한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어느 날 한 교포여인이 병원을 찾았다가 엑스레이 실에서 북한 풍경 수예품을 보더니 “아, 참 좋네요.” “네. 좋지요.”라고 한 적이 있다.

그랬는데 그녀는 밖에 나가 엉뚱한 말을 전한 것 같다. 정 씨가 병원 방에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놓았다’는 악의적 발언이다. “글쎄 소문엔 내가 북에 다녀오더니 김일성 숭배자가 됐다며, 교회에 안 좋은 소문이 퍼져 있는 거예요.” 그는 일일이 변명도 힘들었다. 그때 교회는 물론 말 많은 한인사회에 일체 발길을 끊었다.

정해수 고향

잠깐 정 노인의 이력을 대충 살피자. 먼저 북한태권도 시범단 내용부터 소개하고, 그 뒤 고향 방문 얘기를 이어가기로 하겠다.

정 씨는 33년 황해도 연백군 배천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해방과 6.25를 맞았다. 집안은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가정의 외아들이었다. 서울에서도 잠시 학교를 다녔으나, 할아버지 고집으로 고향에서 한학(한문과 시)을 배웠다. 6.25 전쟁 시는 고향에서 지하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4후퇴 후 52년 예성강으로 몰래 배 타고 들어온 집안 형을 따라 강화도로 내려온다.

서울에서 엑스레이 기술학교(1회 졸업) 과정을 마쳤다. 한국 개인병원 등지에서 15년간 엑스레이 기사 생활을 한다. 그가 40세 되던 해 1972년 2월, 뉴욕 엑스레이 세미나에 참석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 들렀다. “그때 토론토 고종옥 천주교 신부님 소개로 캐나다 엑스레이 기사 시험을 봤는데, 좋은 점수(85점)를 얻고 합격했어요. 곧 캐나다 자격증을 받고는 토론토에 주저앉았지요.”

정 씨는 토론토에서 현지 이민신청과 함께 취업문의를 했다. 캐나다 병원에서는 인접도시 해밀턴 의료기관을 추천해줬다. 토론토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의 소도시다. 캐나다 영주권도 나오기 전인데 직장(메디컬 센터)부터 잡았으니, 무척 행운이었다.

최홍희 태권도 시범 (평양 을밀대)
최홍희 태권도 시범(평양 을밀대)

그즈음 최홍희 장군(태권도 총재) 역시 캐나다에 망명해 있었다. 최 장군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영주권 획득이 수월했다. 캐나다 정부는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웬만하면 영주권을 쉽게 발급해 주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가족이민도 친척이란 연결고리만 있으면 누구든 영주권을 부여 받던 이민자 황금기였다. 특히 무슨 재능이든 기술을 보유한 자는 영주권 따기는 거저먹기나 다름 없었다.

다만 정 씨는 “그해 직장(병원)휴가 3주를 이미 다 써버려 사실상 갈 수 없는 형편이었지요. 하지만 병원본사에서는 ‘장벽에 막혀있는 북한 어머니를 30년 만에 만난다’고 하니, 간부회의를 통해 특별휴가 3주를 또 허용해 줬지요”라며 당시 고마움을 회상했다.

최 총재에 관해선 앞장에서도 자주 언급했지만, 70년대 초 캐나다 망명 이후 그가 만든 국제연맹(ITF) 태권도는 한국 정부로부터 무척 시달림을 당했다. 박정희 정부는 세계연맹(WTF)을 신설해 최홍희 해외제자들을 압박했다. 한국 정부는 ‘최홍희가 공산주의자’라는 등 유언비어를 퍼트려 가족을 협박하니, 제자들이 한두 명씩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 총재는 1977년 최측근이었던 박종수 사범까지 탈퇴하자 크게 실망했다. 지속적으로 해외제자들이 국제연맹을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최 총재는 고심 끝에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기로 마음먹는다.(훗날 90년대 박종수 사범은 최 총재를 찾아와 그간의 잘못을 사죄하고, 최 총재는 이를 받아준다. 이후 박 사범은 최홍희 타계 시까지 국제연맹 부총재로 움직였다.)

 최홍희-허정숙 평양 지하철

나는 지난 87년 최 총재와 첫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70년대 당시 막바지로 몰리는 그런 상황에서 내 (정통) 태권도가 말살되기란 정말 시간문제였소”라며 “세계연맹(WTF)태권도는 가라테를 모방한 급조된 가짜 태권도”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내가 이승만 정권 때 서울에서 창설한 첫 국제기구 국제태권도연맹(ITF)을 군대 후배 박정희가 정치적(3선개헌)으로 이용하려다 내가 반대하고 캐나다로 망명하니, 김운용을 시켜 만든 게 세계태권도연맹이오”라고 강조했다.

어쨌든 우여곡절 속의 두 태권도 아래 최총재는 불모지 북한에 국제연맹태권도를 태어나게 만든 장본인이 됐다. 그러한 역사적인 순간 정 씨도 북한에 첫선을 보이는 태권도 시범단에 사진기자 명목으로 끼게 된 것이다. 당시는 1980년 가을이다. 최홍희 총재 나이 만 62세, 정 씨는 만 47세 때였다.

당시 북한에 태권도를 전파한 해외태권도 시범단(단장 최홍희) 명단을 밝힌다. 총 태권도단원들 16명 중 지금은 거의 작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위단급 사범부터 순서(등급, 거주지, 국적)를 매긴다.

1. 최홍희 9단 토론토 캐나다(단장) 2. 이석희 7단 해밀턴(캐나다) 3. 이기하 7단 영국(영국) 4. 최선덕 7단 피닉스(미국) 5. 박정태 7단 토론토(캐나다) 6. 한삼수 6단 위니펙(한국) 7. 임원섭 6단 스웨덴(한국) 8. 촬스 세레프 6단 미국(미국) 9. 김석준 5단 뉴욕(미국) 10. 최중화 3단 토론토(캐나다) 11. 폴 도날리 3단 영국(영국) 12. 크레소 브루사 2단 유고(유고) 13. 칼 니코레티 2단 미국(미국) 14. 마이클 코백 2단 캐나다(캐나다) 15. 디미트리스 코스모그로은 2단 그리스(그리스) 16. 정해수 사진기자 해밀턴(캐나다).

북한 태권도 시밤단 첫 소개 (평양 1980년)

태권도 멤버를 분석하면 한인교포(사진기자 포함)가 10명, 외국인 6명이다. 한국 국적자도 2명이 포함됐다. 태권도팀은 1980년 9월15일 드디어 토론토에서 출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 스웨덴에 닿았다. 정 씨는 “그때는 북한 사람 머리에 뿔이 달렸다는 등 말이 있을 때예요. 한 북한 외교관이 ‘선생님들, 조국방문은 처음이시죠?’라는 소리에 안심하고 대화를 시작했어요.” 스톡홀름 북한대사관에서 북한사증(비자)을 받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때 스웨덴 대사관 염 참사가 정 씨에게는 “황해도가족에게 미리 만나는 통지를 전할 것”이라고 일러줬다. 실지로 태권도 시범경기가 끝난 뒤, 출국 3일을 남기고 고향 황해도로 안내돼 가족을 만났다. 당시 정 씨 사진과 자료기록 등을 소개한다.

당시 북한으로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스웨덴에서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두 번 시베리아에 기착했다가 목적지 평양으로 날아갔다. 평양 순안공항에 닿으니 날짜가 9월18일이 됐다. 평양공항에는 정준기 부총리와 허정숙 여사, 홍기문 선생 등 정부 고위층 인사들이 시범단을 정중히 맞아주었다.

주민 1천여 명이 깃대와 꽃을 들고 늘어서 대대적인 환영을 했다. (첨부사진). 남북이 만35년 만에 공식적 대표단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최 총재는 나중 내게 “정말 감회가 깊었네. 시범단을 데리고 온 보람을 느꼈네.”라고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북한 고위층에게 “여기 온 사범들은 공산주의를 좋아하지 않으니, 사상전환을 시키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북한 태권도 첫 상륙 공항연도 환영 인파

당시 수석제자인 박정태 사범은 “우리가 트랩에 내리자 악대주악이 울리고 어린이들이 꽃다발을 증정해줘 놀랐다”고 전했다. 공항에서 버스로 시내를 지날 때는 연변에 시민들이 늘어서 환호했고, 곳곳에 ‘WELCOME’(웰컴)이라고 쓴 아치와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생각 못 하던 대환영 분위기였다. 예상외로 평양주민들의 열띤 대우에 모두 얼떨떨했지만, 한 면으론 개선장군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박정태 수석사범과 정 노인이 밝힌 종합내용>.

태권도 시범단 숙소는 보통강 호텔이었다. 호텔 내부나 북한 안내원 옷 등은 서구보다 뒤떨어졌으나 실용적 차림새로 보였다. 일행 중 한 명이 여성 안내원에게 농담으로 “옛날부터 평양기생이 유명한데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안내원은 “우리 사회는 기생이 없는 사회예요”라고 차갑게 잘라 말해 무안을 당했다.

태권도 시범 전날 ‘조선체육지도위원회 김유순 위원장’이 시범단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사실 태권도 시범단의 공식 초청자는 김일 부주석 승인 아래 김유순 체육위원장이었다. 첫 시범경기는 평양체육관에서 열렸다. 그때 평양시민 2만2천명이 몰려들었다. 예상외 인파에 놀랐다.

북한 태권도 첫 시범단 평양

다음날에는 더 많은 3만 명이 입장해 출입구 대형 유리창이 깨지는 등 큰 소동이 있었다. 밀고 밀리는 군중들은 전혀 질서가 없었다. 2시간 동안 벌이는 태권도 시범은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깨뜨리는 장면이나 묘기가 펼쳐질 때마다 시민들은 환호했다.

그때 북한에서도 격술을 선보였으나 태권도와는 비교가 안 됐다. 나중 박정태 사범은 “격술은 태권도보다 기술이 많이 떨어졌어요. 격술 고단자들과도 세미나를 갖고 기술을 검토, 비교하기도 했지요”라고 밝혔다. 태권도 시범은 평양뿐 아니라 북강원도 수도 원산에서도 가졌다. 원산과 금강산관광을 할 때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도 태권도 시범을 선보였다. 지방에도 대단한 반응으로 무척 인기를 끌었다.

지방에서 평양으로 올라오자, 허정숙 부수상 겸 조선평화통일위원장 주최로 <평양시민환영군중대회>를 인민문화궁전에서 열었다. 평양시민 1만5천명이 참가해 큰 잔치 분위기였다. 체류기간 춘향전, 안중근 의사, 광주사태에 관한 영화, 교예(서커스)도 보여줬다. 고구려 고분도 구경했다. 전부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태권도 시범행사가 끝난 뒤 최 총재는 함경북도 형님, 동생 등 가족에게, 정해수씨는 황해도 어머니 등 친척을 만나러 고향을 다녀왔다. 박정태 사범은 “평양을 떠나던 날 순안공항에서 ‘조국통일만세’를 불렀어요. 그건 그곳 사정대로, 짜여진 각본대로 따라 했을 뿐, 일종의 예의지요. 진심으로 김일성을 위해 만세 부른 사람은 누구 단 한명 없지요. 나중 보니 그게 큰 문젯거리로 비난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정해수 서예 글(송광호기자에게 쓴 내용)

‘로마에 가면 로마식을 따라야 한다’는 오랜 속담이 있다. “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로마에 가면 로마인처럼 행동하라.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라는 말이다. 누가 그들 행위를 나쁘다고만 단정할 수 있을까.

어쨌든 북한에서의 태권도 시범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나중 최 총재는 내게 “약 2주간 북한 태권도시범 후 출국 비행기에 올라탈 때였네. 정준기 부총리가 내 손을 잡으며 ‘우리가 태권도를 하기로 결정했으니 우수한 사범 1명을 보내주기 바라오’하고 말했네.” 나는 즉시 “3개월 내로 사범 1명을 보내기로 약속했지. 그야말로 기대 이상의 해피엔드였네”라고 말했다.

곧 선발된 사범은 박정태 7단으로 정해졌다. 그 후 북한태권도 보급 관련해 여러 내용과 사건 등이 있었으나, 캐나다에서 그러한 첫 경로를 통해 북한태권도가 태어난 것이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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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21-12-09 15:21:00
북한에서 체류하려면 북한법을 따라야되고 대한민국에 체류하면 대한민국법을 따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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