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㉒] 사회적기업, 신념과 가치에 집중하다 – 박중열 제리백 대표
[아프로㉒] 사회적기업, 신념과 가치에 집중하다 – 박중열 제리백 대표
  • 박중열 제리백 대표
  • 승인 2021.12.0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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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전방위로 활동하는 디자인 브랜드이자 사회적기업인 ‘제리백(Jerrybag)’은 우리나라 소비자가 제리백의 다양한 제품군 중 가방류를 구매하면 가방 한 개를 우간다 현지 아이들에게 기부한다. 우간다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가방은 제리캔(jerrycan)이라 불리는 물 긷는 플라스틱 통을 담는 백팩이다. 제리백은 물통의 하중을 줄이고 두 손을 자유롭게 하여 교통사고 등 불의의 돌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박중열 대표는 핀란드의 명문 교육기관인 알토대학교(Aalto University)에서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연구하며 개발도상국에 집중했다. 디자이너로서 개발도상국이 안고 있는 사회 문제를 푸는 데 일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핀란드에서 활동하는 우간다 출신의 국제개발협력 관계자를 만나 그의 조언대로 무작정 우간다를 찾은 박중열 대표는 현지에서 식수를 긷기 위해 수 킬로미터를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 유독 눈에 밟혔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문제를 그전까지 세상에 없던 혁신의 디자인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고충에 진심으로 공감할수록 디자이너로서의 욕심을 내려놓고 보다 더 현실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더불어 지역 사회에서 만들어 소비하는 순환 구조를 지속가능성의 중요한 요소로 여겨 현지인들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형태의 가방으로 결론지었다. 어느덧 사업을 전개한 지 6년이 지나 1만 개에 달하는 제리백을 기부한 박중열 대표를 만나봤다.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꿈꾸다

현재는 지속가능성을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로 여기지만, 10년 전만 해도 다소 낯선 개념이었다. 2007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2009년까지 한국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다 2010년, 나는 지속가능한 디자인에 호기심이 일어 유학길에 올랐다. 그해 핀란드 알토대학교가 신설한 ‘창의적 지속가능성(Creative Sustainability)’ 대학원 과정에 진학한 것. 세계대학랭킹시스템(World Universities with Real Impact)에서 발표하는 세계혁신대학 순위에서 2020년 기준, 3위를 차지할 정도로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알토대학교가 발 빠르게 지속가능성을 학문으로 인정한 첫 해였다. 이렇게 나는 운 좋게 새로운 역사가 태동하는 첫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내가 나름대로 정의한 지속가능한 디자인은 이렇다. 지역의 문화적 특성인 지역성을 띠되, 지역 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 지역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하는 디자인이었다. 핀란드에서 내가 생각하는 지속가능성의 가치를 담은 목재 가구와 장난감을 만들어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핀란드의 미래 디자이너로 선정되어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때 만든 가구와 장난감은 짜맞춤 방식으로 제작돼 못이나 접착제가 전혀 필요하지 않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한편, 맨손으로 누구나 손쉽게 조립할 수 있었다. 또 핀란드에서 가장 흔한 수종인 자작나무를 소재로 삼아 지역성을 높였으며, 화학 처리를 하지 않아 그 쓰임이 다하면 사우나 땔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구상했다.

재활용의 개념을 뛰어넘어 한 번 생산된 물건이 쓰레기가 되지 않고 새로운 제품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일종의 ‘크래들 투 크래들(Cradle to Cradle)’ 디자인이었다. 디자인 강국으로 손꼽히는 핀란드에서 꽤 인정을 받자 한때는 가구 디자이너를 업으로 삼을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다른 욕망이 꿈틀거렸다.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채 더 너른 세상에 보탬이 되는 혁신적 디자인을 세상에 내놓고 싶었고, 특히 개발도상국에 가서 실제로 새로운 디자인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석사 논문의 주제를 국제개발과 관련한 지속가능한 디자인으로 가닥을 잡았다

2012년 나는 우간다 캄팔라의 치쿠미치쿠미라는 대학가에서 있었다. 5개월 동안 머물 숙소를 찾는 중이었다. 학기가 시작한 직후여서 이미 방이 거의 다 찬 상태였다. 운 좋게 찾은 빈방은 2층에 너른 창이 나 도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5개월 치 숙박비가 한화로 30만원 밖에 안 될 정도로 저렴한 방이었다. 하지만 그 방이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비어 있었던 이유를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방 바로 옆에 문제의 전동 발전기가 있었던 것. 정전이 될 때마다 전동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대체했는데, 정전은 잦았고 그때마다 전쟁통 같은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당시 아무 연고도 없는 우간다를 찾은 이유는 오롯이 논문의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서였다. 핀란드에서 인터넷 검색만 한 결과에 의지한 채 주제를 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든 부딪히고 깨져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 다소 미련한 성향을 지녔다. 그 지역의 문제를 직접 보고 지역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야 국제개발 관련 주제를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디자인은 내가 구상하되 그 디자인을 결과물로 만드는 과정은 지역 내에서 소화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지의 기술력과 시장성 등을 면밀히 알 필요가 있었다.

우간다에 소재한 직업학교에 진학한 것도 기술을 가르치는 현지의 교육 수준을 알기 위해서였다. 한편, 지역 사람들의 보다 보편적인 수공예 기술 수준과 특장점을 알고자 수공예로 특화된 마을을 찾아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경험을 통해 우간다에서는 수공예품으로 상품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동 인구가 많다 보니 노동집약적인 제품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어 보였다. 또 수공예품은 시간 대비 생산력이 떨어지는데 생산성이 높아야 지역 주민들의 소득이 올라가지 않겠는가. 나는 빠르게 수공예 방식을 포기했다.

우간다의 식수 문제에 집중하다

기계를 활용하여 제작하기로 결정했으니 주제를 정할 차례였다. 우간다에 5개월간 머무는 동안 가장 마음이 쓰인 사회 문제는 아이들이 우물가에서 식수를 얻기 위해 먼 길을 오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현지에서 만나 친해진 한 자원봉사자가 하루는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가 물을 길으러 갔다가 우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크게 동했다. 내가 주로 머문 수도 캄팔라(Kampala)는 대도시여서 농촌 지역만큼 아이들이 먼 길을 오갈 필요는 없었으나, 그 대신 교통사고의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내 디자인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이 사회 문제의 무게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덜어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누구나 새롭게 여길, 혁신적 디자인을 보란 듯이 내놓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세상을 바꾼 디자인으로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극찬 받은 제품들이 현장에서 방치되거나 버려지는 광경을 목도했다. 그중 하나는 덴마크의 디자이너가 고안한 휴대용 정수장치인 라이프스트로(LifeStraw)였다. 라이프스트로는 오염수로 인해 여러 질병에 노출되는 아프리카 지역의 실정을 보고 개발한 것으로 물을 입으로 빨아들이면 필터를 통해 미생물과 기생충 등이 걸러지는 원리로 작동하는 제품이었다. 사례 조사 차원에서 케냐의 사막 지대를 찾았을 때 라이프스트로가 곳곳에 버려진 뜻밖의 모습을 봤다. 이 신개념 디자인이 소개됐을 때 열광했던 사람으로서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직접 라이프스트로를 사용해 본 결과 생각보다 입으로 물을 빨아들이는 데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됐다. 성인인 나도 힘든데 물 긷는 일을 주로 담당하는 아이들에게는 더 힘들었을 터. 게다가 우물가가 멀어 한 번에 최대한 많은 양의 물을 길어와야 하는 현지 실정에도 맞지 않았다. 현장에서 뜻밖의 국면을 마주한 나는 디자이너로서 역량과 창의성을 보여주는 디자인이 아닌 실제로 그들의 생활에 밀착되는 디자인을 구상해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부터 디자이너로서의 욕심을 내려놓고 문제를 보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우간다의 아이들은 제리캔이라고 부르는 10리터짜리 플라스틱 통을 들고 물을 길으러 다녔다. 제리캔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휘발유를 넣고 다니던 통으로 전쟁이 끝난 후 버려진 것을 아프리카 사람들이 물통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체구가 작은 아이들이 10리터의 물을 머리에 이거나 양팔로 안고 1시간 이상 걷는 모습을 보며 하중부터 줄여줄 방법을 제일 먼저 고민했다. 그러나 단순히 제리캔이 무거운 것도 문제였지만, 머리에 제리캔을 양팔로 이고 있어 손이 자유롭지 않으니 갑작스러운 위험에 노출됐을 때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핀란드 전시

그래서 백팩을 택했다. 전혀 새로운 형태와 차원의 디자인을 만들리라 다짐했던 지난날의 나 자신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났다. 한편, 재봉틀을 활용한 바느질 기술은 기존의 국제기구들이 많이 보급했으며, 다른 기술보다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다고 판단했다. 논문 주제와 방향성을 정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핀란드로 돌아와 첫 번째 논문을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엉뚱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연구 결과를 현실에 적용해보고 싶었던 것. 진심으로 우간다 아이들의 불편을 해소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고안한 물통용 백팩, 즉 제리백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려면 어떤 시스템이 필요했다. 기업의 방식은 몰랐지만, 감정에 호소해 자금을 받는 것보다 현지 사람들과 함께 만든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고용을 창출하는 한편, 그 수익금으로 아이들에게 제리백을 지원하는 방식이 훨씬 더 지속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부전공 석사로 창업 교육 과정을 지원했다.

우간다에서부터 사업을 키우다

2014년 2월 실제로 나는 캄팔라의 한 재래시장에서 재봉틀을 사고 있었다. 4평 남짓한 공간도 얻고 함께 가방을 만들 인력도 구했다. 하지만 제리백을 만드는 일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10리터짜리 물통이 들어가는 동시에 가볍고 견고해야 했으며 아이들의 체격이나 활동성 등도 고려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현지의 인력을 활용하여 지속가능성을 높이고자 했으나, 현지 인력들의 기술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금이야 신뢰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력이 상승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아주 기본적인 결과물을 완성하는 데만 해도 수개월이 걸렸다. 나는 당장에야 우리가 어떻게든 결과물은 만들어내겠지만, 그것으로 수익 구조를 마련하여 하나를 사면 하나를 기부하는, 이른바 ‘바이 원 기브 원(Buy1 Give1)’이라는 제도를 완성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임을 예상했다.

왜냐하면 결국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제품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그날까지 우간다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사업을 유지해야 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감정에 기대어 후원을 독려하는 기존의 많은 비영리단체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2년을 버텼으나 돌파구를 쉽사리 찾지 못했다. 대표로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2년 만에 방향성을 수정하여 우간다의 스튜디오에서는 지역에 제공하는 제품을 만들고, 국내나 해외 판매용 제품을 제작하는 일은 국내의 다른 업체에 위탁했다. 사업을 위해 좀 더 경영자의 마인드를 갖출 필요를 절실히 느껴 한국과학기술원(KAIST) MBA 과정을 듣기도 했다.

생산 방식을 수정하고 경영 수업을 듣느라 국내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지만, 그동안 우간다 직원들과 충분히 신뢰를 쌓고 실력도 많이 끌어올렸기에 원격으로 운영하는 방식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예상했다. 사실 이 이원화된 체제는 직원들이 한참 전부터 제안한 형식이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고집을 부린 이유는 현지 인력들의 역량을 키우고 현지에서 생산하여 소비하는 일정한 순환 구조를 이루는 것이 더 본래 취지에 맞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뒤늦게 직원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동안 지역에 뿌리를 두고 연대감과 체계를 탄탄히 구축했기에 이제는 가능하리라 확신이 들어서였다. 지금 생각해도 초반 2년 동안 고생한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원화된 구조를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현지에서 달걀로 바위 치듯 고군분투한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본다.

국제단체들의 활동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조명하다

‘가방으로 문제가 해소되겠느냐’, ‘차라리 우물을 파줘라’, ‘가방이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미국의 신발 브랜드 탐스(Toms)처럼 신발을 줘라’ 등 나는 사업을 전개하기도 버거운 와중에 외부로부터 부정적인 질문과 반응을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대처하고 답변해야 할지 몰라 상처도 많이 받았다. 특히 우간다에 스튜디오를 처음 연 6개월 동안은 정말 힘들었다. 가뜩이나 현지 인력과 함께 만든 가방이 완성도가 떨어져 초조하던 때였으니.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맞는지 서서히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쯤 한 비영리단체가 제리백을 100개 후원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뛸 듯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효용성이 떨어질까 두려운 마음도 앞섰다.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비영리단체를 따라 우간다 시골에 있는 우물가를 찾아 아이들에게 제리백을 나눠줬다. 며칠에 걸쳐 가방을 나눠주던 중 하루는 우물가를 다시 찾았는데 한 여자 아이가 다가오더니 덥석 내 손을 잡았다. 보통 우간다 아이들이 낯선 외국인을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흠칫 놀랐다. 그 아이는 등을 반쯤 돌려 자신이 메고 있던 제리백을 보여주며 대뜸 고맙다고 했다. 당황한 나는 그 소녀가 메고 온 가방을 열어보고 울컥했다. 그 안에는 꽃이 담겨 있었다. 백팩을 메니 두 손이 자유로워 우물가로 오는 길에 꽃을 따며 논 것이다. 소녀는 우물가로 향하는 길이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고 귀띔했다. 그 순간 그동안 쌓인 모든 피로와 의심이 눈 녹 듯 사라졌다. 거창하게 사회를 바꾸기보다 일상 속 소소한 변화들을 계속 만들어 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후부터는 누군가가 우리의 활동을 비난하거나 비판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깨우쳤기 때문이다. 우물을 파주는 단체는 많다. 그런데 그 우물들이 모두 관리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 고장 난 채로 방치되어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은 그들의 활동을 대체하거나 바로잡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열심히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물을 찾아다니는 아이들이 존재하는 만큼 그들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일, 누군가의 활동과 활동 사이 여전히 문제가 잠재해 있는 사각지대에서 기능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역할이다.

우간다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내외 소비자들에게 우간다의 스튜디오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여 내심 아쉬웠다. 어떻게 하면 우간다의 스튜디오 존재와 그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2018년 1월 소비자와 함께 우간다를 여행하는 원정대를 조직했다. 우간다라는 국가에 대한 긍정적 경험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우리가 하는 활동을 직접 체험토록 하면서 제품의 완성도를 높일 아이디어를 듣는 일이 더 주된 목적이었다. 원정대가 제시한 아이디어 중 실제로 흥미로운 것이 많았으며 그중 일부는 제리백의 디자인에 적용하기도 했다.

도로표지판처럼 노란 배경에 ‘천천히(Slow Down)’라는 문구를 쓰면 운전자의 눈에 띌 확률이 높아질 것 같다는 의견에 따라 실제로 그 문구를 넣었을 뿐 아니라 그때부터 빛에 반사되는 리플렉터(reflector) 소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또 이듬해에는 하단에 있던 리플렉터의 위치를 높이면 더 효과가 높아지리라는 원정대의 의견을 수렴해 디자인을 수정했다. 현지에 스튜디오가 있으니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면 바로바로 디자인에 적용할 수 있었다. 올 초에는 원정대와 우물가에 갔더니 아이들이 하나같이 물통 뚜껑을 잃어버려 입구를 막지 못한 채 물을 옮기고 있었다.

가뜩이나 먼 길을 걸어와 물을 긷고 또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데 그 사이 물을 흘린다고 생각하니 무척 마음이 쓰였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한참 이 문제를 두고 토론했고 그때 한 원정대원이 노래방 마이크의 덮개를 예로 들며 천으로 물통 입구를 막을 덮개를 만든 후 고무줄로 엮어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해결책이어서 그때부터 천으로 덮개를 만들어 달아주고 있다. 이때 재봉 기술이 서툰 직원에게 연습용으로 덮개를 만들게 하는 한편, 재료도 자투리 천을 활용해 버려지는 재료를 줄였다.

지난해까지 우간다에 8,400여 개의 제리백을 제공했다. 우리는 전년도에 판매한 내역을 집계해 이듬해 제공 할 가방의 최소 수량을 결정한다. 지난해 우리가 판매한 가방 수는 5,400개에 달한다. 즉, 올해 최소 5,400개의 가방을 만들어 제공할 계획이라는 이야기. 합산하면 1만3천 개가 넘는다. 우간다에서 생산하고 제공하는 제리백의 양이 늘면서 가방의 완성도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특히 근래에는 우리가 직접 전달하지 않고 학교나 비영리단체를 통해 배포하다 보니 가방의 용도가 다소 희석되는 경향을 보인다. 아이들이 제리백을 책가방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가방의 디자인이나 소재를 물 긷는 용도에 맞게 채택했기 때문에 책가방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면이 많아 안타깝고 미안할 따름이다. 특히 대부분의 아이들이 책가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보니 뺏길까 두려워 하루 종일 메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로 인해 더 빨리 색이 바래고 헤졌다. 용도를 보다 더 명확히 하여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했으나, 학교 선생님들이 제리백 덕분에 아이들의 출석률과 등록률이 높아졌다고 하니 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의도하지 않은 긍정적 변화에 우리도 조금씩 욕심을 내어 소재나 디자인을 바꿔볼까 고민하는 중이다. 물론 더 좋은 소재로 교체하면 그만큼 제작비가 올라가니 새롭게 풀어야 할 문제를 떠안는 셈. 우간다에 더 이상 제리백이 필요하지 않는 순간까지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씩씩하게 헤쳐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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