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⑨] 의암 기념원: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사의 주춧돌이 되다
[아! 만주⑨] 의암 기념원: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사의 주춧돌이 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12.0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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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충북 제천의병제 자양영당 고유제

의병이란 국가가 위급할 때에 의(義)로써 일어나 자발적으로 싸우는 민중의용군(民衆義勇軍)을 말한다. 의는 인간의 고유한 심성이기도 하거니와 우리 민족은 예부터 공(孔)․맹(孟)을 숭상하였으니, 의에 살고 의에 죽을 마음이 확고하여 외적이 침입하면 누구랄 것 없이 때를 가리지 않고 나서 삿된 무리를 물리치곤 했다. 의병이란 문자 그대로 나라와 겨레를 위한 정의의 군대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충북 제천은 한말 의병항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이 있었다.

충북 제천은 의병정신을 계승할 목적으로 1995년부터 제천의병제를 거행하고 있다. 자양영당 고유제, 의병 횃불 봉송, 의병 제전, 의병 유적지 순례, 학술행사 등이 주요 골자이다. 2010년대 초반 즈음, 제천의병제 학술행사에 패널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의병장 유인석을 비롯하여 한말 의병들의 정신을 어떻게 선양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안을 논하는 자리였다. 그때 나는 춘천, 원주, 단양, 영춘, 청풍, 충주에 이르는 국내 탐방을 기반으로, 저 멀리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는 국외 탐방을 제안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실제로 그 일을 주도할지 그땐 몰랐다.

한말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우리의 상투와 의복을 보존하라

유인석은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강요할 때부터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운동을 벌였다. 스승 이항로(李恒老)가 주창한 위정척사론을 계승한 것이었다. 유인석은 갑오개혁 직후부터 도학을 수호하고자 의거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명성황후 시해, 고종황제 폐위, 단발령 시행 등이 유생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바로 유인석이 을미의병을 일으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의로써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영광스러울 때가 있다. 오늘 이 지경에는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때부터 유인석은 죽음을 각오하고 항전하려는 굳은 의지와 태도를 보였다.

1896년 2월, 유인석은 영월 성문루에 “복수보형(復讎保形);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상투와 의복을 보존한다”라고 적힌 깃발을 내걸고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을 결성했다. 그리고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에 힘입어 충주성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기의 열세, 군수품의 부족, 관군과 일본군의 진압으로 충주, 음성, 청주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 결국, 제천전투 패배 후 충청도에서 의병활동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개항 이후 일어난 의병들의 첫 봉기였으며 첫 좌절이었다.

중국 만주에 본거지를 건설하여 의병활동의 재기를 도모

유인석은 새로운 돌파구로써 중국 망명을 선택했다. 1896년 8월, 4개월여 만에 압록강변에 도착한 유인석은 중국 망명의 목적을 역설했다. 그 핵심은 첫째 우리의 옷을 입고 머리를 기르며 예의의 나라를 회복하려는 것, 둘째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하여 국가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 셋째 중국에 본거지를 건설하여 의병활동의 재기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과 구상을 갖고 의병들과 함께 관전현(宽甸县) 보달원(步达镇) 사첨자(沙尖子)에 이르렀다. 비록 내 나라는 아니었지만 내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고려구 혼강: 유인석 의병부대의 옛 군영 및 훈련장 터<br>
고려구 혼강: 유인석 의병부대의 옛 군영 및 훈련장 터

먼저 혼강 부근의 은폐된 곳에 군영을 짓고 훈련장을 닦았다. 이곳이 바로 서간도에서 한말 의병부대가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고려구(高麗溝)였다. 그러나 중국 관원들이 유인석에게 의병의 해산과 귀국을 촉구했다. 일본과 이미 화약을 맺었다는 명분이었다. 유인석은 어쩔 수 없이 200여 명의 의병을 해산, 귀국시켰다. 원세개를 만나기 위해 북경으로 발걸음을 옮길 필요도 없었다. 서한으로 서간도의 의병 소식을 접한 원세개가 유인석에게 은자 30냥을 보내며 원병의 요구를 사실상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허탈했지만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

유인석은 통화현(通化县) 오도구(五道沟)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인이 무려 만여 명이나 거주하고 있을 뿐더러 토지도 비옥했다. 주변이 산악지대여서 유격전에도 유리했다. 이곳에서 재기의 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인석은 이곳에 망국단(望國壇)을 만들었다. 매달 초하루마다 단에 올라 참배하며 치욕을 씻을 날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심양, 천진, 북경, 길림 등의 한인들을 규합하는 한편 국내의 동문들에게 서간도로 이주할 것을 호소했다. 또한 강학 활동을 통해 윤리도덕, 민족의식, 애국정신을 고양하며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국내와 러시아를 돌고 돌아 다시 만주에서 지구전에 돌입

1900년 7월,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내건 의화단의 난이 발발했다. 난은 폭동으로 치달았고 배외운동(排外運動)의 일환으로 외국인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가 가해졌다. 유인석은 당분간 만주에서 뜻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자결을 결심하고 피신했다가 구사일생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국내를 돌고 돌아, 1910년 6월 러시아에서 최재형, 이범윤, 안창호, 이상설 등과 함께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창설했다. 그리고 고종에게 러시아 망명을 권유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에 의한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죄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빈현 평정산진: 유인석이 말년에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지역<br>
신빈현 평정산진: 유인석이 말년에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지역

유인석은 러시아 유정구(柳亭溝: 노보샤크틴스키), 운현(雲峴: 크레모보) 등지의 산속에 은거하며 다시 만주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장기적인 지구전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항일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이 시급했다. 유인석은 1911년 1월에 아들 제함(濟咸)을 먼저 서간도로 보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친척 및 사우 40~50여 가구도 서간도로 함께 보냈다. 이들이 사우회(士友會)를 결성했다. 사우회는 사애심(四愛心)을 기초로 삼고 있는데, 사애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도의를 사랑하는 마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후 사우회는 만주지역 반일단체의 모체가 되었다.

유인석도 1913년에 노구를 이끌고 중·러 국경 부근에 위치한 목화촌으로부터 봉천성 이통현, 신빈현 난천자 고려구를 거쳐 평정산진(平顶山镇)에 도착했다. 그리고 의병 가족들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제는 기력이 쇠했다. 더 이상 거동조차 불편했다. 하여 1914년 8월에 관전현 보달원(普达院) 방취구(芳翠沟)로 옮겨 도모편(道冒篇)을 완성하는 데 주력했다. 도모편의 서문에 “나라의 운이 망극함에 이르게 된 것을 보니 비분, 통박하여 도(道)로 마음을 삼지 않을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나라 잃은 설움이 절절하다.

몸은 스러졌지만 정신은 만주 항일독립운동의 기틀로 계승

1915년 3월, 유인석은 천고의 한을 품은 채 생을 마쳤다. 그때 나이 74세였다. 유인석이 의병운동의 뿌리를 만주지역에 두고 근거지 건설 전략을 구상함과 동시에 그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은 그가 순국한 후에도 그의 문인들이 유지를 이어 받아 지속되었다. 이는 신민회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서간도와 북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 유림 단체를 중심으로 대한광복단, 광복단, 의군부 등 반일단체가 결성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의암 기념원의 기념비(2019년 개보수 이후 형태)<br>
의암 기념원의 기념비(2019년 개보수 이후 형태)

2003년에 의암기념사업회와 요녕성 신빈현 평정산진 정부가 의암기념원을 조성했다. 2019년에는 한중교류문화원과 국가보훈처가 개보수사업을 추진했다. 기념비는 유인석의 삶과 활동을 상징하고 있다. 기단 직경은 7.4m로 서거 당시 나이를, 비신의 높이는 1.915cm로 서거 년대를, 비신의 너비는 1.842cm로 출생 연대를 상징한다. 또한 지구본의 직경은 1.27m로 출생월일을, 지구본 받침판의 두 개 층은 각 20cm로 중국에서 20년간 전개한 의병활동 기간, 중국에서 20년간 유해가 안장되었던 기간을 상징한다. 현재 유인석의 유해는 춘천으로 이장하여 모역(강원기념물 74호)에 모셔져 있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옛 의인들의 업적을 운운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자고 말하는 것이 구태의연한 발상이라고 탓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평생을 이끌어갈 뜻은 결코 시류를 타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통찰과 믿음을 바닥에 든든히 다져두고 있어야 한다. 근본에 닿아 있는 뜻은 오래도록 진정성을 갖기 때문이다. 자신이 태어난 근거를 살피듯 옛 정신을 되새기는 데 마음을 쓴다면 새로운 힘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서, 자꾸 신빈현(新宾县) 평정산진(平顶山镇)의 의암기념원으로 한·중 청소년들의 발걸음이 옮겨 가도록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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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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