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겸손의 미덕
[이영승의 붓을 따라] 겸손의 미덕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1.12.14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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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바다에 무한량의 물이 모일 수 있는 것은 위치가 낮기 때문이다. 겸손(謙遜)이란 상대를 역지사지로 생각해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 기꺼이 양보하고 도와주는 마음씨를 말한다.

지인 중에 남다르게 겸손한 분이 있다. 서울공대 최고산업전략과정 동기회에서 골프와 등산모임을 함께하고 있는 분이다. D그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원자력 분야에 특히 식견이 높다. 한참 연하의 동료들에게도 절대 말을 놓는 법이 없다. 골프 라운딩 할 때 카트(cart)의 앞좌석은 연장자나 상사가 앉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그분은 앞좌석에 먼저 앉는 법이 없다. 동반자들이 앞에 앉기를 권해도 “골프장에서는 공을 잘 치는 사람이 최고”라며 유머로 거절한다. 그래도 일행이 극구 권유하면 전(前) 홀에서 공을 가장 잘 친 사람이 앞에 앉도록 그날의 규정으로 정해 버린다. 어찌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수가 적은 한 지인이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자기의 퇴직자 골프모임 한 멤버가 현직에 있을 때 직위가 좀 높았다는 이유로 연장자가 있어도 앞좌석이 마치 자기의 고정석인 양 턱하니 앉는다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 말하기도 그렇고, 모임 때만 되면 스트레스를 받아 공이 맞지 않는단다. 뿐만 아니라 멤버들의 나이가 모두 집에 가면 할아버지로 같이 늙어 가는 처지인데 현재도 직장의 상사로 착각하는지 반말까지 서슴지 않는다고 했다. 상대방의 불쾌한 심기를 모르는지, 알면서도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다. 누군가가 “그러면 같이 말을 놓아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 그러고 싶지만 모임의 분위기를 위해 참으며 가급적 말을 피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 모임의 그분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꽃향기가 천 리를 가면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花香千里 人香萬里)고 했던가?

수년 전 우리 모임에서 단체로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분으로부터 의외의 전화가 왔다. “이 작가, 공항까지 각자 차를 갖고 갈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기사가 있으니 우리 집으로 와서 주차하고 같이 갑시다”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차량 문제를 걱정하던 참인데 예상치 않은 호의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분은 현직에 있을 때 회사 업무로 해외여행을 백 수십 차례나 다녀오신 분이라 여행에 관한 에티켓과 상식이 남달랐다. 해외여행이 서툰 나를 배려하며 마음 써 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 대화 과정에 원자력 등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도 얼마나 해박한지 저런 분이 있어 우리나라가 무역 선진국이 되었구나 싶었다. 그분은 요즘 다리가 불편해 골프와 등산모임에 함께 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과거의 직위에 집착해 몇 개월만 장관(長官)을 지내도 평생 동안 남들이 장관으로 호칭해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고 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그를 현직 장관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내 주위에도 후배들에게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하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쩌면 나도 그와 유사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겸덕(謙德)은 도덕경 61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겸은 겸손이요, 덕은 훌륭하게 도를 행함이다. 중국의 삼한 시대를 평정하고 촉나라를 세운 유비는 관우·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20대 애송이 제갈공명의 범상함을 간파하고 군사(軍師)로 모시기 위해 삼고초려 끝에 스승의 예로 모셔왔으며, 그의 지략으로 대업을 이루었다. 겸손의 도를 터득하지 못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으리라. 먼 옛날 얘기라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산골짜기의 남루한 집까지 3번씩이나 찾아간 것만으로도 감동적이 아닐 수 없다.

‘겸손보다 강한 무기가 없다’는 말은 지당하다. 사소한 좌석 하나 양보로 상대의 머리를 숙여지게 하며, ‘내’라는 말을 ‘저’로만 바꿔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니 말이다. 살아온 지난날의 나를 뒤돌아본다. 거만하다는 말은 듣지 않았으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부족했으며, 나이가 들어가니 이해심은 줄고 고집만 늘어나는 것 같다. 자신을 돌아보게 해준 그분이 오늘따라 너무 그립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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