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⑩] 조선의용군 전군대회 기념비: 그들도 우리의 독립군이었다
[아! 만주⑩] 조선의용군 전군대회 기념비: 그들도 우리의 독립군이었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12.16 17:4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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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서탑코리아타운
서탑코리아타운

내가 머물고 있는 심양시에는 서탑코리아타운이 있다. 남북을 가로질러 500여 미터에 이르는데, 이곳에서는 한국교민은 물론 북한사람도 쉽게 볼 수 있다. 1911년에 일제가 압록강철교를 부설하고, 봉천[심양]과 안동[단동]을 잇는 안봉선을 개통하면서 서탑 주변에 조선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탑에서 사방 10km 이내에는 1637년부터 1645년까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거처한 심양관(瀋陽館)의 흔적이 있으며, 50~60만 명의 조선인이 속환무역으로 매매되던 남탑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1882년부터 1887년까지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가 서상륜, 백홍준과 함께 한글 성경을 최초로 번역, 출간한 동관교회가 현존하고 있다. 이처럼 서탑 주변에는 한민족의 유산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연구소의 한 직원이 자신이 나고 자란 오가황(吴家荒)이라는 마을을 자랑한다. ‘마을 주변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여름이면 강가에서 천렵을 즐겼으며, 텃밭에서 가꾼 채소로 요리를 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눠 먹었다’는 것이다.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동북삼성 수전지』를 훑어봤다. 과연 동북의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1912년에 봉천수리국(奉天水利局)을 설치하고, 심양의 북릉, 탑만, 오가황, 진가황, 소가툰 등지에서 5,000여 정보의 논을 풀어 해마다 15만 석의 벼를 수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양에서 가장 유서 깊은 조선족 마을이 오가황이었던 것이다.

심양시 우홍구 대흥홍가구육성(大興洪家狗肉城)
심양시 우홍구 대흥홍가구육성(大興洪家狗肉城)

나들이를 겸해서 마을 구경에 나섰다. 빈 집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오래된 조선족 마을다운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는 홍씨네가 대를 잇고 있는 보신탕집(大興洪家狗肉城)이 여전히 호황이었다. 조선족 학교도 있었다. 1918년 요녕성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한 조선족 소학교라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조선의용군오가황회의회지(朝鮮義勇軍吴家荒會議會址)”라는 낯선 기념비가 서 있었다. 조선족 소학교에 왜 조선의용군의 기념비가 서 있을까, 순간 당황스럽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심양 오가황조선족소학교에서 조선의용군의 전군대회를 개최

1942년 7월, 김원봉(金元鳳)이 창설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중국 태항산에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관내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제와 싸웠다. 조선의용군의 용맹성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예컨대 태항산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이 십자령의 퇴로를 뚫었기에 등소평(鄧小平), 팽덕회(彭德懷) 등 중국공산당 주요 간부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용군이 목숨을 내건 이유는 중국공산당과 협력하여 일제를 대륙에서 몰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1938년 10월10일)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1938년 10월10일)

1945년 8월, 일제의 투항이 임박하자 팔로군 총사령 주덕(朱德)은 그들의 향후 진로와 관련하여 7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 중 제5호가 조선의용군과 관련한 것이다.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武亭), 부사령 박효삼(朴孝三), 박일우(朴一禹)는 부대를 통솔하여 동북으로 출병하라. 팔로군 및 동북군과 함께 적위부대(敵僞部隊)를 소멸하고 동북에 있는 조선인을 조직화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성하라.” 즉 동북삼성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한반도로 진출하여 조선 전체를 해방시키라는 것이었다.

1945년 9월, 태항산 부근에서 작전을 펼치던 조선의용군 및 옌안(延安)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간부 학생들이 동북으로 향했다. 그들은 황하를 건너 만리장성을 넘었으며, 다시 산시(陜西), 내몽골(內蒙古), 하북(河北) 등을 거쳐 10월 하순 요녕성 심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11월 7일, 우홍구(于洪区) 대흥향(大兴乡)의 오가황조선족소학교(吴家荒朝鮮族小學校)에서 전군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조선의용군의 향후 거취를 논했는데, 이는 조선의용군이 창건한 이래 전체 장병이 함께 한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였다.

심양시 우홍구 오가황조선족소학교 전경
심양시 우홍구 오가황조선족소학교 전경

조선의용군이 동북지역에 잔류하여 민주정권 건설에 참여키로

조선의용군 무정 사령은 “소수의 간부와 지휘관만 조선으로 향할 것이며, 대부분의 대원은 동북에 남아 민주정권을 건설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전군대회의 결의에 따라 무정 사령을 비롯한 70여 명의 간부들은 입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기로 했으며, 대부분의 조선의용군은 동북인민해방군[동북민주연합군] 소속으로 중공동북국(中共東北局)과 협력하여 동북지역의 민주정권 건설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에 조선의용군은 기존의 편제를 제1, 3, 5, 7지대로 개편했다. 제1지대는 심양과 통화 일대를, 제3지대는 하얼빈 일대를, 제5지대는 연변 일대를, 제7지대는 길림 일대를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다.

조선의용군오가황회의회지(朝鮮義勇軍吴家荒會議會址) 기념비
조선의용군오가황회의회지(朝鮮義勇軍吴家荒會議會址) 기념비

이 중 제1지대만 살펴보자. 제1지대는 11월 10일 심양에서 성립했으며, 지대장 김웅(金雄)을 위시하여 병력은 1,600여 명이었다. 심양을 거점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결과 조선의용군에 대한 선망이 높아져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가담했다. 11월 말에는 심양을 떠나 무순(無順), 청원(淸原), 매하구(梅河區) 등지를 거쳐 1946년 1월 초에 통화(通化)에 도착했다. 그 사이 병력은 5,000여 명으로 증가했으며, 1949년에는 1만 2,000명으로 늘어났다. 제1지대의 호칭도 저 저명한 조선인 항일투사 이홍광(李紅光)의 이름을 빌려 이홍광지대로 바꾸었다. 이홍광이라는 이름을 차용했다는 것만으로도 조선인 사이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 집거구의 정치토비를 숙청하여 조선인의 안정을 보장

광복 직후, 중국 동북지역에서 정치토비들이 발호했다. 만주국 시기의 군대, 경찰, 헌병, 지주 등이 국민당의 위임을 받아 조직한 무장단체였으며, 패전하며 달아난 일제의 무기를 입수하여 주민들을 유린했다. 통계에 의하면 한창 극성이었던 1945년에만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정치토비들이 10만 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의용군의 연변지역 행군(제5지대, 1945년)
조선의용군의 연변지역 행군(제5지대, 1945년)

정치토비로 인해 동북지역의 조선인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동북지역의 한족이나 여느 소수민족은 국민당을 정통으로 인식했다. 반면 조선인은 평등을 주장하는 공산당에 호감을 갖고 팔로군을 지지했다. 더구나 만주국 시기 이래 일제의 이간정책과 차별정책으로 동북지역의 토착민들은 조선인을 곱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정치토비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강탈과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인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조선인이 본토로 귀환하거나 대도시로 몰려가 연명하는 데 급급했다.

이때 조선의용군이 나섰다. 예컨대 1946년에 조선의용군 이홍광지대가 통화의 정치토비들을 숙청한 사건을 꼽을 수 있다. 광복 직후 통화에는 일제의 패잔병 3천 명과 일본인 1만 5천 명이 남아 있었다. 1946년 2월, 이들은 국민당의 지하조직과 협력하여 중공 민주정권을 무너뜨리고 통화와 백두산 인근에 이른바 동변도중일연합정부(東邊導中日聯合政府)를 세우고자 폭동을 주도했다. 그런데 조선의용군 이홍광지대가 이를 진압했다. 4배나 많은 상대와 싸워 민주정권을 지켜냈다. 이러한 노력으로 동북지역의 조선인은 점차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의용군의 정치토비 숙청 기념사진
조선의용군의 정치토비 숙청 기념사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지원하다가 북한 인민군으로 합류

조선인 사회가 안정을 되찾자, 조선의용군은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여 조선인의 정치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데 주력했다. 이홍광지대로 이름이 높았던 제1지대는 1946년 11월 10일 심양에서 독립동맹 남만사업위원회를 건립했다. 남만사업위원회는 더 이상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의 지도하에 국민당의 통치를 뒤엎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위해 노력하는 남만지구 30만 조선족을 대표하는 정치단체였다. 하얼빈을 중심으로 한 독립독맹 북만특별위원회, 연길을 중심으로 한 연변인민민주대동맹 등도 같은 성격의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김일성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용군의 후신인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소속 제164·166사 및 독립155사의 조선인 병사들이 북한으로 들어갔다. 1949년 4월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 정치부 주임 김일(金一)을 중국에 파견했다. 김일은 주덕(朱德)과 주은래(周恩來)에 이어 모택동(毛澤東)을 접견했다. 모택동은 우선 심양과 장춘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의 조선인 병사들을 북한으로 보내라 지시했다. 1949년 8월 귀국 당시 164사의 인원은 10,821명이었으며, 166사의 인원은 10,320명이었다. 남방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독립155사를 합하면 37,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은 2,000여 명이었으며, “영웅”의 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은 100여 명이었다.

독립동맹 남만사업위원회 건물 터(서탑코리아타운 내)
독립동맹 남만사업위원회 건물 터(서탑코리아타운 내)

“그들도 우리의 독립군이었다!” 이 글의 제목이다. 이념과 체제를 떠나서 그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렸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나 탈고를 앞두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제목으로서 합당한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 분단이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글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연장선상에서 제목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다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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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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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12-17 01:27:31
개 식용 금지 입법화, '찬성' 38% vs '반대' 48% | 연합뉴스 (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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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오랜 개고기 식용 역사등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블로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203

윤진한 2021-12-17 01:27:00
...이 신문은 지금은 서유럽에서 애완동물로 여기는 것들을 먹는데 대해 매우 까다롭게 굴지만 과거에도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라면서 히포크라테스는 강아지를 균형잡힌 건강식으로 권했으며 로마인들은 쥐를 먹었고 스페인 사람들은 고양이고기탕을즐겼는가 하면 스위스 사람들은 개고기 건포를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지적했다...

윤진한 2021-12-17 01:24:37
개를 식용으로 먹어온 국민입장에서 보면 기본권 침해가 맞습니다.

​“살인미수나 마찬가지” 개물림 사고 왜 자꾸 반복되나-국민일보 (kmib.co.kr)
@ 헌법이 상위법입니다. 헌법전문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 여기서 개고기 식용의 역사와 전통은 헌법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보호받습니다.야생동물인 개를 가축으로 기르며, 단백질이 부족한 시대에 불을 이용하여, 그리고 여러가지 양념을 이용하여 개고기를 먹어온 동아시아 문화는, 하나의 역사이며 전통입니다.또한, 의학적으로도, 현명한 영양섭취방법이었습니다.
* 영국 더 타임스 기사로 연합뉴스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강아지를 균형잡힌 건강식으로 권했었다"

2001, 12, 16, 연합뉴스 김창회기자 보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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