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⑬] 동북항일연군 전시관: 민족을 초월하여 항일 연합군을 결성하다
[아! 만주⑬] 동북항일연군 전시관: 민족을 초월하여 항일 연합군을 결성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1.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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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중공만주성위구지기념관(中共滿洲省委舊址紀念館)
중공만주성위구지기념관(中共滿洲省委舊址紀念館)

조선의용군 전군대회 기념비를 소개하는 지난 기사에서, “심양시에는 서탑코리아타운이 있다. 남북을 가로질러 500여 미터에 이르는데, 이곳에서는 한국교민은 물론 북한사람도 쉽게 볼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런데 서탑코리아타운이 활성화되기 전에는 상권의 중심지가 인근의 북시장(北市場)이었다. 지금은 슬럼화되어 예전의 영화를 찾아볼 수 없지만, 100년 전에 이미 요녕청년극장(辽宁青年剧场)이 성황을 누렸을 정도로 지역 최고의 번화가였다. 속설에 의하면 전설의 주먹 시라소니가 이 거리를 활보했다고도 한다.

북시장 근처에는 심양에 집거했던 시보족(錫伯族)의 가묘(家廟)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일종의 사당이지만 시민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곁에 중공만주성위구지기념관(中共滿洲省委舊址紀念館)이 있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옛터에 조성한 기념관이다. 우리 세대만 해도 어릴 적에는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이라는 구호를 외쳐대곤 했다. 그러나 만주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휘했던 본산이며, 이곳에서 한·중 연합군으로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連軍)의 결성을 추진했다는 점은 그 의미가 전혀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중공만주성위구지기념관을 필두로 길림성 통화시의 동북항일연군기념관, 그리고 길림시의 육문중학(毓文中學) 내 김일성주석공부기념실을 연이어 답사 코스로 잡았다. 동북항일연군기념관은 6개 전시실에서 한·중 연합군의 기백을 ‘철혈영혼(鐵血英魂)’이라는 주제로 전시하고 있었다. 2005년에 개관하여 현재는 중국 국가급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선정되었을 만큼 위상이 대단하다. 그런데 어렵사리 도착한 육문중학은 한국인의 접근을 차단했다. 중국에서는 이른바 “꽌시”라는 관계를 통해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해결하는지라, 여러 인맥을 통해 부탁을 해댔지만 죄다 소용없었다. 허탈했으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방면군 대원들(1930년대 후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방면군 대원들(1930년대 후반)

중국인 지주와 한인 소작농의 모순 관계에서 출발한 공산주의 운동

1920년대 만주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은 오히려 한인들이 주도했다.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의 산하 조직인 코르뷰로(고려국)는 1923년 9월에 박윤서(朴允瑞), 주청송(朱靑松) 등을 길림성 연길현에 파견하여 고려공산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26년 5월에는 국내 조선공산당이 흑룡강성 영고탑에 해외 지부로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립했다. 반면 중국공산당은 1927년 10월에 요녕성 심양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연이어 중국공산당 동변도특별위원회(동만특위)를 발족하고, 1928년 2월에 길림성 용정에 중국공산당 지부를 건립했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결성 초기부터 한인들을 고려한 토지 소유권 분배 및 조선공산당과 연대 강화를 주요 전술로 상정했다. 만주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컸던 데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일국일당(一國一黨)의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의 승인이 취소되었다. 게다가 국내공산당 운동이 일제의 탄압과 운동 역량 미숙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중국공산당에 합류하여 중국혁명에 동참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즈음, 1930년에 ‘간도 5·30 폭동’이 발생했다. 연변 일대의 한인 공산당원들이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휘 아래 무장 폭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전신과 전화선을 절단하고, 철도와 교량을 파괴했으며, 일본영사관과 경찰서를 습격하고, 반일 전단을 뿌리며 곳곳에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감행했다. 일제는 함경도 회령에 주둔하고 있던 75연대를 급파해 만주군벌과 합동으로 진압에 나섰다. 이는 득보다 실이 많은 자학적 사건으로 전락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해체를 불러왔다.

동북항일연군전시관 입구(길림성 통화시 동창구 정우로 888번지)
동북항일연군전시관 입구(길림성 통화시 동창구 정우로 888번지)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해체와 별도로, 한인들의 공산주의 운동이 연변 일대와 남만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만주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수많은 농민이 파산했으며, 이로 인해 계급별, 민족별 대립이 심화되었다. 특히 중국인 지주와 한인 소작농으로 상징되는 모순 관계는 만주지역 한인들의 최대 현안으로 부상했다. 여기에 더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정책적 한계와 파벌적 대립으로 한인 공산당원들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개별적으로 가입하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반제, 반봉건적 농민운동에서 한·중 항일연합투쟁으로 확대 발전

1931년에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항일투쟁을 즉각 표방했다. 그러나 만주성위원회는, 당시 일제에 맞설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하여 1930년 10월에 만주성위원회 산하 부서로서 동만특별위원회가 ‘일제의 만주 점령을 반대하는 긴급 결의안’과 ‘농민운동 결의안’을 발표하여 한인들이 집거하고 있는 동만을 중심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예컨대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秋收鬪爭), 1932년 봄의 춘황투쟁(春荒鬪爭)을 반제, 반봉건 투쟁과 결합시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나아가 1931년 10월에, 만주성위원회가 남만의 이통에서 적위대(일명 개잡이대)를 창립했다. 대장 이홍광(李紅光)을 비롯하여 7명의 청년은 모두 한인이었다. 소규모로 출발한 무장단체였지만, 1932년 6월에 반석공농반일의용군(磐石工農反日遊擊隊; 일명 반석유격대)으로 확대, 발전했다. 이후 반석유격대는 한족 무장투쟁 세력과 통합하여 중국 노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일명 남만유격대)로 개편하고,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60여 차례 공방전을 치렀다. 남만유격대의 규모는 250여 명이었는데, 1/4이 한인이었다.

동북항일연군전시관 내 철혈영혼(鐵血英魂) 이미지
동북항일연군전시관 내 철혈영혼(鐵血英魂) 이미지

동만의 연길현에서도 1932년에 적위대를 개편한 연길현유격대를 결성했다. 화룡현에서도 적위대와 평강유격대를 결성했다. 왕청현에서도 18명으로 구성한 소규모 유격대가 안도유격대와 통합하여 왕청유격대를 결성했다. 1933년에는 훈천현에서 영북유격대와 영남유격대를 각기 결성했다가 훈춘유격대로 통합했다. 동만의 4개 현에서 결성한 유격대의 규모는 360여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90%가 한인이었다. 이후 동만의 유격대는 중국 노농홍군 제32군 동만유격대로 편제되었다가, 1934년 3월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발전했다.

북만에서는 1933년 4월에 허형식(許亨植) 등이 탕원에서 유격대를 결성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주하현위원회는 같은 해 10월에 동북의용군 계통의 패잔병과 이계동(李啓東) 등 13명의 한인들을 바탕으로 주하반일유격대를 결성했다. 대장은 한족 조상지(趙尙志)였는데, 1934년 6월에 항일 마적 등을 포섭하여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발전했다. 북만의 유격대는 남만이나 동만과 달리 한인들의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결성 초기에 한인 간부들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졌다.

동북항일연군의 한인 주력 부대가 백두산에 유격 근거지를 건설

항일투쟁이 격화되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1933년 8월에 반석현위원회와 남만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결성했다. 중국공산당 계열의 첫 정규군으로 병력은 300명 정도였다. 사장은 한족 양정우(楊靖宇)였고, 참모장 이홍광(李紅光), 소년영장 박호(朴浩), 3단 단장 한호(韓浩) 등 주요 간부를 비롯한 한인들은 1/3 가량이었다. 한편 1934년에 동만에서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안도현과 왕청현에서 한 해 동안 9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고군분투했다. 제2군 독립사의 사장은 한족 주진(朱鎭)이었지만, 전체 1,200여 명의 병력에서 2/3가 한인이었다. 이처럼 제1군과 제2군은 한인들이 주력을 이루었다.

동북항일연군전시관 내 한·중 연합군의 벽화 이미지
동북항일연군전시관 내 한·중 연합군의 벽화 이미지

일제는 한·중 연합군 소탕에 전력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근거지를 버리고 북만의 산야까지 퇴각하여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1935년에 이른바 ‘8·1 선언’을 발표했다. 당파와 민족을 망라하여 항일연합군을 구성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듬해 12월에는 만주 군벌 장학량(張學良)이 장개석(蔣介石)을 구금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켜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편승하여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1936년 1월에 만주지역의 항일부대를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이 제1군부터 11군까지 결성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토벌을 더욱 강화했다. 이에 대응하여 동북항일연군 제1군과 제2군이 1936년 7월에 양정우(楊靖宇)를 총사령으로 하는 제1로군으로 통합했다. 제2군 1, 2, 3사의 명칭도 4, 5, 6사로 바꿨다. 이 가운데 한인들이 주력인 제4사와 제6사는 백두산 일대에 유격 근거지를 건설했다. 특히 김일성(金日成)이 이끄는 제6사는 1937년 6월에 함경남도 감산군 보천보를 기습하여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보천보 전투를 계기로 동북항일연군 내 한인 부대의 활약이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1938년에 양세봉(梁世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일제로부터 타격을 입고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서는, 동북항일연군 내 한인 부대를 대중이 흔히 ‘조선인민혁명군’이나 ‘조선혁명군’으로 부르게 되었다. 동북항일연군 내 한인의 역할이나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육문중학 내 김일성 소년 동상(4월 15일 태양절을 기해 기념행사 개최)
육문중학 내 김일성 소년 동상(4월 15일 태양절을 기해 기념행사 개최)

동북항일연군 제6사 사장 김일성, 길림 육문중학에서 공산주의 사상 전수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재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다.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은 평범한 농부였다. 그러나 어머니 강반석(康盤石, 1892∼1932)은 이웃한 용산면 하리 칠골의 하리교회 장로 강돈욱(康敦煜)의 딸이었다. 강반석이라는 이름도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에서 붙였다고 한다. 대단히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형직은 처가의 영향으로, 1911년에 예수교 장로파 계통의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 잠시 교편을 잡았지만, 1917년에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국민회에 가담했다. 이로 인하여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 만주 임강 팔도구 압록강 건너편으로 이주했다. 김일성은 아버지를 따라 만주 팔도구소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얼마 후 평양 창덕학교로 전학했다. 창덕학교는 하리교회가 설립한 보통학교로서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이 교감으로 근무하며 성경과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2년간 수학하고, 만주로 돌아와 무송에서 소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에는 정의부 계통의 학교인 화성의숙에 입학했다. 당시 김형직이 정의부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 후에 김형직이 급사했다. 김일성은 정의부에서 제공하는 학자금을 받고 길림 육문중학(毓文中學)으로 전학했다. 육문중학은 한족 중심의 학교였기에 훗날 동북항일연군과 연계를 맺는 데 밑거름을 제공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육문중학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했다. 예컨대 남만청맹의 박소심(朴素心)과 상월(尙鉞)을 통해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접했다. 상월은 중국 공산당원으로 항주감옥에서 탈옥하여 육문중학 국어 교사가 된 사람이었다.

김일성의 보천보전투 기사(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자 호외)
김일성의 보천보전투 기사(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자 호외)

김일성은 육문중학 재학 시 조선공산청년회 멤버로 활동했다. 때문에 반일활동 혐의로 중국 군벌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김일성은 출옥 후 국민부에 가담하여 좌파청년들과 함께 활동했다. 그러다 1931년, 19세가 되던 해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때 만주사변으로 중국공산당이 항일투쟁을 선포하자, 김성주라는 본명을 숨기고 김일성으로 이름을 바꿨다. 1932년에는 소규모 유격대를 조직하여 장백산 일대와 송화강 유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6년부터 동북항일연군 지휘 간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해방 당시까지 활동한 한인들의 무장부대였다. 독립군 부대의 창설은 보다 효율적이고 강렬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창설하고 활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라, 모두 중국과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연계했으며, 한국광복군은 중국국민당과 연계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미묘한 파장을 여태껏 미치고 있다. 그럴수록 보다 객관적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지난 역사를 다시 한 번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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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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