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성칼럼] 선비문화 구국(救國)론… 한자도 쓸 줄 알아야
[정대성칼럼] 선비문화 구국(救國)론… 한자도 쓸 줄 알아야
  • 정대성 문화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2.07 09: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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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성 문화 칼럼니스트
정대성 문화 칼럼니스트

서울 2호선 신천역은 신촌과 비슷한 발음 때문에 가끔 약속을 어기게 만든 역이다. 필자처럼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는 특히 발음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속으로, 역명을 ‘새내’로 바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잠실새내’로 바뀌었다. 한자어와 순우리말의 묘한 배합이다.

일본은 한자를 훈독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지명의 거의 다 한자로 표기되지만, 대부분이 훈독된다. 읽으면 야마토 코토바(순수 국어)의 부드럽고 우아한 맛이 배어난다. 이때, 순수 야마토 말인 지명들을 히라가나로만 표기하면 또 달라진다. 한자로 표기하고 순 야마토 말로 발음하니까 그 딱딱한 정확성과 우아한 부드러움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향찰, 이두를 부활시키자는 게 아니다. 한자어를 섞어 쓰되, 그 한자도 일부는 쓸 줄 알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한일 비교를 한다면, 양국 다 한자를 쓰거나 말한다. 일본은 훈독하여 풀어놓은 경우가 더 많은데, 당연히 대다수 일본인은 풀어 말하는 속담을 한자로 쓸 줄 안다. 그런데 많은 현대한국인은 사자성어를 말하되, 정작 한자로 쓰지는 못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한자로 못 쓰는 사람도 봤다. 우리나라의 한자 교육이나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한자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데 장애가 된다는 논의는 현대 일본을 보면 맞는 소리는 아니다. 물론, 중국처럼 언어 전체가 한자인 경우 맞는 듯도 싶으나, 최근 중국의 발전도 만만치 않다.

한국어 폐지론, 영어 상용화론은 제쳐 두고서라도, 한자, 한문을 과거 양반계급의 권위문화의 잔재처럼 보고, 한글을 현시대 민주주의 사회에 알맞은 공평, 평등 지향의 상징처럼 간주하면서 한글전용을 강조하고 한자 폐지론을 주장하는 것을 수두룩하게 봤다.

하지만 한글전용과 한자 폐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자 쓰기를 멀리할 수는 있어도, 한자어 그 자체를 폐지할 수는 없으니, 중요한 것은 한글전용이나 한글, 한자 혼용론도 아닌, 참된 한글, 한자 활용론이다.

한자의 창시자가 우리 민족이었다는 ‘국뽕’은 삼가야 하겠지만, 국경이나 민족의 개념이 희박했던 상고시대에 만들어진 한자가 꼭 남의 것이라고만 볼 이유도 없다. 자고로 동아시아의 고전은 한문으로 쓰여 왔고, 한문 고전에는 양반계급 이데올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유불선 등은 물론, 나아가 인류 보편의 가치도 배어 있다.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론이 화제인데, 요점은 현대 자유 자본주의 시대에 상위 몇 프로의 특권계급의 존재는 어쩔 수 없으니, 적어도 그들이 단순히 귀족처럼 특권을 누리며 끼리끼리 이권 돌려먹기를 하며 대다수 국민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실질적 손실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이라는 더 큰 공동체에 자신들이 속해있다는 인식을 각인시켜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의무의식을 꾸준히 환기해야 사회에 정의가 살아나고 민주주의의 기반인 공정성이 확보된다는 논의이다. 우리는 고대 희랍철학, 신학 등 서양문화에 그런 사상의 발전을 봤지만, 실은, 한자의 모태로 돼 있는 우리 동양 고전에도 현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런 보편적 가치들이 삶의 지혜로 널려 있다.

우리 선비들의 사상사 흐름만 봐도 그들이 동아시아 고전으로부터 양분을 흡수하여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려고 피나는 노력을 한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양반계급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계적 격동기에 근대국가 건설에 나서지 못해 나라가 망했다는 논의도 역사의 한 단면이나, 더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예컨대, 동학의 한계성도 있었으나, 약자, 여성에 대한 존중 등을 볼 수 있다).

동쪽으로부터는, 신대륙이 피로 얼룩지고, 하와이, 일본을 거쳐서, 서쪽으로부터는 인도, 중국이 전쟁, 아편으로 망하면서, 서양 세력들이 전 지구를 무자비하게 석권하고 있을 때, 우리 민족은 비서구권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만약 그때 우리 선비문화가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은 더 비참한 운명, 잘못하면, 민족 소멸의 비극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선비는 유대교의 랍비(스승) 같은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예컨대 야스오카 마사히로가 있었다. 그는 일본 패망 시 옥음방송 원고를 쓴 사람인데, 오키나와 반환을 둘러싼 미국 닉슨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수상 대담을 앞두고, 사토에게 귀띔했다. 만날 때 중국 고전, 노자의 한 구절, “전승이상례처지(戰勝以喪禮處之)”(전승국이 패전국을 대할 때, 오만한 태도 말고 상례에 따라 겸손하게 대하라)를 닉슨에게 전하라고 귀띔해줬고, 그 한 마디에 닉슨이 감탄하여 오키나와 반환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사토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미국, 일본,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야스오카는 오랫동안 음지에서 숨은 키맨 역할을 했다.

필자는 우리 찬란한 선비문화가 우리민족의 발전의 기저에 지금도 알게 모르게 큰 힘을 발휘한다고 보면서, 한편으론 우려도 앞선다. 필자의 한자 활용론, 한문 교육론의 요점은 선비문화의 좋은 부분은 적극 계승, 발전시키고, 양반계급문화의 악습과 폐단은 과감히 <혁명>한다는 것이지만, 오늘날 선비문화의 계승은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한글과 고조선, 삼국시대를 거쳐 내려온 우아한 순우리말이 있지만, 평소 살면서 우리 귀에 들리는 건 순우리말의 욕지거리뿐이다. 우리가 미국, 일본, 중국이라는 세계 최강 대국들 사이에 끼고, 그 태풍의 중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문화적 힘의 원천은 선비문화를 지탱한 한자와 고대부터 한류 붐을 이끌었던 순우리말의 넋이 깃든 한글인즉, 신한류 붐 시대인 현시대에 맞게 우리가 이 둘을 영어와 함께 어떻게 잘 아울러 활용할까 하는 것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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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2-02-08 10:39:26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글입니다. 좋은 칼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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