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5] 한 러시아 벌목공 탈북자의 외길인생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5] 한 러시아 벌목공 탈북자의 외길인생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2.02.2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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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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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호와 전충림사장(고려호텔 앞)

지난해 12월 하순 한 탈북자 가족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오랜만의 반가운 연락이었다. 그 탈북자는 지난 1994년 봄 러시아 UN 창구를 통해 한국에 처음 입국한 J씨였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에 개설된 유엔난민기구(HCR)를 거쳐 자유 대한민국으로 직행한 제1호 러시아 벌목공 출신 탈북자였다.

당시 나는 모스크바 초대특파원으로 상주하던 시기다. 그때 러시아 땅을 유랑하던 2명 탈북자를 우연히 만나 UN(피)난민등록을 도운 적이 있다. 그들은 정말 행운아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러 수도 모스크바에 유엔난민(HCR)기구가 개설된 지 얼마 안 된 때였고, 마침 그들이 첫 개시로 유엔난민기구를 통해 대한민국 땅을 밟았기 때문이다.

그해 94년 4월 어느 날 아침 7시. 월 스트리트 로젯 특파원과 함께 UN 사무실과 시간약속도 없이 무작정 유엔 고등 판무관(HCR)을 찾았다. 그때 로젯 특파원은 출입이 거부됐고, 나만 같은 동포로서 통역으로 입장이 허용돼 탈북자를 등록시켰다. 며칠간 꼬박 유엔사무실에서 탈북자 돕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몇 달 후 그들은 제1착으로 대한민국에 직행했다. 나는 그들이 한국으로 떠나는 줄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일 과정은 모든 게 내부적으로 은밀히 진행된 까닭일 것이다.

그 후 탈북자들은 지속적으로 모스크바 유엔난민기구 통로로 자유 대한의 품에 안겼다. 나는 J씨 등 첫 2명 탈북자 유엔등록 이후 난민기구(HCR)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같은 통로로 입국한 탈북자들이 그 사실을 내게 전해줬다. 나는 졸지에 그들 세계에서 영웅이 돼 있었다.

강원일보 방북기 97년 9월

심지어 근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탈북자들은 그 UN난민창구를 이용하고 있었다. 최근 러시아의 한 탈북자가 한국행 대기 중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숫자의 탈북자들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지 넓은 땅을 헤매다가 모스크바 난민기구를 통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약 30년간 유엔난민기구든, 중국이나 동남아 제3국 등을 통하든, 모두 3만5천여 명으로 밝혀져 있다.

그때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간 벌목공 J씨는 여느 탈북자들과는 달랐다. 대개의 탈북자 동료들이 북한성토행위나 반공강연, 대북 풍선 날리기 등 정치적 관련이나 개인사업 등에 몰두할 때, J씨는 평범한 삶의 방식을 택해, 오랜 세월 한 세상을 보냈다. 그는 한국 정부에서 제공하는 한 직장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남쪽 한 소도시의 대기업공장 한 군데 만27년 간 근무했다.

탈북자로서는 꽤 보기 드문 경우였다. 아마 그는 한 직장에서 장기간 일하다 정년퇴직한 유일한 탈북자일지도 모른다. 입국 후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부인과 슬하 두 딸과 함께 외길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두 딸도 어느새 모두 학업을 마치고 사회일꾼으로 한몫을 하고 있다.

강원도민일보 사고(99년 2월)

캐나다에 거주하는 나는 그와의 만남이 쉽지 않았다. 한번은 방한 중일 때 나를 초청해 그가 사는 큰 레스토랑에 정성껏 자리를 마련해 줬다. 우리는 근 30년 세월 한 식구처럼 간간이 소식을 전하며 끈끈한 정으로 이어져 왔다. 자유 대한민국 땅에 정착해 새 삶으로 소박한 꿈을 이룬 그의 모습이 대견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J씨를 UN난민기구에 소개하고, 등록시킨 지난날 일에 비로소 보람을 느꼈다. 사실 사람 사는 길이란 마음 먹기 달린 것 아닌가. 살다 보면 별 대단치 않은 명예나 허영을 위해 인생을 걸다시피 하는 경우가 좀 많은가.

나는 문득 1980년대 처음 방북할 때가 회상됐다. 당시 방북취재를 통해 40여년 내 캐나다 이민생활에는 두 사람(캐나다 시민권자)이 내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다. 그들은 교포사회에서 소위 빨갱이라고 이름나 있던 인물들이나, 여러모로 내 방북취재 등을 도와주었던 같은 교포였다. 그중 한 명인 고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 총재는 앞서 여러 번 설명으로 더 이상 언급을 생략한다.

다른 한 명 역시 한때 거론했던 전충림씨는 친북 ‘뉴 코리아타임스’ 발행인이다. 최홍희 장군이나 전충림 사장은 대표적 빨갱이 두목으로 소문난 교포사회 기피인물이었지만, 내 해외이민생활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두 사람을 평가하든, 두 사람과 함께 토론토에서 한동안 오래 지냈다는 사실이 내게는 다행스럽게 생각됐다.

북한방문기(월간조선)

특히 전충림 사장은 지난 1979년 ‘해외이산가족회’ 본부를 토론토에 설립해 북미는 물론 남미까지 이산가족 찾아주기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그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그 시절 12년간은 캐나다 토론토가 북남미 아메리카 전역에서 북녘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시기다.

북한 정부는 전충림 사장의 해외이산가족 찾는 명단을 적극 협조해 주었다. 북측으로서는 일본 조총련 계 외에 ‘해외 유일한 친북 계 거점으로 토론토를 이용할 수 있겠다’고 나는 분석했다. 또한 미국과 달리 캐나다만이 평양에 송금이 가능했던 때문이다. 10여 년 동안 상당 액수의 북한송금이 북 이산가족들에게 전달됐다.

늘 열악한 환경하에 처해있는 북한 주민들로서는 송금수수료가 얼마이든 워낙 미화가 강세이니 전혀 불평이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1994년부터 북한 정부 내부형편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으며, 캐나다송금이 중간 분실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평양송금이 끊기게 됐다.

당시 토론토 해외이산가족회 전충림 사장의 위대한 업적은 다름 아니다. 1979년부터 91년까지 12년간 북미주와 남미교포 이산가족 4천여 명을 찾게 해준 실적 때문이다. 그때 전 사장은 내게 “해외이산가족 찾은 게 약 1천여 명 정도는 된다”며 “북에 송금한 금액은 밝힐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엔 HCR 탈북자 등록

또 그는 “이상하게 캐나다에선 이산가족을 찾는 신청자가 극히 적다”고 전했다. 이산가족 신청자들은 거의 전부 미국각처에 산재한 교포들이라는 것이다.

1989년 평양축전 때부터 미 서부 LA 친북단체(회장 양은식 박사)가 북한으로부터 미주교포 방북사업을 분리해 맡았다. 그전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오랫동안 북한 관련 업무를 주관해 왔다. 91년 11월 LA 한민족연구회는 토론토 전충림씨에게 ‘제5회 민족상’ 패(첨부)를 수여했다. 해외동포 이산가족 4천여 명 가정들을 찾아준 데 대한 공로로 인해서다.

한번 상상해 보자. 4천여 명 이산가족 가정이란 숫자를. 꿈에 그리던 북한가족 찾기를 돕느라 이민자 평생을 바친 전 씨에게 누가 빨갱이라고 돌멩이만 던지는가. 북미주 어느 교포사회에든 정말 수준 이하의 교포들이 우글거린다. 토론토 경우 특히 어르신 모임일수록 가관이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년회 감투싸움이 여전하다. 한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가 1980년대 첫 평양취재로 북한을 마주할 때는 김일성이 전부였다. 당시 북한에는 2000년대 초기까지 핵이 없었다. 80년대는 김일성 주석만 사망하면 남북통일이 되리라고 단순히 생각의 사람들이 많았다. 북한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나라다. 내가 보고 느낀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지금은 김일성시대에 없던 ‘북한 핵’이 더 추가돼 있지 않은가.

J씨 정년퇴직

북한은 김정일 정권 중반까지 ‘핵’을 보유하지 못했다. 북한이 최종 핵을 성공시킨 것은 지난 2005-6년경이다. 남한에 김대중/노무현 진보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다. 1950년대부터 북한은 핵 개발에 모든 국력을 쏟아부었다가, 남한 진보정권 때 비로소 북 핵이 완성된 것이다. 김대중 햇볕정책이 일조를 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과거 정권만 탓할 일이 아니다.

북에 제3대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다. 순식간의 세월이다. 나는 80년대 후반부터 방북취재를 8번 했지만, 만약 북한 정부가 내 방북신청대로 모두를 받아줬다면 11번이 됐을 것이다. 그간 3번은 1차 방북 구두승인 후 최종 거부당하는 경우를 겪었다. 그로 인해 처음에는 방북신청이 성사된 줄 알고, 항공권(토론토-중국행)을 구입했다 취소하니, 3백 달러 페널티(벌금)를 물어야 했다.

북한 입국사증(비자)신청 때마다 늘 조마조마하다. 페널티 문제가 아니라 북한비자발급이 안 되면 일체의 취재계획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내 방북취재는 대개 신문사 사고로 공지해 왔다. 내 마지막 북한 비자가 거부당한 것이 2017년 김정은 정권 시기로 기억한다.

그때는 평양에서 국제태권도연맹 세계대회가 열렸을 때다. 북한 리용선 태권도 총재(본부 오스트리아 빈)가 내게 초청장과 방북신청서를 보냈다. 그는 “이번 평양 세계 태권도대회는 조국과 ITF(국제태권도연맹)를 만방에 알리는 특별 체육행사이니,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선전해 평양을 방문해 달라”고 당부까지 했었다.

전충림 민족상LA

이 때문에 진작 항공권을 마련했으나, 나중 평양에서 이메일로 비자거부 통보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추천한 북미주 2명 교포언론인에겐 비자발급이 됐다. 결국 그들 2명은 그렇게 말렸는데도 스스로 방북을 포기했다. 모처럼 첫 방북기회인데 내가 못 가게 된다 하니 겁을 낸 것 같다.

이는 북미 교포언론인에 한한 문제가 아니다. 북미주 북한 전문가라는 한인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무척 방북을 꺼려한다. 미 켄터키주 대학교수인 ‘한반도 4대 통일방안’ 창안자인 서광하 박사(미 시민권자)에게 예전부터 한번 방북을 권했다. 그러나 답변은 항상 “No. Thank you”이다.

다른 사람 아닌 언론인이나 북한을 연구하는 전문학자로서 방북에 겁을 먹고 북한접촉을 피하면, 그만큼 그들 주장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흔한 표현으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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