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73] 아랍에서 본 술탄과 황제들
[유주열의 동북아談說-73] 아랍에서 본 술탄과 황제들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0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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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 미국 연수를 다녀온 후 첫 해외근무지가 주아랍에미리트(UAE) 대사관이었다. 아랍에미리트는 아라비아반도의 동남쪽 걸프(페르시아만) 연안에 있는 중동 국가의 하나다. 중동은 기독교와 함께 이슬람교의 발상지이면서 대부분 산유국으로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지역이었다. 아라비아반도는 석유가 발견되기 전에는 사막으로 형성된 척박한 땅이었지만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간에 있어 아라비아 대상(隊商)들의 활동무대였다.

세계 인구의 3억 이상이 사용하며 국제연합(UN)의 공식 언어인 아랍어를 배우면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아랍과 이슬람문화에 대해 눈을 뜨고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값진 기회였다. 외교관 생활을 그만둔 지금까지도 당시 근무가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자산이 되고 있다.

부임하여 준비된 숙소에 입주한 다음 날 아침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시다)”라는 확성기 소리에 잠이 깼다. 인근의 모스크 미나레트(塔)에서 울려 퍼진 예배시간을 알려주는 소리였다. 길거리의 아랍 사람들은 백색의 전통의상을 입었고 여자들은 검은 의상에 얼굴을 가리는 사람도 많았다. 사막이라 낙타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알지만 오일 머니로 모두 부자가 되어 집집마다 최고급 메르세데스 벤츠 차량은 기본이었다.

아랍이라는 말은 고대 히브리어에서 사막(Arav)을 의미했고 아라비아는 ‘아랍의 땅’이라는 뜻이 있다. 사막이 대부분인 아라비아반도는 이집트를 속주로 하는 로마제국과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사이 완충지대로 국가 성립 시기가 늦었으나, 이슬람교와 함께 독립국가가 형성됐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는 570년 아라비아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멀지 않은 메카의 대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메카는 인도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대상로였다. 무함마드는 유복자로 태어난 데다 어머니도 얼마 후 중병으로 죽게 되어 카바 신전의 관리인 숙부에 의해 양육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숙부와 함께 카바 신전에 드나들면서 검은 돌을 숭배하는 다신교적 종교 의식에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성인이 된 무함마드는 금식과 사색을 통해 진리를 찾던 중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유일신 알라의 전지전능함을 가족과 주변 친구에게 설교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신앙을 포교하는 데 국가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믿고 정복 전쟁을 통해 아라비아반도를 신앙으로 통일했다. 그가 사망(632년)한 후 측근 중에서 선출된 칼리파(敎統)는 이슬람 세력을 규합 아라비아반도를 벗어나 조로아스터(拜火敎)를 믿는 페르시아의 사산조를 멸망시켜 우마이야 및 아바스왕조의 칼리파제국을 세웠다. 로마제국과 계속적인 전쟁과 흑사병으로 페르시아의 강국 사산조는 신흥 이슬람 세력을 당할 수 없었다.

사산 왕조를 정복한 이슬람 세력은 동으로 북부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의 피레네산맥까지 도달했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말이 그 무렵 나왔다고 한다.

이슬람은 아랍어로 복종 또는 순종을 의미하며 신도를 무슬림이라고 부른다. 이슬람교의 성경인 꾸란이 과거 양피지에 기록돼 극히 소수 지배층만 가질 수 있었는데 종이의 보급으로 일반 신도들도 손쉽게 꾸란을 볼 수 있어 교세 확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천산산맥에서 발원해 오늘날 키르기즈공화국 내 흐르는 탈라스 강 유역에서 아바스 왕조는 751년 서역에 진출하려는 중국(唐) 세력을 격퇴하고 포로로 붙잡은 중국인을 통해 제지기술을 도입했다. 당시 중국 측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 절도사였던 고선지 장군이 지휘했다.

신제품 종이에 기록된 꾸란이 널리 보급됐지만, ‘읽기’라는 꾸란의 의미처럼 발음이 중요해 다른 언어로 번역을 금했다고 한다. 이슬람교가 파급된 지역에는 민족과 관계없이 모두 꾸란의 언어인 아랍어로 읽고 암송해야 하므로 모든 무슬림은 스스로 아랍어에 능통해졌는지 모른다.

이슬람교의 팽창에는 투르크족의 기여가 컸다. 투르크족은 고대 중국에서 음차하여 ‘날뛰는 오랑캐’라는 의미의 돌궐(突厥)로 부르는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이다. 돌궐 이전에도 유목민을 비하하여 ‘시끄러운 오랑캐’ 즉 흉노(匈奴)라고 하고 몽골에 대해서도 ‘무지몽매하고 고루한’이란 의미로 몽고(蒙古)라고 불렀다. 유목민 고유의 언어로는 ‘강한사람’ 또는 ‘용감한 민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돌궐족은 광활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며 대제국을 이루었으나 중국(隋)의 이간책으로 동서로 분리됐다. 동돌궐은 더 이상 동진을 못 하고 중국에 동화됐으나 서돌궐은 서진을 계속해 이슬람세력을 만났다. 그들은 현지에 적응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용감한 전투력으로 주류사회에 진입했다. 탈라스전투에서 아바스 왕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용병으로 참전한 서돌궐족의 용맹성에 기인했다고 한다.

아바스 왕조의 용병으로 성장한 투르크 족의 셀주크 장군은 정변을 일으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를 동남쪽으로 밀어내고 셀주크제국을 건설한다. 셀주크제국은 카스피해 남부와 지중해 연안의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로마제국의 중심부인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해 보스포루스 해협에 가까운 니케아를 점령했다. 이 지역의 셀주크족은 룸(로마) 셀주크라는 나라를 세우면서 독립했다. 위기를 느낀 로마제국의 요청으로 서유럽이 원정대를 파견 200년간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1095-1291)이 일어난다.

룸 셀주크가 독립된 후 바그다드의 셀주크제국은 자체 내분으로 와해됐고 잔여 세력으로 구성된 호라즘왕조는 몽골제국에 의해 아바스 왕조와 함께 1258년 멸망됐다. 몽골제국의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룸 셀주크에서 그해 오스만이라는 투르크 영웅이 태어났다. 그는 쇠퇴해 가는 룸 셀주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오스만제국을 세워 스스로 황제(오스만 1세)가 된다. 그의 나이 41세인 1299년이었다.

오스만 1세의 꿈 이야기가 흥미롭다. 오스만이 어릴 때 마을 촌장의 딸을 흠모했으나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오스만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떠오르던 둥근달이 자신의 가슴으로 들어오더니 큰 나무가 쑥쑥 자라면서 하늘을 뒤덮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나무뿌리들이 네 갈래로 갈라지면서 네 개의 강이 형성됐다. 페르시아의 유프라테스강 및 티그리스강, 이집트의 나일강 그리고 로마제국의 도나우강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가지와 나뭇잎들은 모두 콘스탄티노플을 향하고 있었다. 오스만이 촌장에게 이상한 꿈 이야기를 하자 촌장은 크게 기뻐하고 그를 사위로 맞아들여 오스만제국 건설을 도왔다고 한다.

오스만제국은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우회하여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발칸반도까지 진격 도나우강을 만나게 된다. 발칸반도는 거대한 산맥으로 형성된 산지 지형이다. 발칸의 유래도 오스만제국의 투르크어로 ‘숲’ 또는 ‘산지’라는 뜻이다. 오스만 1세가 제국을 건국한 후 150년이 지나 1453년 그의 후손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이스탄불로 개칭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그 후 술탄 쉴레이만 1세 때는 헝가리 평원과 함께 동유럽 일부를 정복하고 동쪽으로는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국을 포함 바그다드 등 과거의 셀주크 영토를 회복하여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거대제국이 되어 오스만 1세의 ‘이상한’ 꿈이 거짓말처럼 실현됐다. 아바스 왕조의 멸망으로 아랍의 영향력은 약해졌으나 오스만 투르크를 중심으로 부상한 이슬람제국이 천년제국 로마를 멸망시킨 것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전설의 로물루스가 건국한 이래 240여년간의 왕정을 거쳐 500년에 가까운 공화정을 경험했다가 기원전 27년 처음으로 황제(아우구스투스)가 이끄는 제국이 됐다.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고 북아프리카를 포함 이베리아반도에서 중근동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 됐다. 수도 로마는 서쪽에 치우쳐있고 이탈리아반도 깊숙이 위치해 불편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동서양 교역의 중심에 있는 과거 그리스의 식민도시 비잔티움을 대제국의 수도에 걸맞은 신도시를 건설하여 천도하니 새로운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탄생했다.

380년에는 니케아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다신교 로마제국은 일신교로 바뀌면서 국력은 더 강화됐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 때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를 기점으로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분리 통치했다. 정제(正帝)는 콘스탄티노플 부제(副帝)는 로마에서 상주하면서 동서로마제국을 이끌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비잔티움제국)는 경제적 부를 축적 가난한 서로마를 지원했으나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끊임없는 전쟁으로 재정 능력이 악화되어 지원이 어려워지자 서로마가 쇠약해지면서 주변의 게르만 민족에게 허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서 분리 후 100년도 안 되는 476년 서로마는 내분과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군사령관 오도아케르의 배신으로 멸망된다. 로마제국이 사라진 서유럽에는 힘의 공백을 틈타 게르만족이 과거 로마영토로 대거 이동 481년 프랑크왕국이 세워지고 496년에는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해 발전과 분화를 거듭했다.

동로마의 중흥황제인 유스티아누스 대제는 이전과 다른 훨씬 거대하고 화려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537년 건축했고 밖으로는 2차에 걸친 원정 끝에 552년 이탈리아 반도를 포함 옛 서로마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는 군사적 업적을 남겼다.

동로마는 서로마 멸망 후 1000년을 이어갔으나 이슬람교로 개종한 투르크인이 세운 셀주크 및 오스만제국에 의해 중근동지역 및 발칸반도의 고유한 영토를 빼앗기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지역이 섬처럼 명맥만 유지하다가 그마저도 함락되면서 기독교 국가 로마제국은 사라지고 이슬람의 오스만제국이 등장했다.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두고 21세의 젊은 이슬람국 술탄과 동로마제국 황제간의 1453년 공성전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어 지금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동로마의 지식인들이 그리스 및 로마의 문헌을 가지고 서쪽으로 대거 탈출하여 이탈리아 도시국가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던 르네상스(문예부흥 운동)의 새로운 에너지가 됐다. 지중해 지배권이 오스만제국에 넘어가자 동서 교역을 위해 대서양을 통한 대항해시대가 시작됐다. 지중해 시대 동방무역의 중심이었던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등 대항해시대의 주역이 된 것도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결과였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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